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언니>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죠


  어려서부터 언니가 있는 친구들이 참 부러웠습니다. 나보다 3년 일찍 태어난 엄마의 아들 때문에 인생 첫날부터 줄곧 입은 옷이 당연하게도 바지 일색인 것이 지겨워 이왕 옷을 물려 입어야 한다면 치마를 입고 싶다는 단순한 욕구도 한몫 했고요. 언제든 내 편인 동성의 동년배 인생선배가 있다면, 친구와 이야기할 때 어느 정도 요구되는 자기검열을 내려놓고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 테니 하루하루가 얼마나 즐거울까 싶어 엄마에게 언니를 만들어달라며 조르기도 했습니다. 물론 언니가 있는 친구들은 나름대로의 고충을 토로하며 상냥하고 다정한오빠에 대한 판타지를 풀어놓았고, 그렇다면 우리 서로 집에 있는 생명체를 교환하는 게 어떻겠냐며 실없는 거래를 제안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잠깐일 줄 알았던 언니에 대한 갈망은 어렸을 때로 끝나지 않고 평생 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여전히 언니가 아쉽고, 오빠는 세상 쓸데없다고 느낍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언니가 있는 친구들이 사무치게 부럽습니다. 오빠의 부인을 언니라 부르고 따르며 아쉬움을 그나마 좀 달랜 정도? 사회생활을 하게 되면서 힘든 점도 많았지만 그런 사리사욕을 얼추 충족하게 됐습니다. 졸업 후 공적인 조직에서, 그리고 사적 모임에서 알게 된 많은 언니들은 인생의 이정표가 되어줬어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든든한 수많은 언니들! 특히나 첫 회사가 성비 따위 개나 줘버린 IT 연구소였는데, 공대 때부터 자매연대의 소중함을 몸소 깨달았던 언니들은 멋짐 그 자체였습니다. 내가 하는 고민들을 이미 끝낸 그들이 해주던 조언에 마음의 허기를 채울 수 있었고, 나도 저렇게 듬직한 존재가 되고 싶다고 다짐했지만 그게 다짐만으로 쉽게 이뤄지지는 않더라고요. 여전히 동생보다는 언니가 편하고 태생이 막내인 입장에서 <아무튼, 언니>는 그냥 왜 이제야 읽었는지 모를 너무나 내 마음 같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보다 세상에 먼저 나온 전작 <경찰관 속으로>는 주류에서 소외되고 있는 여경의 눈으로 바라본 우리 사회의 고통받는 여성 이야기가 담담한 필체에 담겨 있습니다. 주저앉고만 싶은 현실 속에서도 서로를 위하며 극복하려는 저자의 의지가 느껴져 그 깊은 울림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요. <아무튼, 언니>에 등장하는 언니들 중 한 명에게 쓰는 편지를 엮은 것이 바로 <경찰관 속으로>라는 것을 알고 나니 뭔가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도 들고, 두 작품이 마치 연작 같기도 해서 더욱 흥미로웠습니다. 저자가 태어나서부터 마음 둘 곳 없이 힘든 시간을 보내다 만난 경찰 언니들은 저자를 무장해제 시켜줍니다. 해묵은 마음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저자의 아픔에 귀 기울여주고, 무채색이었던 저자의 삶을 총천연색으로 물들여준 언니들과의 일화를 읽다 보면 덩달아 울고 웃게 됩니다.

 

저자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세상에 혼자 외딴 섬처럼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만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아니구나, 내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하는 동질감과 안도감은 생각보다 큰 힘이 될 뿐만 아니라 힘든 현실을 버티고, 또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유명한 표어가 있습니다. 여성의 일상적인 경험은 사실 사회 전반의 성 억압과 성 권력관계를 바탕으로 생성되며, 그렇기에 개인의 경험은 사회적으로 조명받아야 하고 사회문제화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죠(출처: 여성위키). 그렇기에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모습일 수밖에 없는 여성의 개인적 경험과 일상은 더더욱 공론화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견고해집니다.

 

음주운전이나 뺑소니처럼 운전자의 고의나 과실이 명백한 경우는 차치하더라도, 도로 위에서는 다양한 이유로 얼마든지 크고 작은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나 혼자 잘한다고 피할 수 없다. 사고는 도로와 자동차가 존재하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큰 인명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사고가 나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보험회사에 연락해 원칙대로 처리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남자가 사고를 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 여자의 경우에는 김 여사의 만행으로 탈바꿈한다.”

 

이 나라는 아직까지 여성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운으로 치부한다. 남자를 잘못 만나서, 하필 그 길을 지나서, 왜 그 옷을 입어서. 여성들이 피해 입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치밀하게 짜놓고도 피해 여성 개인의 운이나 노력만을 물고 늘어진다.”

 

언제까지 조심히 가라는 말을 인사처럼 해야 할까. 언제까지 우리의 안전은 우리 개인의 몫으로 치부될까. 왜 우리는 택배 송장 하나 마음대로 버리지 못하고, 배달 음식을 받을 때도 현관까지 내려가야 하며, 직거래를 하기 직전까지도 최대한 여성이라는 티를 내지 않아야 하는 걸까. 언제부터 우리는 길가에 핀 꽃을, 밤하늘에 뜬 별을, 집 앞의 심야 식당을 쳐다볼 여유조차 빼앗긴 채 등 뒤 누군가의 발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귀가를 서두르게 된 것일까. 도어록으로도 모자라 별도의 잠금장치를 설치하면서까지 문을 틀어막게 되었을까. 택시 조수석에 앉지 못하게 된 건 언제부터이며, 친구가 탄 택시의 차량 번호를 재빨리 적어 보내주는 게 어째서 당연한 일이 된 걸까... 여성인 것이 노출되는 순간 사회는 정글로 변한다. 우리의 회피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여성을 피해자로 삼는 데 너무 익숙해진 사회가 문제다. 언제까지 이런 당연한 소리를 반복해야 할까.”

 

내가 잘못해서, 나만 어쩌다 겪은 일인 줄 알았던 대부분의 불쾌한 경험은 이렇듯 알고 보면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기억의 교집합이었습니다. 개선의 필요성을 모를 수 있는 특권을 지닌 다수가 그 문제를 깨닫게 하려면 더 많은 사례의 축적이 필수적으로 요구되며, 더 많은 여성들이 어느 그릇된 사고를 지닌 남자 연예인의 바람과는 달리 설치고 떠들고 생각해야함이 분명해지죠. 하지만 이를 방해하는 크나큰 장애물이 존재합니다. 여성들은, 숨쉬는 동안은 줄곧 스스로를 타자화하도록 길러진 까닭입니다. 게다가 다수가 소수에게 군말 없이 순순히 따르는것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까지 환상의 콜라보를 이루어 성별위계에 고스란히 반영됩니다.

 

여성들이 평생을 끊임없는 자기검열과 강요된 겸손에 갇혀 스스로를 낮추는 데에 여념이 없는 데 비해, 비여성은 티끌 같은 자기 얘기를 태산처럼 부풀려 세간의 이목과 인정을 사는 데 선천적인 재주가 있는 데다가 그들 간의 우쭈쭈를 품앗이하며 지칠 줄도 모르고 재생산합니다. 오히려 보는 이가 부끄럽고 피곤할 정도입니다. 그들의 나무들에게 한없이 미안하기만 한 수준의 결과물들이 세상을 덮어버릴 지경인데, 우리도 겸손함 따위는 접어두고 더 큰 목소리로 설치고 떠들고 생각해야 기울어진 세상이 제자리를 찾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죠. , 잘 압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이젠 좀 지치기도 합니다. 노력에 비해 바뀌는 현실은 미미해서 무력감이 고개를 드는 동시에, 그 감정에마저 죄책감이 들어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는 것도 지겹다 싶고요.

 

“1990년생이던 동기 언니들은 자라는 내내 백말띠라 재수가 없고 기가 센 여자애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해 여아 낙태율이 최고점을 찍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재수 없고 기가 센 여자애들이 어른이 된 지금, 사회는 그들을 향해 출산율의 희망이라 일컫는다.”

 

의료진은 출산 도중 어떤 물질이 혈관을 타고 역으로 들어가면 현대 의학으로는 죽음을 막을 수 없다고 했다. 달나라도 가는 세상이지만 여자 목숨 구하는 데에는 뜨뜻미지근한, 가려진 죽음이 이토록 많다니.”

 

언니, 어쩌면 이 세상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이상한 곳일지도 몰라. 눈뜨고 보는 모든 일상이 거짓말 같아. 누군가 산산이 부서져도 어찌 됐건 세상은 굴러가고 있다는 게, 부서지는 대상은 늘 정해져 있다는 게 말이야. 이런 엉망진창인 세상이라면 차라리 확 망해버렸으면 좋겠어.”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거지같은 세상, 그냥 망해버리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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