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쪽. 1대 1이라는 위험한 결합 : 『행복을 부르는 고양이』
- 그림책 처음 일기: 희음
- 2021. 4. 26. 14:58
고양이는 신기한 존재다. 온갖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어도, 힘겨운 마음 때문에 어쩔 줄 모르다가도, 고양이 쪽으로 눈을 돌리면 적어도 그렇게 고양이를 바라보는 동안만큼은 함부로 행복과 평화를 말하고 싶어진다. 아무리 바라봐도 질리지가 않고, 눈앞에 저 존재가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워서 네가 나를 사랑하는지, 혹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물을 겨를조차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물론 함께 살게 될 경우 성가신 일이 많긴 하다. 고양이와 사는 건지 털 뭉치와 사는 건지 모를 만큼, 사방에 날려가 달라붙은 온 털들을 처리하는 것이 매일의 숙제로 건네진다. 고양이 대변 냄새는 또 너무 강렬한 나머지 매일같이 새롭다. 하지만 이런 매일의 일거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이렇게나 아름다운 고양이가 내 가까이에 실재하는 존재라는 것을 아무래도 믿기 어려웠을 것이고, 고양이를 바라볼 때마다 느끼는 행복 역시 가짜라 여겼을 게 뻔하다.
고양이 이야기가 나올 거라는 기대 때문에 집어든 그림책이긴 했지만 “행복을 부르는 고양이”라는 제목에 든 말들은 사실 너무 당연하여 고루하기까지 했다. 물론 제목만 그랬다. 표지 그림은 내 마음이 훅 기울도록 했다. 누군가를 등에 태운 아주 커다란 고양이의 부드러운 얼굴은 내가 집에서 늘 보던 얼굴과 묘하게 닮아 있었고, 고양이 주위로 칠해진 노란색 바탕은 고양이의 체온으로 골고루 데워진 세상 같았다. 아껴가며 책장을 넘겼다.
그림책 속 ‘나’는 어느 날 밤 자신의 집을 대뜸 찾아든 작은 고양이와 함께 살게 된다. 그는 클라리넷 연주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날도 그는 어김없이 클라리넷을 불었다. 그런데 연주가 끝났을 때 그는 그 앞에 있던 고양이의 몸집이 조금 커져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클라리넷을 불 때마다 고양이는 점점 몸이 커진다. 그리고 급기야는 집을 가득 채울 만큼 자라게 된다.
커져버린 고양이의 몸이 집에 꽉 끼어서 바깥으로 나갈 수 없게 된 걸 걱정하던 것도 잠시, 그 와중에도 조금씩 고양이의 몸이 자라난 덕분에 집은 단번에 시원스레 터져나간다. 고양이에게 기대고 고양이 위에 누워서 잠자던 그는 이제 고양이를 타고 하늘을 난다. 둘은 함께 하늘 길을 떠다니고 유영하며 삶을 즐긴다. 먹을거리가 떨어지면 둘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으로 잠시 내려가 클라리넷 연주를 하고 그 대가로 밥을 번다.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게 ‘나’이긴 해도, 그 일은 무척 작고 희미해 보인다. 내려갈 곳을 살피고 택하는 것도,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도 고양이이며, 자신의 몸을 무대처럼 펼쳐 전례 없는 음악의 공간을 열어내는 것도 고양이이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구경하거나 연주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은 순수한 손님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들은 그 혹은 고양이와 관계 맺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의 주위를 도는 자, 구경꾼, 잠깐 들렀다간 금세 사라지는 존재들이다.
그러니 그에게는 고양이가 전부다. 고양이는 그를 먹이고 재우고 살린다. 그의 육체와 정신을. 그는 고양이에게 자신의 삶 전체를 의탁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둘도 없을 것 같은 아름다운 존재를 만나 사랑하게 되고, 그 존재가 나의 전부가 되고 세상 전체가 되는 일, 그것만큼 낭만적인 일은 없다. 낭만적일 뿐 아니라 이상적이기까지 하다. 우리는 대개 그런 삶을 한 번쯤 꿈꿔봤거나, 지향한 적 있지 않은가. 1대 1이라는 짝지음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아플 때 열일 다 제치고서 내게로 달려오고 내가 고통받을 때 나보다 더 아파하는 사람, 사람들이 나를 손가락질할 때 무조건 내 편이 돼주는, 내 앞에서는 어떤 조건도 따지지 않는 단 한 사람을 우리는 기다리지 않는가. 절대적인 나의 짝.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나보다 오래 살아 내 옆을 늘 지킬 것 같은, 나의 짝.
하지만 그런 강철 같은 믿음 안에도 불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커플들은 법적 계약관계를 통해 공적인 승인을 받기도 한다. 국가 역시 그것을 권장한다. 물론 재생산(생식)이 가능하거나 재생산에 더욱 능할 것처럼 보이는 젊은 이성애 커플에게만 장려 정책은 온통 집중되어 있지만 말이다. (국가의 눈에 어떤 커플은 커플이 아니다.) 젊은 이성애 커플의 결합을 절대화하여 재생산에 가담하게 하는 것은, 지금의 자본주의 체계의 생산과 소비에 보탬이 될 뿐 아니라 ‘가족주의’라는 이 사회의 믿음체계를 강화하는 데도 유용하다. ‘가족에 의한 가족의 돌봄’과 관련된 믿음체계는, 서로에게 기대어 있는 두 사람이 가족이 되어 서로를 돌보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세대 간 돌봄으로 확장되게 함으로써 유지된다.
중요하게 짚고 싶은 것은 국가 역시, 이 1대 1이라는 짝이 이 사회에 사는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지키고 돌보는 가장 이상적이고 온당한 보호책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각자도생의 시대라고 하지만 그럴수록 1대 1 결합에 대한 환상은 강화되기 십상이다. 삶에 대한 실질적, 심리적 불안이 커질수록 기대어 설 수 있는 무조건적인 존재에 대한 열망은 더 간절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관계를 만들어갈 자원과 시간조차 없어 주저앉게 되는 경우가 있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다만 앞날에 대한 불안이 일상의 시공간 구석구석으로 밀어닥칠 때, 제도적 뒷받침이 없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열망과 이데올로기는 어디로 나아가는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다.
1대 1 관계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그 관계만을 ‘관계’의 지위에 놓고 나머지는 관계로서 상상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생각이다. 그럴 때 자신의 짝 외의 다른 이들을 자신들과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공거’의 존재로 여기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럴 때 ‘그 밖의’ 이들은 보다 쉽게 배제와 대상화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나’와는 상관없는 절대적 타자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깥의 그들이 밀려나는 것뿐만이 아니다. 절대적 타자를 만들어내는 일만큼이나 완고하게, 절대적 관계 안에서 나의 짝이 된 한 사람은 내 모든 삶의 영역에 관여하는 자가 되며, 나를 온전히 다 내맡겨야만 하는 자가 된다. 그때 나는 취약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나의 파트너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다. 그 관계에서 서로를 잃게 되는 상황 역시 두 사람 모두에게 상상을 초월한 삶의 절벽이 된다.
그래서 나는 <행복을 부르는 고양이>의 따뜻함을 한껏 상상하며 책장을 넘기면서도 그 이야기에 마냥 기대기가 어려웠다. ‘나’와 고양이의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낭만적인 만남과 결합, 그리고 그 둘이서 떠나는 환상적인 여행 이야기에 불안부터 느꼈다. 그 여행은 해방이 아니라 속박처럼 느껴졌다. 고양이에게 삶의 전부를 다 의지하고 있는 그가 아닌가. 먹고 자고 사는 일, 웃고 떠들고 즐기는 시간 전부를. 만일 어느 날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이 꽤나 구체적으로 점쳐지기도 한 것은, 고양이는 그가 클라리넷을 불 때마다 몸이 점점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페이지쯤에 가서 고양이는 수십, 수백 명에게 그의 몸으로 객석을 만들어줄 만큼 거대해졌다. 사람들을 위해 무대를 만드는 것이 고양이의 일이었지만, 클라리넷 연주에 가장 깊이 빠진 존재는 바로 고양이 그 자신이었다. 고양이는 연주 듣는 걸 결코 그만두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몸집은 커지고 또 커져서 그를 놓치거나 그를 알아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커지고 커지다 종국엔 풍선처럼 터져버리고 말거나.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그 특별하고도 따뜻한 고양이가 이야기 속 ‘나’뿐만 아니라 모두의 친구로서 나아가는 이야기였다면. 부풀어 오른 자신의 몸으로 ‘나’의 집을 부수고 날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원래의 작은 몸으로도 꽁꽁 잠겨 있던 마을 사람들의 집 문을 언제든 활짝 열어젖혀 그 집들의 문이 날개처럼 펄럭거리게 하는 이야기였다면, 다른 먼 곳이 아닌 지금-여기가 언제나 이미 하늘처럼 트인 듯 느껴지게 하는 그런 이야기였다면. 클라리넷 연주를 듣는 이들이 청중으로만 깃들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 또는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 그려 넣어지는 이야기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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