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1 우울한 삶(2)
- 암삵의 삶: 위단비(연재 종료)
- 2019. 8. 2. 11:02
삵은 야생동물임에도 사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 여기며 스스로를 저주했다.
사람이 사람을 ‘사용’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는 이들은 공사를 막론하고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다. 쓸모가 있을 땐 취하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린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쓰이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 텐데 우리는 어릴 때부터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길 강요당하고 산다. 쓸모 있는 존재. ‘사용’하기 좋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강요라는 생각이 들기도 어려울 정도로 이 사회의 당연한 규칙. 규칙에 따라 우리는 나름의 쓸모가 있는 존재가 되어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구성원은 서로를 사용하며 이 사회를 굴려 나간다.
그렇기에 이 사회에서 쓸모란 존재와 같은 무게를 지닌다. 쓸모로 굴러가는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는 존재가 지워지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그렇다면 나는 나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 자신을 개조 혹은 개발해야만 내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는 걸까. 나의 쓸모없는 부분들은 지워내야 하는 걸까. 사람은 서로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걸까.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서로에게 쓸모 이외의 의미가 되려면 어떤 관계여야 되는 걸까. 쓸모란 무엇일까. 나도 나를 사용해야 하는 걸까. 나는 내 존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너와 나의 존재의 무게가 같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서로의 쓸모를 사용하기 위해 우린 언어를 발명했다. 언어로써 서로의 필요를 확인하고 충족한다. 인간의 언어만이 가지는 특징은 추상을 구체화 시킨다는 것에 있다. 사랑, 미움, 정의, 선, 악과 같은 것을 기호로 구체화 시킨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추상적인 부분까지 인간 사회를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예컨데 ‘악’이라는 개념의 발명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먹이사슬의 아래에서 꼭대기로 올라가기 위해 인간에게 ‘악’이라는 개념은 꼭 필요했을 거라고. 포식자들을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악을 없애야 한다는 명분을 세우고 집단의 결집과 힘에 대한 욕망을 키워갔을 거라고. ‘악’이라는 개념은 힘의 욕망을 가진 인간에게 정말 쓸모있는 개념이고, 반대로 그 개념은 인간의 욕망을 분출해내는 출구가 되어 주기도 한다. 이제 자연의 먹이사슬이 의미 없어진 인간의 사회에서 ‘악’의 개념은 여전히 집단의 결집을 위한 유용한 도구로써 사용되고 있다. 종교에서, 정치에서, 일상생활에서.
살인이나 선행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일상적인 행동이나 속성들이 선과 악으로 구분되어 이 사회를 위해 사용되고 있다.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않은 것. 정답과 오답. 구분이 많이 흐려지고 기준이 뒤바뀌고는 있지만, 여전히 세상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지양하고 있다. 이 사회에서 ‘악’으로 취급되는 속성들이 내게도 있다. ‘나태함’과 같은 것들. 그럼 나는 나의 나태함을 지워내야 할까. 한때는 나태함을 이겨내지 못하는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자책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나태함은 속성이 아니라 상태라는 것을. ‘나태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행동, 성격 따위가 느리고 게으르다.’는 뜻이다. ‘게으르다’의 사전적 의미는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성미나 버릇이 있다.’는 뜻이다. 사전에는 나태함이 성격이나 성미와 같은 속성에 대한 것으로 설명되어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남들 다 겪는 입시 준비를 포함하여 무엇 하나 살면서 노력해 보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나도 부지런히 노력했던 것들이 있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 나에 대해 생각하는 일, 인생의 고비를 넘겨내려 애썼던 시간, 인체모델이 되고자 노력했던 것들. 이 중 사전적 의미에서 ‘나태하지 않다’는 말에 들어맞는 건 인체모델이 되고자 노력했던 것, 단 하나다. 사전적 의미에서의 나태함은 움직이는 것, 일하는 것과 연관 있기 때문이다. 그때만큼 열심히 움직였던 적이 내 평생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걸 부지런히 노력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내게 필요한 걸 채우기 위해 안달이 난 상태였을 뿐이었다. 그럼 나태하다는 말은 ‘내게 필요한 걸 채우기 위해 안달 나지 않은 상태’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물건과 생명의 가장 큰 차이점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에 있다. 인간의 상태를 상태로 보지 않고 속성으로 고정하는 것은 한 편으로는 인간을 물건으로 보는 것과 같다. 나의 상태를 상태로 알아주지 않고 고정된 속성으로 본다는 것은 나 자신을 물화시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건 지난 편에서 이야기했듯 폭력이다. 타인을 볼 때도, 나를 볼 때도. 그러나 우리 모두 타자 혹은 자신을 그렇게 물화시키는 데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다. 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혹은 불신은 사람을 치우거나 혹은 사용하게 만든다. 나의 나태함을 치워버리고, 나의 노력을 사용하는 것. 나의 약점을 치워버리고, 나의 강점을 사용하는 것. 혹은 나를 치워버리거나 나를 사용하는 것.
나는 그런 세상이 너무 무섭다. 더 무서운 것은 나 혼자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여전히 나를 사용하려 든다. 성적 도구로, 사회의 부품으로, 사회적 욕망의 도구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로. 이 사실이 나를 끔찍하게 우울하게 만든다.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은 나 또한 이 세상에 속한 ‘인간’이라는 점이다. 나도 나를 자꾸 사용하려 든다. 나의 면면들을 깎아내려 하고 나의 면면을 부각하려 한다. 결국은 존재 자체에 회의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한번 되새겨야겠다. ‘나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상태가 변화하는 존재다.’ 나는 나를 사용하려 들 때도 있지만 그것 또한 나의 어떤 ‘상태’일 뿐이다. 나는 분명 나로서 존재했던 순간들이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담배를 피울 때, 맛있는 음식을 직접 해 먹을 때 등등. 이제 나를 그만 사용하고 전원을 꺼 버리고 싶을 때 꼭 잊지 말아야 할 순간들.
사용은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 나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목적성이 없는 것을 뜻한다. 타인이 나를 보는 건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나라도 목적이나 결과가 아닌 존재가 만들어지는 과정으로서 나를 바라볼 때,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나는 몇 번이나 목적성을 가지고 나를 대했다. 이 글을 잘 써 내려가고 싶은 욕망에 몇 번이나 멈춰선 채 우울해했다. 이게 나의 결과물이라면 정말 볼품없다는 생각에.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과정에 있는 것이다. 일단 쓰고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계속 수정해나가면 된다. 수정에 대한 가능성을 생각하고 이 또한 과정이라고 쓰고 나니 다시 미간의 주름이 펴졌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나는 나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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