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멀레이드가 끓는 시간 - 에바 린드스트룀 그림책을 읽고 ⓶

 

모두 가 버렸어.

    에바 린드스트룀 그림책 <모두 가 버리고>의 첫 문장이다. 표지에 주인공 프랑크가 ‘모두 가 버리고’라는 제목 아래에 서 있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첫 장을 넘기면, 세 명의 친구들이 몸은 오른쪽을 향해 있지만 시선은 왼쪽을 바라보고 있다. 연이어 보면, 프랑크와 친구들이 서로 바라보는 모습이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서로’ 바라보는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프랑크는 시선과 몸이 모두 한곳을 향해 있지만, 친구들은 어딘가를 가고 있는데 시선만 반대쪽으로 곁눈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화면에 담기진 않았지만 단절되어 보이는 시선 처리가 이 책의 주제와 잘 닿아 있다. 표지에서부터 이미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글의 시작부터 첫 문장과 표지 이야기를 단도직입적으로 하는 이유가 있다. 이 책을 만난 순간, 반해버렸기 때문이다. “아, 이런 이야기를 기다렸어! 이런 디테일과 은유라니!”라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러니 야속하게도 사랑하는 사람이나 책 앞에선 (그게 특히 이제 막 사랑에 빠진 경우라면 더욱) 극도로 달뜬 나머지 머릿속은 정리가 안 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글은 너무나 당연하게 ‘실패’다. 지금 내가 이 책을 대하는 태도가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두서없이 쓴 글을 내일 아침에 볼 용기가 나진 않지만, 14화까지 연재하면서 딱 한 번 마감을 어겼고 다시는 연재를 건너뛰는 일 없이 잘 마무리 짓자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렇게 무슨 말이라도 쓰고 있다. (절망스러우면서도 스스로가 기특하다. 그리고 내가 유명인이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읽어주시는 분들이 많지 않고 그나마 지인들이라 이것 역시 또 다행이라고 위안을 삼고 있다. 이런 식으로 분량을 채우다니.) 암튼 각설하고 이 책에 왜 이렇게 반했는지 두 가지만 말해보려고 한다.

    프랑크는 외롭다. 모두 가버리고 혼자 남은 자리가 허전하고, 몰려서 노는 친구 티티, 레오, 밀란이 부럽기만 하다. 하지만 곁눈질로 흘깃거리기만 할 뿐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티티, 레오, 밀란도 그렇다. 셋이서 재미있게 노는 것처럼 보이지만 혼자 있는 프랑크가 자꾸 신경 쓰이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셋도 프랑크처럼 흘깃거리기만 할 뿐 같이 놀자는 말을 먼저 하지는 못한다. 그러다 프랑크가 혼자 어딘가로 간다.

    마멀레이드 레시피
    집에 돌아온 프랑크는 눈물을 흘리고 그 눈물을 냄비 한가득 받는다. 그러고 나서 프랑크는 책에서 읽고 응용해 봤을 레시피대로 (혹은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자신만의 마멀레이드를 만든다. 프랑크는 냄비에 400밀리리터 설탕을 붓고 끓을 때까지 꼼꼼하게 젓는다. 시간은 프랑크가 끓이고 싶은 만큼이다. 정말 간단한 레시피다. 맛있는 마멀레이드를 완성하기 위해선 눈물과 설탕 약간 그리고 끓는 시간만 있으면 된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프랑크 집 곳곳엔 마멀레이드 레시피 북이 여러 권 놓여 있다. 내 눈에 띈 것만 해도 <가장 맛있는 마멀레이드>, <마멀레이드 소백과>, <세계의 모든 마멀레이드>. 이렇게 세 권이다. 분명 집 안 다른 곳에도 마멀레이드 관련 책이 또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데 이다지도 다양한 레시피 북이 굳이 필요할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미루어 짐작하건대, 프랑크는 외롭거나 마음의 허기가 찾아올 때마다 자신의 상처를 그 상태로 덮거나 외면하지 않고 달콤함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시간을 들여 눈물과 설탕으로 끓인 마멀레이드는 특별할 수밖에 없다.
    관계의 마술이 이 마멀레이드 레시피에 있다. 간단하지만 시간이 걸리고, 쉬운 것 같지만 적절한 맛과 묽기를 만들기 위해 미세한 감각을 총동원해야 한다. 뻑뻑해도 묽어져도 안 되기에 마멀레이드가 완성될 때까지 정성을 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마멀레이드가 맛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니 마멀레이드를 식히기 위해 열어 놓은 창문으로 친구들이 머리를 쏙 내민 것이리라.

 

 

“여느 때와 같아.”

    이 책에 나오는 아주 짧은 글들은 군더더기가 없다. 하지만, 아니, 그래서 시적이고 아름답다. 그런데도 아주 풍부한 서사와 깊이가 따라온다. 아래 문장이 그렇다.

프랑크가 친구들 셋이 몰려서 노는 장면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혼자 남은 장면에서 이런 말을 한다.

 

모든 게 여느 때와 같아.
여느 때와 같기만 할 뿐이야.

 

    아, 뭐라고 말해야 할까. 어떤 서사적인 맥락이나 설명이 나오지 않아도 프랑크의 ‘여느 때’가 상상이 간다. 딱 저 두 줄로 말이다. 그 외로움과 쓸쓸함, 상실감이 잘 표현되었다고밖에 못하겠다. 그림까지 함께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거의 마지막 부분, 친구 셋이 마멀레이드 냄새 때문에 혹은 프랑크가 궁금해서 창문에 매달려 있는 장면에서도 아래와 같은 문장이 나온다. 이건 딱 한 줄이다.

 

여전히 모든 게 여느 때와 같아.

    그렇다. 여전히 모든 게 여느 때와 같다. 전혀 다른 상황의 그림 아래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뜻이 달라지는 문장을 아로새겨 놓았다. 이것이 문학이다.

 

***

 

    역시 실패다. 마무리까지 오니 더 확실히 느껴진다. 퇴고할 시간도 없거니와(이미 마감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래도 이번 연재를 무사히(?) 마쳤다는 것에 의의를 두려 한다. 색감이랑 강아지처럼 생긴 토스터기, 맑고 차가운 눈물바다처럼 보이는 주방 바닥, 나무들 몸통 등 그림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그러니 혹시 이 글을 읽은 분이 계시다면 <모두 가 버리고>를 꼭 한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참, 지금 나도 마멀레이드를 끓이는 중이다. 그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뻑뻑해졌지만 눈물 몇 방울이면 어느 정도는 원하는 맛이 될 것이다. 그때는 나도 틈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식혀서 깨끗한 유리병에 담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함께 먹을 누군가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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