박카스와 검정봉지

4. <박카스와 검정 봉지>

    도서관의 잠을 깨우는 건 청소를 해주시는 어르신들이었다. 

    총 8명의 어르신들은 4인 1팀씩 격일로 근무를 하셨다. 더울 때나 추울 때나 걱정이 없었던 것이 어르신들이 먼저 오셔서 추울 때는 따듯하게, 더울 때는 시원하게 늘 도서관 온도를 맞춰 주셨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아이들이 오는 곳이라며 도서관 곳곳을 말 그대로 반짝반짝 윤이 나게 해주셨다. 
    그리고 가끔 수줍게 들고 오시는 마법의 검정 비닐봉지. 어떨 땐 책상 위에 무심히 놓고 가시고, 어떨 땐 직접 건네주시고, 어떨 땐 청소를 마친 뒤 소풍 오신 것처럼 둘러앉아 마법의 검정 봉지를 푸신다. 
    그 봉지(아, 그냥 ‘봉다리’라고 부르고 싶다.) 안엔 곶감이, 사과가, 빈대떡이, 지난 명절에 남아서 냉동실에 있다가 프라이팬에 기름을 잔뜩 묻혀 소생시킨 고소한 인절미 누르미가 나온다. 꼭 알라딘의 램프 같다. 어르신들의 오랜 시간을 거쳐 축적된 노하우로 완성된 핸드메이드 먹거리는 그 어느 것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맛을 냈다.
    때에 따라 듣도 보도 못한 딸기청 같은 개성이 묻어나는 것이 나올 때도 있고, 손수 깎고 햇볕을 담뿍 담아온, 흔하지만 안 먹고 때를 지나면 섭섭한 말랭이들이 나올 때도 있었다.
    그리고 자양강장제도 빼놓을 수 없다. 도서관에 행사가 있거나, 어르신들이 야유회라도 다녀을 땐 어김없이 박카스나 쌍화탕을 사오셨다. 

    박카스와 검정 봉지를 내미는 어르신들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미소는 아이의 것, 바로 그것이었다. 정이 많다, 로는 표현하기 힘든 천진난만한 자부심이 묻어 있었다. 피고용인일지언정 세월을 견뎌온 어른으로 이 정도는 한다는, 베풂의 기개가 묻어나는 것이다. 언제나 무슨 일이든 이토록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삶의 진실을 드러낸다.  
    우리 직원들은 검정 봉지를 사이에 두고 어르신들과 더욱 돈독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어르신들도 아이처럼 서로에게 삐치고 투거리다가도 그중 누군가 검정 봉지를 들고 오는 날엔 화해를 하자는 신호였다. 굳이 미안하다 말하지 않아도 흔들거리는 검정 봉지가 보이면 마음이 벌써부터 풀리셨으리라.  
    이처럼 인생의 선배님들이 건네주시는 세월이 담긴 갖가지 맛들은 도서관에서 생활하는 동안 나를 이곳저곳 살찌웠다.  

        

 

5. <그 반짇고리에 담긴 것>  - 김동수의 <잘 가, 안녕>을 읽고

    도서관은 ‘어린이 도서관’이란 콘셉트에 맞게 어린이책이 대부분이었고 그중 그림책이 장서의 70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림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날마다 이렇게 많은 그림책들을 마주하는 건 감격스러운 일이다. 김동수의 그림책 <잘 가, 안녕>을 만난 것도 이때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좋아하는 그림책이 되었고 지금은 내 인생의 그림책들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다.

    <잘 가, 안녕>은 한 할머니가 길에서 로드킬 당한 동물들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잘려서 사라지고, 찢어지고, 뭉개진 몸들을 정성스럽게 다시 ‘복원’해 주는 이야기이다. 이때 복원의 도구는 다름 아닌 실과 바늘이며 사라져 없어진 신체 부위는 할머니의 목도리 같은 것들로 꿰매져 다시 예전 모습으로 소생된다. 고라니, 개구리, 강아지, 뱀 들은 하나하나 할머니의 손과 말의 위로로 상처가 꿰매어지고 따듯한 이불에 눕혀진다. 온전한 몸이 아니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을 떠돈다는 말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할머니의 행동은 이승의 강을 무사히 건너게 해주는 장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책이 그렇듯 이 그림책 역시 표면적으로 보이는 ‘작은 동물들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는 마음’만으로 읽히는 것은 아니다. 각자 자신이 처한 입장과 생각으로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결정적 이야기와 분위기가 존재한다. 내겐 동물들의 몸을 다시 잇는 도구가 들어 있는 ‘반짇고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전체적으로 모노톤인 데다 로드킬 당한 동물들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밝게 표현할 수 없는 그림에서 반짇고리만큼은 밝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그것이 동물들을 다시 복원해주는 것들이 담긴 것이어서 그럴 것이다.

    나도 살면서 로드킬을 당한 적이 있고, 로드킬을 당한 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이때 복원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리고 어떤 도구들을 꺼내들어야 하는 것일까?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매번 이러한 질문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지난 일들까지 ‘충분히’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 상처를 받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나 자신을 다시 찾는 일만이 제대로 된 치유가 된다는 걸 알게 된다. 찢기고 떨어져나가 너덜너덜해진 내 자아를 다시 잇는 일. 그 방법과 태도들은 내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반짇고리)에 담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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