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멜리에는 내가 무척 애정하는 영화다. 크리스마스보다 따듯한 색감부터 치밀한 듯 어리숙한 아멜리에까지 하나, 둘, 셋, 열까지 마음에 든다. 만약 나에게 영어 이름을 지으라면 아멜리로 정할 생각이다. 이제부터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문을 적을 예정인데, 이 글을 읽는 이가 영화 ‘아멜리에’의 매력을 한 자밤 정도 발견할 수 있다면 좋겠다. [광대 같은 사랑스러움] 물수제비를 던지는 순간, 크렘 브륄레의 설탕 껍질을 숟가락으로 톡톡 두들겨 깨뜨리는 순간, 지금 이 순간 오르가슴을 느끼는 이가 몇 명일까 세어보는 순간. 아멜리에는 세상을 오밀조밀하게 구경하곤 한다. 아멜리에는 어릴 적 심장병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받아 학교도 다니지 못해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아 늘 외로웠다. 북적이는 사람 곁에 있어 본 적도 ..
5년 전인가 6년 전인가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는데, 하여튼 나에게 처음 결혼 얘기를 꺼낸 남자는 내가 20대 초 중반이던 시절 연애하던 남자였다. 그는 나보다 여덟 살이 많았고, 결혼을 무척이나 하고 싶어 하던 사람이었다. 당시의 나는 서른 살쯤 넘으면 천천히 결혼 같은 것도 생각해 보겠다는 입장이었고 내 입장에 대해 얘기할 때마다 그는 틈만 나면 우리 둘 다 안정이 필요하다나 뭐라나, 그랬던 것 같다. 사실 내가 그린 인생의 그림에는 ‘결혼한 나’라는 것이 없었다. 남의 울타리 안으로 편입되면서 내가 타자화되는 것이 불쾌하고 무서웠다. 이 불쾌함과 무서움의 근본이 되는 사건이 몇 차례 있었다. 가장 최초의 사건은 일곱 살 때다. 내가 일곱 살이고 동생이 다섯 살이던 어느 겨울날, 엄마는 나갈 채비를..
애인은 가끔씩 돌발 질문을 던져 놀라게 만들곤 했다. 이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달달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작스런 질문을 했다. “만약 내가 남자여서 나 닮은 아이를 낳아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에요?” 아기를 낳는 것에 대해 꽤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지라 입장은 확고했다. 질문을 듣자마자 생각이 주마등처럼 흘러갔고 당혹스러웠다. 애인과 내 뜻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아파서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쯤이었나 친한 사촌 오빠가 아기를 낳고서야 아기를 ‘나의 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동안 아기가 싫었기 때문에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친한 사람이 (나는 싫어하는) 아기를 낳다니,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아기가 왜 싫지? ..
뭐든지 처음은 낯설고 그 낯섦은 결국 어려움이 되어버린다. 해내야 하는 업무의 난이도는 높지 않지만 낯설기에 어렵게 느껴진다. 이 아르바이트 일도 그러하다. 오랜만에 마주한 포스는 예전에 사용하던 포스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부분이 많았다. 카드 결제를 누르면 바로 결제되지 않고 승인 키를 한 번 더 눌러야 결제가 된다는 것이나, 바코드가 등록되어 있지 않은 상품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때마다 가격을 확인하여 그 값을 결제하고 후에 시간이 있을 때 몇 번의 클릭을 걸쳐 바코드와 가격을 등록해야 한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포스 조작의 낯섦뿐만 아니라, 편의점 업무와 동시에 샷을 내려 커피나 기타 음료를 제조해야 하는 카페 업무를 해야 한다는 것도 큰 낯섦이었다. 늘 그렇듯 시간은 꽤나 많은 것을 해결해준다. 얼마..
*본 에세이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건 꿈인가? 내가 기억하는 한, 제일 오래된 꿈은 무엇일까. 아마도 너 다섯 살 무렵. 나는 물속에 있었다. 가족들과 함께 산에 놀러 간 것 같다. 녹음이 짙은 숲을 한켠에 두고, 들쭉날쭉한 바위들이 계곡을 따라 넓게 퍼져있다. 나는 열심히 아빠를 따라 가고 있었다. 아마 그러다 중심을 잃고, 물속에 떨어진 듯하다. 열심히 허우적대보지만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물 밖에서 아빠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영화 의 첫 장면은 이 오래된 꿈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그리고 은희네 집에서 펼쳐지는 익숙한 풍경들.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냐는 아버지의 고함과 서럽게 들썩이는 울음소리… 배경과 배역이 조금 다를 뿐,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생생히 깨..
(9화 : 결혼이 뭐길래 후편은 다음 주에 연재됩니다.) 연예인 설리가 영면한 후 며칠이 지났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최초의 보도가 이루어진 날, 여러 반응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끓어올랐던 것을 기억한다. 어떻게? 왜? 너무 많이 힘들었구나, 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힘들어요, 그를 애도합니다, 당당해 보였는데 아팠구나, 그가 어찌어찌해서 죽었대요, 그가 자살을 했대요, 가장 험한 곳에서 가장 격렬히 싸워준 사람, 저 SNS 잠깐 접을게요, 그런 글들이 끊임없이 올라왔다가 다른 글들이 올라오며 빠른 속도로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런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군중심리가 작동해서 뭐라고 꼭 글을 올려야 할 것 같은 이상하고 희박한 의무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번에 당면하게 된 죽음은 그런 의무..
누군가 삵의 꼬리를 밟고 지나간 일은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라는 영화를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피해자를 그리는 영화의 방식이었다. 피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인물의 당위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방식으로 그려낸다는 점이 상당히 인상 깊었다. 피해자는 영화 속 옥분 할머니처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주변에 있다. 그럭저럭 혹은 잘 살아가며. 피해자다움에 대한 억압은 이미 이야기되어온 지 오래다. 보편적인 피해자의 고정된 이미지를 피해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억압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피해자라면 약자여야 하고 고통스러워해야 한다는 강요. 경찰에 신고하며 울지 않아서 피해자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피해자가 약자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억..
- 안녕하세요, 알바몬에서 보고 연락드립니다. 조이 / 27세 / 여성 / 차로 5분 거리에 거주, 자차 있음 / 카페와 편의점 아르바이트 경험 있습니다. 커피와 음료 제조 가능, 선입선출과 청소, 포스 사용 잘 합니다. 문자를 작성하는데 내심 ‘나를 뽑을 수밖에 없지’ 하는 자신이 든다. 생존에 쫓겨 해왔던 편의점, 카페, 식당, 주유소 등의 많은 아르바이트 경험과 1년 좀 넘게 근무한 회사 생활 이력은 대기업 취업에는 거의 도움이 안 되겠지만 중소기업이나 아르바이트 자리에 갈 때는 큰 자산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젊은 인력이 드문 노동시장에서는 더욱 그러할 텐데 이 동네가 딱 그런 상황이다. 문자를 발송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 안녕하세요, 문자 보고 연락드려요. 정말 감사..
1. 두 개의 섹스, 두 개의 신체 사진작가 하워드 샤츠(Howard Schatz)는 ‘ATHLETES’라는 작업에서 스포츠 종목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발달된 선수들의 신체를 한 줄로 나열했다. 사이클 선수의 허벅지, 수영 선수의 광배근, 레슬링 선수의 납작한 귀와 땅딸막한 체구, 농구 선수의 길쭉하게 붙은 종아리 근육 등 각기 다르게 발달한 신체를 통해 스포츠의 특징을 한 프레임 안에서 볼 수 있었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신체에 나타난 종목 간의 유사성인데, 비슷한 또는 같은 종목이라고 생각해왔던 종목들이 예상과 다르게 각기 다른 신체 발달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200m 육상 선수의 신체는 같은 러닝 레이스 종목인 마라톤 선수의 신체보다 오히려 농구 선수의 신체와 닮아 있었다. 특히 마라톤이나..
욕망의 발견 먹고 싶은 것을 먹고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게 된 후에도 텅 빈 채 생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돈이 있어도 시간이 있어도 아무런 의욕 없이 유투브를 뒤지며 올해의 웃긴 영상들을 통해 어떻게든 무언가를 느껴보려는 몸짓을 하는, 나른해진 몸을 침대에 뉘인 채 스마트폰만 바라보는 수 만명의 사람들. 그들의 텅 빈 공간은 스마트폰 혹은 술과 사람들이 채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여행을 다니고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그들 중 누군가는 침대에 누운 그 순간에 텅 빈 껍데기를 만날지도 모른다. 그 때에 우리가 해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우리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더 많이 잘 모른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를 모른다는 것을 느끼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