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로 된 스케줄러를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예전 같으면 연말이 될 때마다, 다가올 새로운 해에는 야무지게 살아본다는 결심의 증거로서 스케줄러를 사곤 했다. 하지만 그건 늘 연초에만 부지런히 사용될 뿐 여백투성이로 버려지는 경우가 많았다. 대신 이제는 모바일 캘린더 앱을 사용한다. 작년까진 텅 비어있었는데, 기획하고 벌린 일이 많아진 탓에 지금은 캘린더가 빈틈없이 꽉 차 있다. 방 청소나 일기와 같은 주기적인 생활은 회색, 보통의 일정은 진회색, 외주 일정은 초록색, 마감은 빨간색, 에세이는 하늘색, 분홍색, 갈색으로 표시해두었기에 캘린더는 알록달록하다. 이번 달엔 외부 업무가 9개나 잡혔고, 에세이 3권 출간 준비, 외주 2가지, 새로운 기획 미팅 2건이 잡혔다. 거기다 개인적으로 글쓰기 모임과 시..
글을 시작하기 전에 그림책 앞에서 한동안 가져온 나의 이중감정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 이중감정은, 지금은 청소년이 된 나의 두 딸아이가 글자를 모르던 어린시절을 지나던 시기에 특히 깊었다. 그림책은 아이를 위한 것. 그림책 읽기는 부모가 아이를 위해 해주어야 하는 필수적인 행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걸 뺀다면 그 밖의 돌봄 목록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것이 바로 그림책 읽어주기일 테다. 말하자면 그것은 아이의 정신을 키우기 위한 것이고, 영혼을 돌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림책 읽어주기는 대개 엄마만의 숙제일 때가 많다. 전업주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젖 먹이듯 아이를 품은 채로, 혹은 ‘엄마냄새’를 풍기며 지붕처럼 아이를 감싼 채로, 그 누구도 아닌 엄마의 목소리를 들려줘야 한다는 무언의 ..
by soon 혼자놀기 유영순 언제부터인가 나에게 큰 혹이 생겼다나도 스스로 혹이 되어 무게감을 느낀다 친구도 떠나가고취미도 특기도 떠나가고슬픔도 기쁨도 떠나가고 하물며 형제까지도무덤덤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사네 보람되고 재미나고 기쁘고, 어떤 게 있을까아직도 생각은 진행 중 새벽.나만의 님을 만난다.마음의 평안함과 기쁨을 얻는다참 좋다 아침.운동 삼아 아침 길을 걸으며이름도 성도 모른 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인사를 나눈다.얼굴을 마주하며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XX교회 집사님, 67세 형님또 어떤 사람들기쁘다 낮에는 나를 닮은 볼품없는 화분을들여다보고 물도 주고 이야기 나눈다어제보다 조금 컸네대견하다 수세미를 뜨개질하면서우리 집이 아닌 다른 집의 부엌을 상상해보고반짝거리는 그릇을 떠올려본다 싱크대의 세..
우울해본 적 있나요? 몇 년 전부터 나는 빌리 아일리쉬에게 흠뻑 빠져있다. 빌리 아일리쉬는 특유의 음울하고 자기파괴적인 가사와 몽환적인 음색으로 큰 인기를 끌어왔다. 지난 7월,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분위기의 노래를 발표했다. 《my future 나의 미래》에서 그녀는 특유의 나른하면서도 달뜬 목소리로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한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졌고 또 사랑하게 되었다고. 빌리의 음울한 노래들에 깊이 공감하면서도 마음 아파했던 나로서는 그녀가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비슷한 시기에 나 또한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맺고 있는 관계, 환경에 대해, 그리고 그것들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처음이다. 내 삶을 이렇게 불안으로부터..
Image from google 여러분이 살면서 들어본 가장 인상적인 개소리는 무엇인가요? 제게 물으신다면 당장 떠오르는 것으로, 한때 밈으로까지 자리잡았던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최근의 ‘페미니스트 대통령’ 등이 있습니다(할많하않). 워낙 시대가 흉흉하고 각박해져서 (올)바른 소리보다 개소리가 더 많이 들리는 날도 더러 있는 요즈음인데, 얼마 전에는 넘쳐나는 개소리의 망망대해를 자맥질하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인의 의견에 대한 폄하의 의미가 다분한 이 ‘개소리’라는 정의는 보통 의견의 불일치로 인한 결과물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열이면 열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개소리도 있죠. 보통 어떤 경우일 때가 그것은 영락없는 개소리인 것으로 판명될 수 있을까..
나이가 마흔에, 영화 피디였던 찬실은 항상 함께 합을 맞추던 감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었다. ‘예술 영화’만 하던 찬실을 영화판에서 찾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다. 아는 동생 영이에게 마음을 고백했으나 아주 젠틀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차인 외롭고 또 외로운 찬실 씨. 마흔이 되면, 아니 서른이 되면, 아니, 사실은 스무 살만 돼도 어른이 될 줄 알았는데 현실은 늘 녹록지 않다. ‘뭐 굳이 어른이 되어야만 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고 머리로는 애써 그렇게 생각했지만, 솔직히 마음마저 그렇게 담담히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나는 비혼주의자는 아니어도 결혼을 안 하거나 혹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해가 지날수록 더 실감한다. 나는 이 세계에서 혼자서 살아남아야 하고, 오래도록 일할 수 있..
*이 에세이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삶에 대한 존중 지난 8월부터 다시 상담을 다니기 시작했다. 이번엔 상담이 중심이 아닌, 약물 치료가 중심이다. 박원순 성폭력 사건을 시시각각 접하면서 이전에는 없던 증세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불안이 극에 달한 나머지 공황 장애가 생겼다. 한밤중에 잠에서 깬 건, 제대로 숨이 안 쉬어져서였다. 분명 숨을 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점점 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허벅지의 살을 맨손으로 모두 잡아 뜯어내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고, 공황 장애에 대한 공포를 처음으로 체감했다. 강렬한 자학의 충동과 함께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손톱 밑에서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줄곧 살고 싶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매일 새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일상을 간신히 유지하..
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에게 돈 없이 허락되는 것은 단지 숨 쉬는 것뿐인데.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예술가에게 특히 이런 잣대를 들이대곤 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되면 오히려 예술적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든지, 가난과 결핍이 예술혼을 불어 넣는다고도 하고요. 이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술가도 경제활동의 수단인, 직업이라는 범주에 속하는 활동이잖아요. 게다가 경제적 보상이 일한 것만큼 이뤄지지 않는 활동은 엄연히 ‘자원봉사’라는 이름으로 따로 존재하고 말이죠. 흔히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사람은 두 가지 유형 중 하나라고 합니다. 하나는 어마어마한 부자라 돈 개념 자체가 일반인과 다른 집단이고, 또 하나는 자신의 돈 문제는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타인의 그것은 알 바..
성당은 영어로 Cathedral이다. 카시드럴? 캐시드럴? 강세가 th에 붙는구나. 발음을 기억하기 쉽지 않네. 몇몇 사람에게 물어봤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 소설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대학교에서 일했다던 로버트 아저씨도 그런 이름의 소설은 모른다고 했다. 그래도 퍼블릭 도서관에 단행본은 있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 스물아홉 살에 회사를 그만두고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왔다. 큰 결심이 있었던 건 아니고 안 되기 전에 한번 해보고 싶었다. 대충 시기에 맞춰 들어간 회사라 미련도 없었다. 다시 만난 남자친구에게도 그 얘기를 제일 먼저 했다. 워킹홀리데이를 가야겠다고. 교환학생 이외에 처음 겪을 외국살이라 준비는 해야 할 것 같아 회화학원도 다녀보고 여기저기 정보 수집 같은 것도 좀 하고. 알아볼수..
“괜찮아요. 아마 내가 더 좋아하나 봐요.”(내편이 아닌 남편) - (2019. 2. 2.) 유영순(68) - by soon “니 어디 갔다가 두 시간이나 있다가 오노!” 그는 절룩거리는 다리로, 펴지지 않는 주먹을 힘껏 쥐고 화를 내며 거실로 나온다. 곧장 한 주먹 날릴 기세다. “어디 갔다 오기는… 새벽 예배 갔다 오지.” “두 시간이면 부산을 갔다 와도 될 시간이다. 니 옛날 애인 부산 살았잖아!” 칠원, 남지, 함안, 근교의 지역들을 다 들먹인다. “왜 그러노? 당신 요즘 좀 이상해진 것 같다…” 오늘 새벽도 여느 때처럼 나를 기다렸나 보다. “거실에 불은 켜 있는데 사람이 없대?” “오자마자 쓰레기 버리러 갔었다.” “그래” 오늘은 그냥 조용히 넘어간다. 8년 6개월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거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