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공원의 나무들은 햇볕을 받고 한결 싱그러워졌다. 조끼와 모자를 벗고 재킷에 크로스백을 맨 남자는 자주 웃었다. 그는 카페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젊어보였으며 목소리도 한층 밝아져 있었다. 그는 내게 이름을 물었다. 조이스라고 대답하자 남자는 좋은 이름이라며 시를 읊듯 내 이름을 반복해 중얼거렸다. 내가 그를 힐끗 쳐다보자 남자는 수줍은 듯 미소를 지었다. 금세 그의 귀와 볼이 빨개졌다. 남자는 내가 안드로이드이며 조이의 섹스봇이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부러 그를 속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 혹시 음악을 하시나요? - 그냥 혼자 흥얼거리며 노래를 만들어 부르곤 해요. 원두를 사러갈 때마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묻던 남자의 질문에 나는..
지루한 풍광이 늘어진 읍이나 면, 세련된 행정 구역에서 벗어난 도심 변두리, 맛집 같은 유명세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소도시 공간을 선호한다. 젠트리피케이션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길의 사람과 건물, 그것들의 그림자조차 소박하다. 포장하거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채 일상의 간결함만 있는 거리에서 쏟아지는 이야기는 오래 머물러야 읽을 수 있다. 프레임 밖의 흩어진 이야기들을 응축해 내 시선으로 받아들이는 것, 나의 사진 찍기다. 인간의 근육이 써 내려간 굵직한 페인트 글씨에서 ‘노동’의 농밀함을 본다. 팔도 어딘가에 숨어 몸을 부리는 수많은 육체의 흔적들을 떠올린다. 정교한 아크릴 간판과 비교하면 신뢰도가 떨어질 법한 글씨체인데 오히려 건필을 느낀다. 시간의 묵은 때가 주는 안정감과 오래 견딘 것들의..
두 개의 엄지손가락 ▲빨래판으로 만든 최정화 작가의 '늙은 꽃' “술래잡기할 사람 여기여기 모여라” “나도 할 거야. 근데 조이 손가락 말고 다른 손가락 잡을래. 조이 손가락은 무서워.” 엄마들은 뱃속에서 열 달 품던 아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 출산의 고통도 잊은 채 핏덩이 같은 모습을 하곤 우는 아이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아이가 어디 아픈 데는 없나 걱정하기도 하고, 눈코입은 누구를 닮았나 살피기도 하며 정말 콩알만 한 손가락 발가락이 열 개씩 잘 달려있나 세어 보기도 한다. 참 멋지고 설레는 순간이다. 우리 엄마는 나를 낳고서 이 멋지고 설레는 순간을 두려움과 미안함, 걱정으로 마주했다. 내게는 열 개의 발가락과 열 한 개의 손가락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하나가 아닌 두..
행복 엄마가 죽은 뒤나는 다락방에서 엄마가 인형을 갖고 노는 소리를 들었어내 눈에는 모든 게 환히 보였거든공기처럼 거품처럼정말 멋진 일이었어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바닥을 닦고 왁스 칠도 했지 뭐야!반짝반짝 빛이 날 때 한밤에 스케이트를 탔어그곳에 있으면 행복했어주위에는 아무도 없고달빛 아래 스케이트를 타고 있으면나는 문득 기분이 좋아져달님에게 줄 옷을 바느질하기 시작했어처음엔 애벌레에게 입힐 세례복 같은자그마한 것이었지만엄마가 그 옷들을 사 주셨지!날 보고 엄마는 행복해했어, 행복해서우리는 아무 말 하지 않아도별 상관없었어앞서 나갈 생각은 통 못하는늘 시무룩하고 조용한 아이였으니지금 난 행복해 아주 행복해 (이필 譯)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밤을 잊은 애벌레는 고독의 넓이를 지녔습니다. 소녀는 다락방에서..
뜻하지 않은 연이은 한파에 결국 수도가 얼고 말았다. 날이 상당히 추울 때는 수도꼭지에서 한 방울씩 물이 떨어지게 틀어둬야 한다는 것을 엄마도 동생도, 나도 그 누구도 유념해두지 못했다. 한량 같던 아빠는 집 안 구석구석을 손보지는 못했지만, 유지 정도의 관리는 해 오셨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맞는 겨울에 그 빈자리가 더욱 실감 난다. “여보세요? 어머님, 아침부터 죄송해요. 집에 수도가 얼어서… 혹시 설비 잘하는 데 아세요?” 수도가 얼어버린 곳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채 온종일 씨름하고 가신 설비 아저씨를 겪고 결국 친구 어머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아이고, 진작 말하지. 알았어, 지금 아저씨 가시라고 할게.” 실은 친구 아버지도 설비 일을 하신다. 처음부터 도움을 요청할까 싶었지만 어려운 이..
샤워를 마치고 식탁에 앉은 조이는 커피 향을 맡으며 내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조금 처진 눈과 반달로 벌어진 입이 천진한 아이 같았다. 웃으면서 생기는 눈가의 주름은 나이를 느끼게 하기보다는 즐겁고 만족스러운 감정을 분명하게 알게 해주었다. 나는 조이의 표정들을 기억했다가 거울을 보고 연습을 하곤 한다. 하지만 아무리 연습을 해도 비대칭으로 근육을 움직여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는 표정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 신체는 지나치게 정확한 비율로 만들어진 탓이다. 내게 입력된 표정은 56가지이나 된다. 하지만 인간은 50여개의 얼굴 근육으로 만여 가지의 표정을 만든다. 아무리 최첨단의 소재를 사용해 인간의 피부와 근육을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하지만 나는 인간의 복제품일 수밖에 없다. - 오늘 좀 늦을 거야. ..
- 세상에! 우리 선생님들! 어쩜 이리 좋은 벽을 찾아내셨을까? 내가 한 번씩 왔는데도 전혀 몰랐네. 역시 보는 눈이 달라. 생활지원 팀장이 호들갑을 떨며 노인정에 들어왔다. 거친 듯 무심하게 쓰인 현판은 나름 고졸한 맛이 느껴졌는데, 역할에 충실한 것은 물론, 공간에 대한 기대감도 높여주었다. 품성이 소란하지 않은 노인들이 나름의 규칙을 지닌 채 서로에게 의지하며 지내는 곳. 상상 속 노인정은 세련되지 않지만 여유롭고 노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품위 있는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심지어 마당에는 수도시설이 되어 있었는데, 여름에는 찬물에 수박을 시원하게 넣어두고, 겨울에는 김장을 하느라 바쁜 모습이 그려졌다. 이상적인 커뮤니티란 이런 곳에서 탄생하는 것인지도. -계십니까? 조심스레 심 선생이 우리의 존재를..
그때는 미처 몰랐던 것들 동지를 앞두고 마을에서는 대동회가 열렸다. 2018년도의 임기를 지낸 이장님의 수고를 헤아리고 2019년도의 이장과 부녀회장이 선출되는 자리였다. 이장님은 면사무소에서 전달되는 소식들을 마을에 전해주고 처리하고, 이렇게 해마다 열리는 대동회에서 마을 식구들에게 식사도 대접하고,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에 관여하며, 이웃 마을의 이장들과 협업해서 지역사회의 일을 하기도 한다. 살아생전 한량이시던 아빠는 이장씩이나 할 위인은 못 되었지만, 마을에서 젊은 남성에 속했고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어 그것만으로 반장이라는 직책을 얻었다. 어릴 때는 세금 고지서 따위가 면사무소를 통해 이장에게 전해지고 마을의 반장이던 우리 집에 전해졌다. 그럼 저녁을 먹고 아빠와 언니들과 나는 마을을 한 바퀴..
사이렌의 노래 이것은 모두가 배우고 싶어 하는 단 하나의 노래지: 거부할 수 없는 그 노래: 해변으로 떠밀려온 머리들을 본다 해도 남자들을 소함대의 갑판 위에서 바다로 뛰어들게 하는 노래 아무도 알지 못하는 노래 왜냐하면 그걸 들은 사람은 모두 죽었고, 나머지는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야. 비밀을 말해 줄까 그러면, 당신이 내게서 이 새의 옷을 벗겨줄래? 난 여기가 재미있지 않아 그림 같은, 신화 같은 모습으로 섬에 쪼그려 앉아있는 게 이 두 깃털에 미친 자들과 함께, 이 치명적이고 값비싼, 삼중주를 노래하는 게 즐겁지 않아. 내가 당신에게 비밀을 말해줄게. 당신에게, 오직 당신에게만. 가까이 와 봐. 이 노래는 도와달라는 부르짖음이야: 도와줘! 당신만이,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어, 당신은 독특하거든. ..
예년보다 따뜻했던 초겨울 날씨가 이어지다가 대설이 지나자 꽤 추워졌다. 비로소 겨울이 실감 난다. 이제 아침저녁으로 추위에 대비하는 일만 남았다. 날이 추워져서 들판 일은 거의 없다. 그야말로 농한기에 들어선 것이다. 많아진 시간 덕에 요즘에는 조금씩 요리를 한다. 지난주 글에 첨부했던 소고기뭇국이 그 예다. 야간에 일 다니시는 엄마는 아침 8시쯤 귀가하셔서 주무시고 오후 세 시 반쯤 식사 하신다. 엄마에겐 점심도 저녁도 아닌 그 시간에 하는 식사가 아침이기에 되도록 챙겨드리려 애쓴다. 회사에서 자정에 보통사람들의 점심 같은 식사를 하시는데 엄마는 밖에서 잘 먹는다며 집에서는 매번 대충 챙겨 드신다. 건강한 음식을 먹는 것은 약간의 당뇨와 혈압이 있는 엄마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고, 딸의 입장에서도 엄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