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블루베리 아저씨
- 예민한 알바생: 조이(연재 종료)
- 2019. 11. 21. 16:23
장마 비가 연일 지속되던 여름날에 블루베리 아저씨는 “파전 먹고 싶지 않냐?” 하셨다. 아무래도 본인이 먹고 싶은 눈치였다. 그가 틈틈이 가꾼 텃밭에서 부추를 베고, 옆집 호박을 서리해다가 부쳐 온 부침개는 따뜻해서, 함께 먹어서, 비가 와서 더 맛있었다. 그가 직접 만들었다는 간장 소스가 새콤달콤 짭조름한 게 얼마나 감칠맛이 나던지. 그 비결이 무언지 그는 끝내 알려주지 않았지만 사실 나도 별로 궁금하지가 않아 아쉽지가 않았다.
지난여름 내내 나는 그와 자주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새로 개통된 IC 이야기, 시에서 주관하여 마을 안쪽에 분양되고 있는 큰 부지의 산업단지 이야기, 도로 확장 이야기, 상속 절차와 토지 가처분 이야기, 법무사와 개발업자에 대한 이야기, 마당 보수 이야기, 전기 설비 이야기, 사장의 전 여친과 현 여친 그리고 본처에 대한 이야기, 아저씨 강원도 별장 이야기 등 각자의 관심사나 개발이 진행 중인 동네의 이야기, 우리의 유일한 교차점이 되는 사장의 이야기, 아저씨의 무용담(왼쪽 팔꿈치가 펴지지 않는 이유, 사모님과의 러브 스토리, 세 딸의 파란만장한 성장기, 강원도에서 배를 너무 쉽께 뚝딱 고쳐주어 사람들이 고마워하질 않았다는 이야기 등)이 주된 화제였다. 그는 대화가 끝나갈 때쯤이면 사람을 믿지 말라고, 그 어떤 사람도 믿지 말라고 거듭 강조하여 이야기하곤 했다.
근래 만나는 친구들 대부분은 젊은 여성이었는데 그들과 하는 이야기는 페미니즘, 도서, 여행, 자립, 노후, 부모와의 갈등, 회사 이야기 정도여서 블루베리 아저씨와 꽤 색다른 소재로 나누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몹시 자극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27살의 여성 청년이 회사에 다니거나 적극적으로 취업을 준비하지 않고 이렇게 본가에 내려와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고 있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나의 커리어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 전문 분야에서 기량을 키워야 할 텐데 하던 공부를 계속해야 할까, 농사지으면서 사는 게 내가 원하는 삶인가, 이렇게 일 년, 이 년… 평생 이러고 살면 어떻게 하나… 정답이 없는 물음들로 불안을 벗 삼아 잠 설치는 밤이 많았던 까닭이다. 그와 나누는 이야기의 화두는 지금 이 시기에, 이 시골에 있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것들이라는 생각에 묘한 위로도 얻고 배움에 대한 욕구도 사뭇 충족되었다.
요즘 나는 그와 대화의 자리를 갖지 ‘못’하고, 갖지도 ‘않’는다.
5월 말 경,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던 계절에 그의 아내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시내’에서, 그와 ‘함께’ 있던 순간에 쓰러진 것이라 빠르게 구급차에 탈 수 있었고, 병원으로도 빨리 갈 수 있었다. 수술 후 인맥을 동원한 덕에 역시 오래지 않아 대학병원의 중환자실로 옮길 수 있었고, 그는 지금까지도 매일같이 병문안을 간다. 병문안을 매일 가야 간호사들이 환자를 좀더 주의하여 관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병원을 가지 않는다고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니 가는 쪽을 택한 모양이다. 3개월 정도가 지나자 그 병원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고, 또 다른 지인이 있는 좀 더 멀리 있는 다른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가 매일 정해진 병문안 시간에 맞춰 일상을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는 전처럼 여유로이 앉아 수다를 떨기가 어려워졌다.
하루하루 삶과 죽음의 사투를 벌이는 사람을 가족으로 둔 그의 모습은 하루하루가 달랐다. 어느 의사는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고, 어느 의사는 잔인할 만큼 단호하게 가망 없으니 포기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어느 소견을 가진 의사를 만나고 왔는지에 따라, 그녀가 어떻게 미세하게 반응하고 안 하는지에 따라 매일의 낯빛이 달랐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분위기가 묘하게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약간의 활기가 느껴졌달까. 이 활기는 아내의 회복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저 평소보다 더 검게 염색을 하고, 친구를 따라 얼떨결에 했다는 눈썹 문신 때문에 달라 보이는 거겠지, 하고 넘겼다. 얼마 뒤 마침내 알게 된 그 활기의 까닭은 그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쓰러진 아내를 매일같이 찾아가면서, 그녀가 깨어나길 간절히 바라면서, 병상에 누워 있으나 아직 살아있는 아내를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그의 아내도 아니면서 그 사람에게 배신감과 괘씸함, 약간의 안쓰러움과 그럼에도 께름칙함을 함께 느꼈다.
뭇 아저씨들과 어딘가 좀 달라 보였고 그래서 다르길 바랐는데. 하긴, 그는 무용담을 늘어놓다가 살고 있는 아파트와 다른 땅과 건물 모두 와이프 명의라 했는데, 그는 머쓱해하며 몇 해 전에 바람을 피우다 걸렸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때 나는 웃으며 사모님이 마음이 넓으시네요, 나 같았음 재산 다 뺏고 이혼한다, 내게 그런 말을 뭐 하러 하냐, 했었는데 그때 그에 대한 기대를 접었어야 했던 걸까. 말하기를 좋아하는 그가 그때 받은 무안 때문인지 다른 알바생에게는 자랑하듯 여자친구 생긴 걸 말한 데 반해 내 앞에서는 입도 뻥끗 안 했다.
나는 그의 행동에 불쾌함을 느끼는 한편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가 되기도 하고 그럼에도 그가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다가 이내 그의 가족도 아니고 절친한 친구 사이도 아닌 내가 불쾌할 자격이 있는지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아직 결론 내리지 못한 이 고민은 그가 카페에 놀러 오는 시간이 줄어듦에 따라, 그와 마주치는 일이 없음에 따라 옅어지고 있다. 다만 그가 늘 입버릇처럼 말했던, 사람을 믿지 말라는 이야기가 떠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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