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숏컷
- 뿌리는 밤: 하타라
- 2021. 10. 25. 10:30
살면서 처음으로 숏컷을 한 건 약 10년 전, 대학교 2학년 신학기가 시작된 봄이었다. 줄곧 긴 머리와 단발 기장 사이에서 길렀다가 잘랐다가를 반복하며 딱히 숏컷에 대한 갈망은 없었는데, 스물한 살이 되면서 머리를 매우 짧게 자른 것이다.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지금이야 국가장학금 제도가 있어 학비를 면제 받거나 저금리로 학자금 대출을 받을 수가 있지만, 그때는 그런 제도가 없었고 집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기에 성적 장학금을 받아야만 대학을 계속 다닐 수가 있었다. 머리를 말리고 묶는 모든 과정이 귀찮게 느껴졌기에 그 번거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머리를 잘랐다. 다행히 숏컷이 싫지 않고 공부가 괴롭지 않았다. 수도권 대학을 가려면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전공을 선택해야 했기 때문에 줄곧 희망하던 전공을 공부할 수 있고 장학금을 주는 지방 대학을 골랐던 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정말 잘한 일인 것 같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머리를 자르러 간 날의 기억이다. 대학 근처에 있는 미용실에 가 머리를 잘랐는데 내가 숏커트를 하고 싶다며 사진을 보여주었을 때의 직원 얼굴이 마치 어제 만난 얼굴처럼 또렷이 기억이 난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거부감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르는 이유가 무엇이며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관리가 어렵다, 너무 남자답지 않느냐,는 등의 설득을 하며 나를 말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확고했다. 경험해보지 못한 일에 대해 타인의 말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남자답지 않느냐는 말이 대체 뭘 의미하는 것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발심이 들었다. 그땐 여자다움과 남자다움 등 각 성별의 ‘스러움’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음에도, 나를 제지하는 행위에 대한 반발심이 컸다. 그래서 난 좋으니 잘라달라고 했고 그렇게 나의 숏컷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 뒤로도 동네 근처 미용실부터 번화가 미용실까지 여러 군데서 머리를 잘라 봤지만 10군데로 치면 1군데만이 흔쾌히 잘라줬던 것 같다. 대부분의 경우가 나를 말리거나, 내가 원하는 대로 잘라주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길이와 그들이 원하는 길이 사이의 애매모호한 기장의 머리가 된 적도 있었고 ‘스타일’은 없는 반삭 직전의 머리가 된 적도 있었다. 일본에 와서도 미용실 탐험은 계속되었다. 일본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예약 사이트가 있어 위치, 미용사, 가격, 후기 등 대부분의 미용실 정보 확인이 가능하다. 미용실에 따라 샴푸 없이 커트만 해 달라 할 수도 있고 그 경우 500엔이 저렴하다. 처음에는 가격이 싼 곳을 중심으로 예약을 했었는데 이곳에서도 숏컷 헤어를 흔쾌히 해주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은 존재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마음 놓고 머리를 맡길 수 있는 곳을 2~3군데 정도 찾는 데 거의 3년이 걸렸다.
10년 전이야 짧은 머리 = 남자 머리란 인식이 강했다고 쳐도 요즘 이 시대에도 그런 인식이 강한 건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일단 머리가 짧으면 편하다. 너무나도 편하다. 감고 말리고 세팅하는 모든 과정이 편하다. 이 모든 과정을 해내는 데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5분이 걸리지 않을 때도 있다. 처음 숏컷을 한 뒤 집에서 머리를 감았던 날, 벌써 끝났다는 놀라움과 가벼워진 어깨부터 느껴지는 감각이 얼마나 짜릿했는지 모른다. 또, 짧아진 머리 길이로 세정 용품, 물, 전기, 내 에너지 모조리 절약이 가능하다. 머리카락 길이가 짧아지니 방 청소도 쉽다.
물론 숏컷이 무조건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단점도 있다. 헤어스타일이 쉽게 지저분해질 수 있으니 주기적으로 미용실에 가야 한다. 이것도 사실은, 저렴하면서 실력이 나쁘지 않은 곳을 찾기까지가 힘들지만 찾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해결되는 문제다. 다른 단점도 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잡소리에 견뎌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걱정인지, 궁금함인지, 있었으면 하는 기대감인지 당최 분간이 안 되는 말을 주위로부터 들어야 한다. 처음에는 정말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라 생각해 ‘그냥’이라고 대답했었다. 이윽고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한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그것이 그들이 원한 대답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더더욱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그들을 당황시키기 위해 누가 죽어서라는 이유를 대고 싶기도 했지만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나를 위해 죽은 상태가 되어야 하는 그 사람은 무슨 죄란 말인가. 실행한 적은 없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그냥이라 대답한다. 이유를 설명해봤자 대화는 성립되지 않을 것이고 서로 피곤해질 게 뻔하다.
사실 제일 받아들이기 힘든 단점이 있다. 남자 같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대체 여자다운 것과 남자다운 것이 뭔데. 극단적인 이분법 잣대 위에 오를 때마다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밸런스 볼 위에 올라가 있는 듯하다. 전신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리고 사람들에게 보일 나의 겉모습을 신경 쓰게 된다. 쓸데없이 힘을 쓴 듯하다. 무척 피곤해진다.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볼 위에서 내려오면 된다. 그들의 잣대 위에서 벗어나면 된다. 내 기준 속에서 살면 된다. 내가 괜찮으면 된다. 내가 좋으면 된다. 타인이 아닌 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 방법이 간단한데 깨닫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간단하면서 쉽기까지 하면 참 좋겠지만 쉽진 않다. 아직도 연습중이다. 몸을 지탱하는 근육을 만들 듯 세상에 대한 근육을 키우면 될까? 힘들겠지만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분법은 편하다. 그렇다 아니다, 맞다 틀리다, 하얗다 검다 2가지만 생각하면 되니까. 하지만 선택지가 더욱 다양한 삶이, 숨통이 트이고 더 재미있지 않을까? 아이스크림 맛 31가지 고르듯이 인생도 선택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고르는 재미가 있을 것이고 사는 재미가 생기지 않을까? 편하냐, 재미있냐,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인생에 있어 중요한 기준을 고르는 기준도 다르겠지만 난 재미있게 살고 싶다. 처음엔 편하고 싶어 숏컷을 했지만 지금 나에게 짧은 머리는 나다움을 상징하고 유지하는 하나의 기능을 한다. 거기다 재미도 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 숏컷을 해보는 것을 감히, 열렬히 추천한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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