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위한 의자

9 <영혼을 위한 의자> - 그림책 『잃어버린 영혼』을 읽고

    어린이도서관의 1년 도서 구입비는 총 4백만 원이었다. 쏟아지듯 책이 출간되고 있는 상황에서 1년 동안 고작 250여 권의 책을 구입한다는 건 심각한 선택 고민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신간 구입 목록’을 작성할 땐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이때는 믿을 만한 매체나 평론가, 작가가 추천한 책들을 뒤적거리고 최대한 ‘감’을 총동원한다. 모든 책을 읽을 수 없으니 뒤표지와 보도자료, 서평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 그 책을 선택할지 말지는 그동안 수없이 책을 읽고 실패하고 웃고 울며 감동받았던, 지층처럼 쌓여서 발현된 감이 버튼을 누르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감에 의존하지 않는 예외도 있다. 바로 수상작들이다. 뉴베리 상, 볼로냐 라가치 상,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권정생문학상, 노벨문학상, 아스트리드린드그렌 상 등등 우리가 흠모하고 믿고 있는 상을 받은 작품들은 되도록 목록에 넣으려고 한다. 당연히 상을 받았다고 다 좋은 작품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도서관이란 곳이 ‘공공의 책장’이므로 사서의 가치관과 취향 이전에 지금 이 세계가 어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그 눈과 목소리를 보여주고 들려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가장 우선순위에 둘 일은 신인 작가의 작품이나 아직 세상에서 빛을 못 보고 있는 뛰어난 책들을 찾아서 서가에, 그것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큐레이션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난 책이 올가 토카르축이 글을 짓고 요안나 콘세이요가 그림을 그린 『잃어버린 영혼』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첫 그림책이라니! 요안나 콘세이요가 그림을 그렸다니! 게다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없는 폴란드 작가들이라니! 또 그 무엇보다 ‘영혼’에 대한 이야기라니! 선택 버튼을 안 누를 수가 없다. 그리고 예상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이 책에 더욱 빠져들고 있는 중이다.
    이 그림책이 처음 나에게 닿았을 때 이런 질문이 들려왔다. “영혼이란 무엇일까요?” “당신의 영혼은 지금 어디쯤 있나요?” “영혼을 놓쳤다면, 그 영혼을 기다릴 의자가 있나요?” 그러자 내 안의 아주 깊숙한 곳에서 “당신은 영혼을 잃어버렸습니다.” 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영혼이 도대체 뭐지, 라는 생각이 정리도 되기 전에 내 영혼이 몸을 못 따라오고 어디쯤인가에서 외로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철학자 이정우는 그의 오래된 저서 『영혼론 입문』에서 영혼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소크라테스는 “그대의 영혼을 돌보라”라는 말을 자주 했다.(…)
    또 소크라테스는 “그대 자신을 알라”는 델피의 신탁을 늘 음미하곤 했다고 한다. 이 말은 때로 엉뚱하게 인용되곤 한다. 잘난 척하는 사람에게 “너 자신을 알라”고 한다. 이것은 엉뚱한 사용이다. 원래 이 말은 “그대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알라”라는 뜻이다. 당신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얼마나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라는 뜻이다. 그 말은 곧 “그대는 미천한 존재가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다”라는 뜻이다. (…) 이렇게 “그대의 영혼을 돌보라”라는 말과 “그대 자신을 알라”는 말은 서로 통하는 이야기이다.

    –이정우, <영혼론 입문>, 16쪽

    고대 그리스 철학자 입에서나 듣던 ‘영혼’이란 단어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와 닿기는 처음이었다. 아주 오래전 만났던 저 문장들은 그동안 내 가슴속 깊은 곳에 묻혀 있다가 한 권의 그림책 덕분에 불쑥 튀어나왔다. 고대 그리스에서나 자연스럽게 말해지던 ‘영혼’이란 단어가 이토록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은 건, 내 영혼이 그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돌보지 못한 영혼이 과거 어디쯤인가에서 할퀴고 상처받은 모습으로 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른이 되어 만난 ‘어린이도서관이란 공간’과 ‘아이들이라는 관계’는 더욱 이 그림책을 들여다보게 했다. 그림책엔 얀이라는 사람이 나온다.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을 하고 바쁘게 살아서 당연히 영혼을 잃어버렸고 급기야 자기 이름도 잊게 된다. 가까스로 여권을 보고 자기 이름이 ‘얀’이라는 걸 안 이 사람은 현명한 어느 여자 의사를 찾아가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자기만의 어떤 장소를 찾아 편안히 앉아서 영혼을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다행히 얀은 작은 집을 구해 매일매일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다른 일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얀이 영혼을 잃어버린 시점을 보면, 어린 시절의 어느 순간이다. 원래 몸과 영혼이 함께 있었을 그는, 벤치에서 영혼을 놓치고 만다. 이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어린 영혼’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리고 도서관에 오는, 아직 영혼을 놓치지 않은 아이들을 생각했다. 그러다 이 도서관이 저 아이들에게 벤치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에 저 아이들이 그만 영혼을 잃어버리고 자기만의 의자에서 영혼을 기다릴 때 도서관이라는 ‘벤치’를 떠올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럼, 벤치에서의 기억이 좋아야겠단 생각까지 미치자, 누군가 들려줬던 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다.

    당시 도서관에서 일을 시작할 때 딸아이의 나이는 고작 4살이었다. 퇴근 후 어린이집으로 헐레벌떡 아이를 데리러 가면 저녁 7시가 다 되어 있고 남은 아이는 한 명이거나, 아예 없거나, 였다. 이때 느끼는 죄책감과 고민을 토로하자, 이미 성인이 된 자제를 둔 엄마였던 한 지인은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당시 한창 일이 바빠 제대로 아이를 돌보지 못한다는 자괴감이 고개를 들 때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내 아이도 그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돌봐주겠지.”라는 믿음을 품고 그 시간을 통과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떠올리니, 다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이야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고대에 그랬듯이, 다시 영혼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영혼의 돌봄’에 대한 부활을 꿈꾸어야만 한다. 이런 이야기는 케케묵은 것도 아니며, 과장되고 허황된 추상적 개념도 아니다. 당연히 자주 언급되어야 하고, 자기만의 장소에서 영혼을 기다리는 어른이 될지도 모를 아이들을 위해 벤치에서의 기억을 만들어줘야 한다.
    스스로를 제대로 알고 영혼을 돌보는 어른이 되도록 ‘어린이도서관’이 아주 작은 벤치 하나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을 위해 이런 벤치에 대한 마음을 갖는다면, 내 아이에게도 누군가 작은 벤치 하나를 마련해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 영혼도 분명 다시 찾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혼을 돌보는 것이고, 서로를 돌보는 일이 아닐까?

 

 

댓글(1)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