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리본을 단 삵을 사람들은 여전히 쳐다보았지만 삵은 거울 속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처참했다. 네모난 몸과 드러난 갈빗대, 늘어진 살가죽들. 옷을 입었을 때와는 달리 날것으로 거울 앞에 서 있는 나는 초라하고 비참했다. 내 몸의 곡선들은 전부 직선 혹은 늘어진 선들이 되어 있었다. 거울 앞에서 알몸으로 서 본 적이 잘 없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내 몸은 내 생각보다 내게 낯선 것이었다. 처참한 모습 때문인지 자신감이 없었던 마음의 문제인지 모델 면접은 2번 떨어졌다. 두 번째 떨어졌을 때 전화로 사정한 끝에서야 한 달간의 유예기간을 얻어낼 수 있었다. 첫 주는 모델 일을 얻어내기 위한 노력으로 내 생활을 바꿨다. 아침엔 운동을 하고 저녁엔 3시간씩 같은 포즈를 유지하는 연습을 했다. 20분 ..
뒤로 사이드 샤이어에게 이 시는 그가 방 안으로 뒤로 걸어오면서 시작해재킷을 벗고 그는 평생토록 곁에 앉네그렇게 우리 아빠를 다시 데려온다네난 코피를 콧구멍에 집어넣을 수 있어, 개미들이 구멍으로 몰려가듯우리 몸은 작게작게 자라 내 젖가슴도 사라지고네 두 뺨도 보들보들, 치아는 잇몸 속으로 박혀드네말만 해, 우린 다시 사랑받을 수 있어한 번이라도 동의 없이 우리를 만진다면 그 손을 뭉개버려난 시를 써서 시가 사라지게 할 수 있다네새 아빠는 술을 도로 술잔에 뱉고엄마의 몸은 계단 위로 굴러 올라가, 우두둑 뼈가 맞춰지네엄마는 뱃속 아기를 지키려는 걸까아가야 우린 괜찮을 거야난 인생을 전부 새로 쓸 거야, 이번엔 아주아주 사랑이 넘치도록넌 그 이상은 보지 못하겠지? 넌 그 이상은 보지 못하겠지?난 인생을 전..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에게 현재를 살아가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다. 동식물에게는 생존이 모든 것들에 우선하며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예측도 후회도 없다. 하지만 인간은 미래의 설계도를 그리고, 있지도 않은 관념과 상징을 신봉하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말하자면 자의식과 회한 덩어리이다.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알게 된 세상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또 다른 세상의 실험대 위에 서 있게 되었다. 캡틴과 안드로이드들이 새로운 ‘초인류’를 만들어내는 비밀 기지는 이곳을 찾아낸 ‘로봇파괴 혈맹단’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잭이 안드로이드들을 모아 방어에 나섰지만 ‘로봇파괴 혈맹단’의 규모는 생각보다 크고 조직적이었다. 캡틴이 주도한 ‘초인류 프로젝트’ 기지의 모든 시스템과 부품들..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 삵은 아끼는 빨간 리본을 꼬리에 달아도 될지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보이는 것을 신경 쓰지 않을 순 없다. 시각적이며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들의 사회에서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 소위 말하는 ‘이미지’라는 것. 이미지는 힘이 있다. 시각적 혹은 비 시각적인 정보를 한 편의 그림으로 압축하여 담아두는 것이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압축된 이미지는 평면적인 하나의 조각이다. 타인을 대할 때 우리는 이미지 조각들의 총합을 통해 상대를 이해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미지 조각들의 총합은 과연 실재하는 타인과 완전히 일치할까. 라캉은 거울 단계를 통해 타인에게 비추어지는 자신의 자아를 자아라고 믿는다고 주장한다. 아이가 거울을 보고 본인을 처음 인지하듯 타인에게 비추어지는..
2인분치 인생 구두 신고 다니던 대장군고무신 신는 이와 만나장화 신고 논에 들어가다 하기 싫은 건 손도 대지 않던 대장군바깥에 나갈 때 허락을 받고 나가다 술과 사람을 좋아하던 대장군매일 밤 숨어 마시게 되다손에 물도 안 묻혔던 대장군여섯 집의 김장과 하루에 열 번 밥상 차리느라물 마를 새 없어지다 너는 결혼하지 말아라학교에 가 내 삶도 네 삶도 공부해라 나는 대장군을 찢었다 뒤꿈치부터 머리털 끝까지 그녀의 피땀을 먹고 자라그녀를 증오했다그보다 더 증오했다가까운 만큼눈물지어지는 만큼 더 증오하고닮을까봐 더 증오했다 혼자 있어도 어깨가 무거웠다털어내기도 하고 도망치기도 하고모른 척한다고 몰라지는 게 아니어서아직도 왼쪽 어깨에 내 인생 1인분오른쪽에 대장군 1인분 한 걸음 내딛기 무섭게발이 푹 푹 몸이 점점..
어떤 미국인의 시 나는 1949년 보스턴에서 태어났습니다이런 사실이 알려지는 걸 결코 바라지 않았지만 사실,성인이 된 후 나는 어린 시절을 카페트 아래 숨겨 두는 데반평생을 써버렸지요확실하게 내 것인 인생만,내 가족사의 운명에서독립한 인생만 남겨 두려고 했지요 가족의 일부가 된다는 건어떤 걸까요? 여러분 상상이 되나요?그들처럼 생긴 얼굴로그들처럼 떠들면서그들처럼 혜택을 누리는 것은부와 권력의 미국인 집안에 태어난 덕분,나는 최고의 학교를 다녔지요온갖 종류의 가정교사와개인 코치가 따라 붙었지요세계 곳곳을 여행했고유명 인사와 논란의 대상,썩 감탄할 일 없는 사람들을 만났지요어린 나이에 나는 깨달았죠이 유명한 보스턴 일족의 집단 운명에서달아날 가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그 길을 선택할 거라고,그렇게 했죠, 197..
혼자 인도로 여행 간다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둘로 나뉜다. ‘여자 혼자서는 위험할텐데’와 같은 우려 또는 ‘여자 혼자 대단하다’와 같은 감탄. 혼자 떠나서 혹은 그곳이 인도라서 더 위험하다 생각해본 적은 없다. 전 세계 어디든 여자가 여행하기에 혹은 살기에 안전한 곳은 별로 없다. 그리하여 나는 인도로 떠났다. 타지마할의 도시로 알려진 아그라. 아그라 기차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칸의 레이더망에 걸려 들었다. 그는 아그라의 툭툭 드라이버다. 10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 타지마할로 가는 길에 그는 내게 일일 투어를 좋은 가격에 제시했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게 귀찮기도 했지만 꽤나 좋은 조건이라 생각해 딜을 체결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의 밥이 되었다. 타지마할에서 두 시간여를 보내고 다시 칸을..
해방감 - “엄마는?” - “포도 전지하러 가셨어요.” - “너도 도와드려야지!” 어렸을 때부터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듣고 또 들으며 자란 말은, “엄마 도와드려야지.”, “엄마한테 효도해야지.”라는 말이다. 어릴 때는 부모님의 일을 도와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특히, 엄마가 우리를 위해 밤낮으로 애쓰시는 것에 대해 감사함뿐만 아니라 ‘미안함’이 상당했다. 야간일 나가시는 엄마를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해 드리고, 엄마가 퇴근 후 새벽에 공장 청소를 나가시면 그 청소도 도우고, 엄마를 생각해서 마을의 어른들에게도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우리를 위해 밤낮없이 고생하시는 엄마를 생각하면 종일 잠을 자거나, 게으름을 피울 때 ‘엄마는 우리를 위해 애쓰시는데…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싶..
캡틴은 우리를 중앙 데이터 시스템 관리국을 안내했다. 그곳에서 캡틴이 알려준 조이를 찾는 방법은 단순하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나와 수의 기억에 있는 조이를 모두 끌어내는 것인데,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적분법을 활용이었다. 조이와 함께 했던 시간과 공간을 축으로 기억들을 적분해 나가면서 조이와 근접한 데이터의 홀로그램 파일을 찾아내는 방식이었다. - 조이가 여기 있다면 당신들의 기억들과 일치하는 홀로그램 파일이 반응하게 될 겁니다. 수와 나는 캡틴이 안내하는 대로 기억 재생 장치를 머리에 쓰고 의자에 앉았다. -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조이를 처음 만났던 때부터 떠오르는 기억들을 불러오면 됩니다. 그 기억들은 점점 더 선명해질 것입니다. 최면을 통해 숨겨져 있던 기억들을 모두 끌어오는 원리와 ..
그냥 그런 줄 알았지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비를 맞으며손바닥으로 걷는 것이 익숙해그냥 그런 줄 알았지 피가 거꾸로 흘러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때눈구멍으로 피를 토하면서그렇게 세상이 검붉게 물들어도그냥 그런 줄 알았지 똥구멍으로 아이를 낳고발가락을 쪽쪽 물리며 아이를 기르고머리카락으로 목을 졸라 죽여도 그래도 되는 줄 알았지그냥 그런 줄 알았지 시인 홍지연이 말합니다. 소리치지 않아도 들릴 때까지 작은 목소리로 얘기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