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자투리땅의 풀을 보면 그 마을 사람들의 연배를 가늠할 수 있다. 어릴 적에는 집집마다 마당에 정원도 제법 가꾸고, 누구나 논둑이나 밭둑에도 콩을 심었으며, 길가에 많은 꽃도 심어져 있었고, 마을 귀퉁이마다 은행나무나 앵두나무, 살구나무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석류나무부터 해서 이름 모를 꽃들로 정원을 가득 채우셨던 이웃집 할머니 할아버지는 십여 년 전에 떠나셨고, 늘 기운차 보였던 옆집 할머니도 허물어지는 정원의 울타리에 그저 작대기를 세워둘 뿐 재정비하기 어려우실 정도로 늙으셨다. 함께 뛰놀던 또래들도 다들 이 마을을 떠났다. 우리 집만 해도 세 딸 모두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이 마을을 나서게 되었다. 젊은이들은 도시로 나가고 이곳에 삶의 터전을 이룩한 분들만 남아 가까스로 마을을 유지하고 있다..
너는 내 운명 너는 말했어 나만이 너를 채울 수 있다고 나는 부드러운 살점을 내줬지 너는 말했어 나만이 너를 위로할 수 있다고 나는 선홍빛 심장을 내줬어 내 눈에 빠지고 싶다고 말해서 두 눈알을 파내 네 손에 쥐어줬어 내 귀에 속삭이는 캔디 같은 사랑해 마음에 밀랍을 부었어 너를 위해서만 내 모든 것을 쓰게 한 너는 내 운명 헤어지자 한 마디에 하얗게 얼어버린 연탄덩이 내 머리통에 갈긴 너 사랑하지 않아 한 마디에 국가대표급 이단옆차기로 나를 날려버린 너 시선을 돌릴 때마다 내 머리카락 뜯고 잘라버린 너 다른 운명을 향해 나아갈 때마다 찢기고 멍들었던 내 몸의 주인인 너는 내 운명, 너는 내 운명? 한 세기를 지나니 산더미처럼 쌓인 엿 같은 운명들 엿가락처럼 늘여 엿가위로 뚝뚝 끊어 먹고 핥아 먹고 다 ..
벌써 입동이다. 다가오는 겨울을 맞이할 준비와 끝자락인 가을을 보내느라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가을걷이를 마치면 좀 한가할 줄 알았는데 큰 착각이었다. 일단은 김장 준비를 위해 여름 내 공들여 말린 고추를 가루로 빻았다. 고추를 이백 주 심었는데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갔다. 따서 옮기고, 통째로 며칠 말리고, 닦아 가위로 자르고, 햇볕에 말리되 타지 않도록 지나친 직사광선은 피해줘야 하고, 밤낮으로 비와 이슬을 살피며 거둬들이고 또다시 널기를 고추가 바싹 마를 때까지 반복하여야 한다. 가뭄으로 고추 농사가 어려웠기에 올해는 평년보다 고추 값이 좋았다. 본격적인 수확에 들어가기 전에는 호기롭게 내년에는 오백 주 심자고 엄마에게 제안했는데, 고추 손질을 한차례 마친 뒤에는 삼백 주 이상은 꿈도 꾸지 말자고..
패터슨 씨, 차라투스트라 씨라도 만났나요? 그의 말! 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랑하노라.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로운 심장을 지니고 있는 자를.” (1부 ‘머리말’ 中)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춤추는 별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1부 ‘머리말’ 中) “춤 한 번 추지 않은 날은 아예 잃어버린 날로 치자! 그리고 큰 웃음 하나 함께하지 않는 진리는 모두 거짓으로 간주하자!” (3부 ‘낡은 서판들과 새로운 서판들에 대하여’ 中) 발화욕이 왕성한 차라투스트라는 그 외에도 셀 수 없이 무수히 많은 주옥같은 명언들을 쏟아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덮는 순간, 정작 차라투스트라가 뭐랬다는 건지…. 그래도 그 많은 말 중..
살기 나는 내가 여자인 줄 몰랐다착하게 자라야 한다고 해서착한 척하는 아이에서 더 못 자랐을 뿐 여자가 나대면 안 돼적당히 해여잔 남자를 잘 만나야지너는 비정상이야 아무 것에도 화낼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산 적이 없어서 몰랐지몇 인간만이 아니라세상이 온통원래 그렇다고? 다 그렇게 산다고? 일반화 하지 마불편해서 어떻게 살아예민해서 일상생활 가능해? 뭐가 이렇지?온통 잿더미 속의 나재를 먹고도살아남으려면 싸워야겠다 나까지 그렇게 살라고?치렁치렁 인형 옷을 찢어버릴래긴 머리털을 다 뽑아버릴래매끈한 다리를 꺾어버릴래 나는 살기가 필요해나는 내 살기를 원해 시인 '채은'은 외자 이름 아닙니다. 내 언어를 갖고 싶어 시를 썼습니다. 인생 목표는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 현재는 천방지축 삽니다. 인류애를..
올빼미의 노래 나는 살해된 여자의 심장이다 집으로 가는 중에 길을 잘못 든 여자 공터에서 교살되고 매장되지도 못한 여자 나무 아래에서 겨냥된 총에 맞은 여자 날선 칼에 의해 난자당한 여자 수많은 우리가 있다 나는 깃털을 길렀고 그녀를 찢고 나왔다 나는 깃털 덮인 심장처럼 생겼다 나의 입은 끌이다, 나의 손 손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들 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며 숲속에 앉아 있다 단조로운 이야기: 죽음으로 향하는 많은 길이 있지만 죽음의 노래는 하나만 있지 안개의 색: 그것은 왜왜(Why Why)라고 말한다 나는 복수를 원하지 않고, 나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오직 누군가에게 묻기를 원한다 어떻게 내가 실종됐는지, 어떻게 내가 실종됐는지 나는 살인자의 잃어버린 심장이다 아직 죽이지 않은 살인자 자신이 죽이..
종교의 영향이 큰데 ‘사랑’에 대해 많이 고민한다. 지난 번 글에서 엄마처럼 나도 나의 애정이 향하는 곳을 찾아야겠다고 했는데 슬프게도 어쩌면 그동안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인생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나 자신을 사랑하기’, 요즘 이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실천하려 애쓴다. 누군가 ‘종교란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멋진 말을 들려준 적이 있다. 인생의 한 치 앞도 알기 어려운 인간이 신을 알아가고 이해한다는 것은 꽤나 경솔하니, 종교를 통해 그저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이해해 간다면 그것으로 종교의 역할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참 솔직하고 겸손한 태도가 맘에 든다.(집 앞의 단풍) 편안함, 만족함, 뿌듯함, 기쁨, 희열, 성취..
김해 공항에 오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서울-부산 장거리로 사 개월 정도를 만났는데 그런 연애는 또 없을 예정이다. 그날은 내가 부산으로 데이트를 하러 간 날이었다. 기차역으로 마중 나온 그는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며 김해 공항 근처로 날 데려갔다. 억새가 듬성듬성한 허허벌판이었는데 착륙하는 여객기가 머리 위로 지나다녔다. 어둑어둑한 들판 위로 비행기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는 나의 어깨를 감싸 안으면 저기 비행기가 온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속으로 '그래 비행기가 오네' 했지만 들뜬 시늉을 했다. 예상한 대로 비행기는 불나방처럼 날아들어 활주로를 향해 부지불식간 지나갔다. 굉음과 함께 몸체가 손에 닿을 듯 하강하는 모습을 그토록 가까이 볼 기회는 다시없으리라. 놀랍게도 감흥이 일지 않았지만 그저 그런..
여성의 몸은 누구의 것인가 다시, 실비아 플라스예요. 번역 시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작품들은 시적 구성과 비유, 사유의 흐름이 워낙 단단해서 여러 번 들여다봐도 매료되지 않을 수 없죠. 여성 억압에 대해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한, 후기 시의 경우가 특히 그렇고요. 이번에 소개할 시는 라는 짧은 작품이에요. 은유 나는 아홉 음절로 된 수수께끼입니다.코끼리, 육중한 집,두 넝쿨손 위에 한가로이 매달린 멜론.오 붉은 과일, 코끼리 상아, 질 좋은 목재!발효되느라 크게 부풀어 오른 이 빵 덩어리.이 두둑한 지갑에 담긴 새로 주조된 돈.나는 수단이고, 무대며, 새끼를 밴 암소입니다.내릴 수 없는 기차에 올라탄 채,나는 풋사과 한 자루를 다 먹어치웠습니다.(1959년 3월 20일) - 출처: 『실비아 플라스..
3초의 선율에 핀 모과 향기 그 아이는 엄마의 먼 친척 조카였다. 어느 날 그 친척 식구들이 자가용을 타고 우리 집에 왔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자동차를 가진 사람이 드물었다. 자동차를 자가용이라고 불렀고 자가용을 가진 사람은 무조건 부자라고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서울 변두리 동네 골목길에 세워진 자가용을 동네 아이들이 둘러쌌다. 아이들이 탄성을 지르며 내게 말을 걸었지만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함께 땅바닥에서 소꿉놀이나 사방치기를 하던 아이들의 꾀죄죄한 얼굴들이 부끄러웠고 부자 친척을 둔 내가 동네 아이들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아 화가 났다. 그 아이는 나를 가끔 힐끗거리며 동생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자가용이 있는 골목을 등지고 집으로 서둘러 들어가 버렸다. 그 아이는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