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작은 오구의 큰 세상
- 인외식구-사람은 아니지만 함께 숨쉬는: 파이퍼
- 2021. 10. 12. 10:30
친구가 포인세티아를 한 포트 줄 수 있다고 해서 집에 놀러 갈 겸 약속을 잡았다. 새로운 식물을 얻으러 간다는 생각에 들떠서 초인종을 눌렀는데, 평소엔 문을 바로 열어주던 친구가 유독 뜸을 들였다. 조금 기다리자 문이 열렸고 생전 처음 듣는 발소리가 들렸다. 오도도도도. 그건 기니피그 오구가 운동하는 소리였다.
오구는 유기된 기니피그였고, 친구는 오구를 오랫동안 지켜보다가 입양을 결심했다고 한다. 기니피그를 실제로 본 건 오구가 처음이었다. 상상하던 것보다 컸는데, 또 내 몸집에 비해서는 아찔할 정도로 작았다. 가방을 아무 데나 턱 내려놓는 순간, 근처에 있던 오구가 놀라 우다다 도망을 갔고 그때 나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기니피그는 이름에 피그가 들어있는데 생물학적으로는 설치류고 얼굴만 보면 토끼도 닮았고 전체적인 모습은 햄스터 같기도 하다. 익숙한 듯 낯선 생김새의 작은 친구. 누구나 기니피그를 보면 쉽게 눈을 떼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오구의 이마에는 매력적인 가르마가 있는데, 가르마 때문에 털이 눈 위로 뻗어 있어서 꼭 사람의 눈썹 같아 웃음이 나왔다.
친구에게서 오구와 병원에 갔던 이야기를 들었다. 친구가 갔던 병원의 수의사가 오구 이야기를 듣고는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기니피그도 유기를 해요? 토끼는 가끔 봤는데…….”
이 말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의사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의아했다. 동물을 돌보는 게 직업인 사람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니피그는 실험동물이었다가 유기되기도 하고 특이한 동물을 키우고 싶어 하다가 돌보기 어려워서 버리는 사람도 많다. 수의사라고 해서 모든 종의 사정에 대해 박식할 필요는 없지만, 동물 식구와 보호자를 존중하지 않는 말이었다.
“거기서 토끼 얘기는 왜 튀어나왔대?”
“몰라. 그냥 특수 동물로 묶어서 생각하나 봐.”
친구는 고개를 내저었다.
포털에 특수 동물을 검색했을 때 가장 많이 나오는 글은 병원 광고와 후기다. 토끼, 고슴도치, 거북이처럼 ‘보통은’ 사람들이 함께 살지 않는 동물들을 수의학 쪽에서는 특수 동물로 구분하는 모양이다.
특수 동물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건 스무 살 때였다. 토끼와 함께 사는 일상 웹툰에서 보았는데, 토끼를 케어해줄 수 있는 병원이 많지 않아서 급하게 진료를 받아야 할 때 애를 먹는 내용이었다. 작가는 택시를 타고 오랜 시간 이동해야 하는 병원에 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오구 같은 작은 친구가 아파하는데 곧바로 치료하지 못하고 택시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그 초조함과 불안함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특수하다는 말에는 은근한 거리 두기가 있다. 상대에게 특수하다고 말하는 이는 스스로 기본값 정도는 되는 존재로 생각한다. 반면 상대는 기본값에서 벗어났다고 여겨서인지, 그에 대한 존중은 쉽게 놓아버리곤 한다. 인간들은 특수 동물이라는 분류 아래에서 살아있는 존재를 수집하고 개량하고 맘대로 ‘이용’한다. 존중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활 속 동물의 종류와 이용 방법」이라는 제목의 네이버 지식백과 항목에서도 특수 동물이라는 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초등 교과 과정에 포함된 내용이었다. 그 글에 따르면 우리 생활 속의 동물은 경제 동물, 애완동물, 특수 동물로 나뉜다. 경제 동물은 먹거나 입히면서 사고파는 동물, 애완동물은 집에 두고 예뻐하는 동물, 특수 동물은 탐사견이나 시각장애인 안내견처럼 특수한 목적이 있는 동물이다.
이 정보는 동물을 ‘쓰임’의 대상으로만 다루고 있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동물을 인간 중심으로 도구화하고 있다니. 이 사회에 퍼져 있는 만연한 종차별이, 새삼스럽게 당연한 결과처럼 느껴졌다. 특히 어떤 동물들은 특정한 목적, 즉 인간의 이득을 위해 태어난 것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오구가 정확히 어떤 경로로 유기되어 친구의 집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보호소에 올 때 이미 새끼를 임신하고 있었다던 오구. 그가 어떻게 살아왔을지 감히 예상하기도 조심스러울 뿐이었다.
어쨌거나 현 시점의 오구에게 필요한 건 과거에 대한 추측이나 동정심이 아니라, 파릇파릇한 채소와 과일, 아늑한 잠자리와 재밌는 장난감이었다. 오구는 주로 작업방 한 가운데 설치된 집에서 지내고 운동이 필요할 땐 거실도 활보하면서 즐겁게 사는 것으로 보였다.
사실 난 친구를 오랜만에 보러 가는 거였고 덤으로 포인세티아도 한 포트 얻어갈 생각뿐이었다. 포인세티아가 글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다. 하여간에 기니피그 오구에 대한 애정을 품을 계획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데 오구가 고수를 먹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에게 마음이 쏠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부터 친구는 오구가 고수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그 점이 나랑 닮았다고 말했다. 오구는 정말로 처음 보는 나를 경계하지도 않고 내가 내민 고수를 게 눈 감추듯 먹어버렸다. 이파리를 유독 좋아하는 건지, 줄기는 남겨두고 잎만 속속 골라 먹으며 작은 입을 바쁘게 움직였다.
편안한 장소에서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존재는 언제나 평화로워 보인다. 친구가 구조된 오구를 입양하지 않았다면, 오구가 평화롭게 채소를 먹는 모습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기니피그를 실제로 볼 기회도 아마 오지 않았을 것이며, 특수 동물이라는 언어의 이상함을 직접 느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오구의 세상이 ‘특수함’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고수를 맘껏 먹으면서 건강하게, 본 모습 그대로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 특수 동물을 특수하게만 여기지 않고 그들의 태어난 모습과 삶을 존중한다면, 오구 말고도 많은 동물들이 평화로울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간 실험동물로 이용당하거나 원치 않는 군사 훈련을 받는 크고 작은 동물종이 ‘특수 동물’ 카테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일단 지금은, 조그만 오구가 경험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세상을 만나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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