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난생처음 투블럭
- 예민한 알바생: 조이(연재 종료)
- 2020. 2. 6. 11:14
미용실
투블럭으로 잘라달라는 나의 요청에 미용사가 조심스럽게 되물어 왔다.
“실연 당한 거는… 아니죠?”
“아니에요, 더워서 짧게 자르려고요. 버킷리스트이기도 했고요.”
겸연쩍게 웃어넘기며 대답했지만 사실 어떠한 결정적인 이유를 갖고 투블럭을 결정한 건 아니다. 그저 무더운 여름 더위에 긴 시간 머리 말리는 게 곤욕으로 느껴진 게 투블럭 유혹의 시작이랄까.
‘짧게 자른 헤어스타일이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머리카락이야 또 자라니 뭐. 그런데 긴 머리는 댕강 묶으면 그만이지만 짧은 머리는 손질이 힘들 텐데. 밤에 감고 잤다가 아침에 뻗치면? 흠, 머리는 밤에 감는 게 좋다는데. 게다가 매달 미용실 가서 정리하려면 긴 머리보다 돈도 더 들고. 무엇보다 투블럭이 안 어울리면 어떡하지? 되돌릴 수도 없고. 하,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가 뭐가 중요해? 내가 더워 죽겠는데! 그리고 그런 미의 기준은 누가 정했고, 그게 과연 정당한가? 으아아 몰라, 투블럭 안 하면 할 때까지 이 고민을 계속할 거 같아. 그냥 자르자.’
생각의 생각을 무는 고민이 버거워서 투블럭을 했다. 나 자신이 투블럭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지만, 반대로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컸다. ‘탈코르셋’하면 떠오르는 쌩얼에 숏컷. 그 숏컷을 하면 삶이 얼마나 편해질지 궁금했고 또 한편으로는 극단의 페미니스트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페미니스트를 향한 백래쉬가 알게 모르게 내 안에 어떠한 두려움으로 자리 잡아 있던 것이다.
아르바이트 출근
머리를 짧게 자르고 출근했다. 민우회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장과 면담을 하게 된 게임회사 노동자, 화장하고 면접을 봐서 합격한 후 쌩얼에 안경을 끼고 출근했다가 잘린 알바생의 이야기. 나도 그들처럼 되는 건 아닐까, 짧아진 나의 머리를 본 사장이 이러면 곤란하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과 긴장감을 안고 출근했다.
“조 스텝, 머리 잘 어울리네!”
다행스럽게도 사장의 반응은 굉장히 긍정적이었다. 단골손님들은 짧아진 내 머리를 보고 세 종류의 반응을 보였다. 잘 어울린다고 하거나, 별 반응이 없거나, 왜 잘랐냐며 면박을 주거나 아쉬워했다. 특히 외국인 손님들은 남자처럼 짧게 머리를 자른 이유를 ‘정말’ 궁금해했다.
“누나, 머리 왜 잘랐어?”
“그냥, 짧게 잘라보고 싶었어.”
“그렇게 하지 마.”
그들의 관념에 사는 여성은 긴 머리와 색조화장, S자 몸매를 유지해야 하나보다. 정작 여성 본인이 어떠한 외적인 모습을 추구하는지는 고려되지 않은 채, 사회에서 소비되는 여성의 모습을 모든 여성이 동의할 것이고 따라야 한다는 생각. 보편의 폭력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투블럭이 준 선물
투블럭으로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본 경험은 스스로를 새롭게 관찰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큰 키와 진지한 면모, 단호한 성격에 또래보다 성숙해 보인다, 쎄 보인다는 이미지와 함께 살았다. 하여 머리를 짧게 자르면 김서형 배우처럼 진정한(?) 걸크러쉬 느낌을 풍길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동글동글 오밀조밀한 내가 있을 따름이었다. 목소리를 녹음해 들어보기도 했다. 평소 내 목소리를 여성 치고는 낮은 음성이라 생각해왔는데 이것도 웬걸,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말투도 관찰해보았다. 손님들에게 과한 친절을 베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그럼에도 너무나도 친절했다. 어릴 때 열심히 친절한 태도를 배웠고 이제는 또다시 덜 친절한 연습을 해야만 한다니. 무의식적으로 친절한 나와 무의식적으로 불친절한 그들을 보며 머리가 꼬이고 속이 메스껍다.
나라는 존재를 이루고 그 존재를 바라보는 기준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새삼 실감 났다. 그동안 사회적인 관계에서 주어진 나의 이미지를 의심 없이 나라는 존재 자체로 받아들여 왔다. 다시 만난 나라는 사람은 생각보다 내향적이었고, 새로운 시도도 좋아하지만 익숙한 것들을 더 좋아하고, 격식을 차리는 자리보다 진솔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자리를 선호하고, 머리로 완벽한 플랜을 짜느라 움직임은 생각보다 게을렀고, 적은 노력으로 많은 것을 얻고 싶어 하고, 삶을 컨트롤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앞으로 새로운 관계와 사건을 맞닥뜨리며 나라는 존재는 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겠지만 그 또한 나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중요한 것은 온전히 나를 바라보려는 노력과 용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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