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식


    애인을 만난 지 반년쯤 지났을 때였다. 애인과 나의 양친이 만났다. 더 정확하게는 만나게 해줬다. ‘미혼’인 내가 창피해 동창회도 못 나간다는 부친과 부친의 등쌀에 못살겠다는 모친에게 애인을 희생 제물로 바쳤다. 나는 일상의 무료함을 깨는 이벤트를 부모에게 선사한다는 사실에 고무되었고, 여러 관전 포인트를 눈앞에 두고 한껏 들떴다.


   노년의 커플은 어느 횟집 룸에 들어가 앉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친은 이마에 ‘나근엄’이라고 써 붙이고 상당한 인상을 때려 쓰고 있었다. 하도 어이가 없어 “우리 아빠는 근엄 병에 걸렸어요” 라고 하자 그제야 팔짱을 낀 채 피식 웃었다. (본인이 생각해도 웃긴 모양) 초면에 ‘말 놔도 돼제?’ 식의 반말이 튀어나올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부친은 꽤나 깍듯하게 예의를 차렸다. 애인을 ‘○○ 군’이라 불러 드라마 속 장면들이 꼭 꾸며낸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모친의 얼굴 근육도 상당히 얼어 있어 표정 어딘가가 어색했다. 그럼에도 평소 디테일에 강하고 솔직함이 무기라 자부하는 모친은 굳이 안 해도 될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분위기를 당혹스럽게 했다. 가히 그 솔직함은 무기였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부친은 팔짱을 꼈다 풀었다를 반복했다. 대화의 공통 주제를 찾다 술 이야기가 나오자 우린 대화합을 이루었는데, 그 와중에 부친은 딸이 아무리 술을 잘 마신 대도 딸 하고 마시는 술과 남자끼리 마시는 술은 엄연히 다르다며 남자 부심을 시전해 깊은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다 어찌 손을 써 볼 새도 없이 부친의 입에서 ‘결혼’이라는 단어가 출력됐다. 동시에 “아빠!” 하고 소릴 질렀다. 기획에 가까운 고함이었다. 분명 결혼이라는 화두가 첫 대면 자리에 등장할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애인은 조근 조근 상냥한 어투로 차분하게 현세대와 구세대의 ‘문화’와 결혼 관념에 관한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부친의 미간은 약간 구겨져 있었지만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듯했고, 모친은 미심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애인이 딱히 부모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퍽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전달한 거 같아 흡족했다.


    며칠 뒤 부친은 모친에게 심하게 성을 내며 “나도 이제 모르겠다! 결혼을 하든지 말든지 동거를 하든지 말든지!”라며 입밖에 꺼낸 적도 없는 ‘동거’라는 화두를 던졌다. 그 정도 성과까진 기대하지 않았는데 만남은 가히 성공적이었다.


    그로부터 일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애인과 나는 보다 안전한 섹스를 위해 정관 수술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한편 양친 세대에게 ‘과년’한 딸을 시집보내지 ‘못하고’ 남들에게 자랑할 손주가 없는 상태는 일종의 행복 경쟁에서 낙오하게 하는 요건이라, 결과적으로 나는 그들의 불행에 크게 일조하고 있다. 나날이 심해지는 내 죄의식은 급기야 명절에 본가에 가서 반려동물과 나의 관계를 부모 자식 간이 아닌 남매로 설정하는데 이르렀다. 행여나 고양이를 손주 삼았다는 신세 한탄을 방지하기 위해서. 가상하다는 말은 이런 데 쓰는 말이었나 보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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