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봄의 길목에서
- 예민한 알바생: 조이(연재 종료)
- 2020. 3. 19. 17:19
봄이 왔다
한낮에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살 덕에 완연한 봄을 느낄 수 있는 요즘이다. 추위에 약하지만 더위에 강한 나는, 날이 풀리자 입맛이 돌고, 활동량도 상당히 증가했다. 집안 곳곳, 매장 곳곳을 청소하는 재미로 일상을 채우고 있다.
일하고 있는 편의점은 작고 알차다. 매장의 규모는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다. 기본적인 라면, 과자부터 냉장식품과 냉동식품, 면장갑이나 비옷 같은 잡화류와 A4용지, 지우개 같은 문구류까지. 잘 나가는 상품은 담배와 라면, 즉석식품, 건전지 정도다. 작년 여름에는 계절에 맞춰 썬크림도 들여놨지만 하나도 팔리지 않았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 아니고,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시내가 있다 보니 간편한 상품들만 나가는 편이다.
상품 발주는 아르바이트생이 직접 한다. 다만 발주 통장 관리는 사장님의 사무적인 일들을 하는 실장님이 하는데(사장님은 카페형 편의점이 본업이 아니고, 철강업이 본업이다. 철강업의 사무를 보는 실장이 편의점 통장도 관리한다.) 발주 물건을 파악하고 발주를 넣는 것은 아르바이트생이 한다. 단순히 편의점 물품 발주뿐만 아니라 주류 발주, 담배 발주도 알바가 한다. 처음에 이게 상당히 의아했다. 이 매장 전에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두어 번 해봤지만, 그 어느 매장도 이렇게 아르바이트생들에게 많은 업무를 맡기지는 않았다. ‘사장님이 우리를 이렇게 신뢰하시다니! 정말 감사하군!’ 이 아니라, ‘사장 날로 먹네. 뭐 신경 안 쓰니까 좋긴 하네, 대충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청소하는 이유
사장은 이 매장은 돈을 벌려고 차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마실 커피 때문에 차린 것이라 말하지만, 경기가 안 좋아 본업인 철강업이 잘 안 되자 편의점 물건, 주류, 담배 발주를 최소화하라며 쪼아대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은 내뱉기 쉬운 말을 믿지 말고, 하기 어려운 행동거지를 보며 겪어봐야 한다.
손님은 없고, 평소 사업 일로 매장에 잘 오지 않던 사장이 경기가 안 좋으니 매장에 자주 출몰하는 요즘, 매장에서의 시간이 정말 안 간다.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창고 정리를 시작했다. 지난주에는 음료 창고를, 이번 주에는 라면과 과자 창고를.
어느 날에는 매출이 너무 안 좋아서 사장님한테 죄송한 마음을 품은 자신을 발견했다. 손님이 없으면 매장 정리 정돈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그러다 손님이 안 오는 게 내 탓도 아닌데 내가 눈치 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닿았다. 손님이 많이 온다 하여 사장이 급여를 더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내 급여는 시급이지 성과급이 아니다. 사장은 내게 급여를 주는 사람이지만 그에게 잘 보인다고 해서 시급이 오르는 것도 아니다. 그는 늘 번지르르한 말들을 내뱉곤 했지만, 막상 시급을 올려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런데도 내가 청소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청소의 가장 큰 이유는 나 자신을 챙기기 위해서다. 이 매장에서 하루 일곱 시간의 노동을 하기로 계약했는데 때때로 이 시간은 일곱시간보다 몇 배로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체감되곤 한다. 매장 밖에서 해야 할 일들과 하고 싶은 일들이 많지만, 돈을 벌기 위해 편의점을 그만둘 수는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나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나라는 존재와 시간이 일곱시간 동안 매장에 붙잡혀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져 퇴근 후에도 마음이 쉬이 추스러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 때문에 매장에서는 되도록 활기차고 별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려 노력한다. 창고에 산적해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내 두 손으로 쥐어 유통기한을 확인해 선입선출하고, 상표의 방향과 간격을 맞춰 쪼르르 정리해내면 각 잡혀 자리잡은 그 모습을 보며 편안하고 뿌듯하다. 내 머릿속에 산적한 고민거리들도 정리된 물건들처럼 제 자리를 잘 찾아낼 것만 같은 가볍고 산뜻한 기분이 샘솟는다.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의 반증
고민이 많을 때는 글로 적어 본다. 보통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많이 고민하는 편인데 선택1을 했을 때와 선택 2를 했을 때의 장단점을 나열해보고, 그 중 우선순위를 매겨 본다. 이렇게 해도 고민이 끝나지 않을 때는 잠을 잔다. 자고 나면 몸과 마음이 그간 해왔던 고민에서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며 비교적 초연해져 주어진 상황을 보다 단순하게 보게 된다. 때로는 무기력한 상태로 의미 없는 오락거리 영상을 보며 시간을 때우다가 더 깊은 우울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다 나 자신이 가엾어 햇볕을 좀 쬐어주고 바람과 나무를 만나러 기어이 밖으로 나서기도 한다. 지저귀는 새들을 바라보며 생각을 멈추기도 하고, 동네 곳곳을 산책하며 어린 시절의 행복한/불행한 기억을 마주하기도 하고, 산적한 농사일과 마당 정리에 힘을 쓰기도 하다가, 지금 이 순간의 내가 과거에는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멋진 사람이라는 것에 감탄하고 그 감정을 곱씹으며 자신을 다독이곤 한다.
니체는 말했다,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반드시 스스로의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고. 지금의 삶이 흔들리고 뭐하나 뚜렷이 보이지 않지만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있음은 적어도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 이것으로 작은 위로를 얻으며 다가온 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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