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강아지 데리고 타면 안 돼. 못 타, 못 타.” 버스 기사 아저씨는 손을 휘휘 젓는다. 순간 이동장 안에 있는 만지가 너무 불쌍해진다. 아니, 만지를 불쌍하게 만드는 건 나였다. 기사 아저씨 앞에서 한 마디도 못하고 버스에서 내리는 내가 만지를 불쌍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만지의 존재가 부끄러운 것도 아닌데, 나는 이런 순간마다 이상하게 작아진다. 한번은 만지와 산책을 하다가 이런 일도 있었다. 만지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쁜 외형을 지니지 않았다. 새까맣고 다소 푸석한 털에 긴 허리, 투박하게 짧은 다리를 가지고 있고 주둥이는 얼굴에 비해 지나치게 두껍고 길다. 귀는 예쁘게 접히거나 서 있지 않고 반쯤만 어색하게 접혀 있다. 그런 만지를 보고 지나가던 아이들이, “못생긴 개다, 못생긴 개야. 저..
필리핀 북부에 살고 있는 일롱고트(Ilongot) 부족에게는 ‘머리 사냥(head hunting)’이라는 문화가 있다. 말 그대로 다른 부족 사람의 머리를 사냥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가족 중 누군가가 죽으면, 그 사람을 죽인 자를 찾아가 목을 베고, 마을 어귀에 매다는 것이다. 사람의 머리를 잘라 전시한다는 무시무시한 행위는 ‘야만인’들에 대한 서양인들의 판타지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인류학자들은 일롱고트인이 머리 사냥을 하는 이유를 제각각 생각해 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밀림에 사는 작은 부족들이 전쟁을 감당할 수 없어서라고 했다. 전쟁이 나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기 때문에 상징적인 복수를 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편이 경제적으로 낫다는 것이다. 죽음을 죽음으로 교환하는, 일종의 교환 경제가 작동하는 것이..
평화는 누군가 참는 사람이 있는 표면적인 상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생물학적 여성성별이기에 워낙 타고나길 화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화를 자유롭게 분출시킬 수 있는 신분(네.. 저는 미천한 신분...)은 아닌지라 정말 화를 참을 수 없을 때는 주로 키보드 워리어로 활동하는 게 고작인 정도. 성차별주의자들의 활자로 된 배설물들을 견딜 수 없을 때면 심호흡을 하며 비추나 신고를 먹이면서 멘탈을 관리하는 게 고작인데, 얼마 전에 그 임계점을 넘어버리는 일이 있었다. 누군가와 싸우는 것 자체가 체질적으로 힘들어서 좋게 넘어가려 하는 편인데 그날따라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원인은 유튜브 댓글창에 좌표를 찍고 달려..
날씨는 더워졌고, 나는 가난해지고 있었다. 직장이 구해지지 않아서 일하지 못했던 여름은 겪어본 적 있었지만, 나의 의지로 일하지 않는 여름은 처음이었다. 2020년 연말에, 2021년의 목표를 ‘직장 구하지 않기’로 잡았었다. 글을 쓰고, 창작을 하고, 나의 양에 알맞은 정도만 일을 하는 삶을 시작하고 싶어서였다. 12월에 다니던 직장의 계약이 만료되고 실업 급여를 받으며 2021년의 상반기를 버텼다. 실업 급여 수급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달이었던 7월이 되었고, 잔고와 모아놓은 돈을 보며 일주일 넘게 우울해하기도 했다. 운명에 대해 고민했다. 올해는 온라인 신점을 두 번이나 봤고, 오프라인 타로도 보고 타로 어플도 계속 들락날락했다. 누군가 미래를 점지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직장을 다니지 않고 창작..
열렬한 노래 애정이 담긴 기타 연주, 정열적인 노래는 관능과 우수, 힘에 눈물을 흘립니다, 햇볕에 나무껍질과 잎사귀가 그을린 나무 아래에서, 낮고 뜨거워진 집 담벼락 앞에서. 줄기 위의 꽃들이 살랑거리듯 욕망은 넘실넘실 바람에 몸을 흔들고, 한탄하고 몽상에 잠겨 오던 영혼은 희망과 기대, 아찔함에 죽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아, 온화하고 청명한 창공이 어찌나 황홀한지! 나의 사랑, 숨을 골라요, 훗훗한 돌풍 속에서 경쾌한 매미 울음소리를 이끌어내는 음악 속에서, 공기 중에 흩어지는 꽃가루처럼 흐르는 노래 속에서. 원문 링크 https://www.poesie-francaise.fr/anna-de-noailles/poeme-la-chaude-chanson.php 다은 여름이 견디기 어렵게 더워졌다. 덥다고 느..
전 애인과 헤어진 지 한참이 지났는데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다. 엄마가 느닷없이 그의 이름을 꺼낸 것이다. 내가 커밍아웃을 하기 전부터 엄마는 그가 내게 너무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모른 척해왔으나, 무언가 못마땅했던 것 같다. 못마땅함의 정체가 추접스러운 호모포비아일 것이 걱정되었던 나는 딱히 왜인지 묻지 않았었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그와 헤어지고도 몇 개월이나 지난 시점에 갑자기 그 이름이 등장한 것이다. 이름 다음에 듣게 된 이야기는 당혹보다도 더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전 애인은 내가 동생을 자살로 잃은 직후부터 나를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었다. 내가 자취방을 청산하지 않고 가족들이 함께 사는 집으로부터 도망쳐 쉴 수 있도록 지탱해 주었고, 고통에 질려 팽팽하게 당겨진 내..
얼마 전 인터넷에서 이런 기사를 봤다. 하늘에 무지개가 예쁘게 떠 있었고, 평소와 달리 버스 안에서 들려오는 카메라 셔터음이 많은 걸 눈치 채고 버스 기사님이 잠시 버스를 세웠다고 한다. 승객들은 무지개를 감상하거나 사진으로 남기기도 하며, 찰나였지만 모두가 마음에 여유를 가지는 시간을 가졌다는 기사였다. 기사를 읽자 내 딱딱한 마음이 말랑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기뻤다. 내가 하늘을 보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고 그래야한다고까지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현재 일하고 있는 직장은 역 근처에 위치한 높은 빌딩 중 하나로 한 면이 유리로 되어있다. 그래서 해가 지는 것도 매일 구름의 모양이 다른 것도 비가 올 때의 하늘이 어떤지도 관찰할 수가 있는데, 문제는 그걸 볼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일에 ..
서점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파란색과 보라색, 빨간색이 뒤섞인 표지가 너무 예뻐서 골랐는데, 읽다 보니 이 책의 일부를 소개하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쓴다. 다음은 ‘말하지 못하는 것과 말해야만 하는 것의 경계에서’라는 책의 일부다. 이 책의 저자는 평범한 삶을 살아오다 이 책을 써내고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나의 삶도 바뀔 수 있을까. - 조금씩 그녀들을 따라 하는 나를 발견한다. 흉내 내는 삶. 내가 흉내 내는 것은 그녀들의 삶이었다. 다이어트에 관심을 가지려 하고 연애를 하려고 하고……. 언젠간 결혼을 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 언젠간 누군가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나는 그들을 흉내 낼 수밖에 없는가. 왜 나는 누군가를 계속해서 흉내 내며 살아야 하는가. 어쩌면 ..
비행체가 퇴각하자마자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나의, 그리고 우리 마법소녀들의 능력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를 필요로 했다. 엉망이 된 도시, 절망한 사람들. 우리의 희망으로서의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첫 프로그램은 토크쇼였다. 얇은 반투명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고 하는 토크쇼. 무려 126명의 마법소녀들이 모두 한데 모였다. 나는 그 얼굴들을 이렇게 자세히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가장 맨 앞에는 하늘을 나는 걔, 가 앉았다. 걔는 끊임없이 생글생글 웃었고 토크쇼 중간의 장기자랑에는 섹시댄스까지 췄다. 아이돌이 꿈이었다고. 나는 한 번도 이런 옷을 입고 사람들을 구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대부분 검정색이나 회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프릴이 가득한 블라우스나 치마를 입으면 무너지는 벽..
약간의 청록 빛이 도는 엑스레이를 봤다. 의사 선생은 예전에 다친 발목이 컨디션이 좋지 않아 다시 아프기 시작한 거라며 말을 했다. 몇 번의 치료를 받아야 하고, 언제 다시 와야 하고 뭐라 뭐라 말을 이어 나갔지만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내 뼈에 비해 두툼한 살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왜 뼈와 살은 비례 관계가 아닌가. 살이 찌는 만큼 뼈도 단단해지면, 인간은 조금 더 나은 생명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음식이 주는 충만한 기쁨을 스무 살 때 처음 느꼈다. 잠시 모든 신경을 멈추게 할 만큼 극강의 당도로부터 행복감을 느꼈다. 뇌가 얼얼할 정도로 단 음식들은 가장 쉽게, 가장 단순하게, 가장 빠르게, 가장 싸게, 그리고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지금 당장의 내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었다.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