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전 내년 서른이 되는 생일에 죽을 거예요. 하지만 남은 1년 동안 제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저에게 생긴다면 죽지 않고 소원도 안 빌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스물아홉 살 생일에 내가 마지막으로 간절히 기도했던 반 협박성 기도 내용이다. 교회는 다니지 않은 지 오래였다. 그리고 서른 살 생일까지 남은 1년 동안 나는 죽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해보기로 했다. 후회 없이 잘 죽을 수 있게. 나는 왜 죽고 싶을까. 내가 꿈꾸는 죽음, 만족스러운 죽음을 위해 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내가 가장 죽고 싶었던 이유는 외로움 때문이었다. 끊임없는 외로움을 견디는 게 너무 지루했다. 아마도 나는 유독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었던 건지 늘 사람이 그리웠지만, 사교성이 없고 소극적이어서 ..
황토색보다는 진한 베이지색에 가까운 면장갑, 버버리 이미테이션인 듯한 체크 머플러, 빛바랜 마트료시카 인형, 기도하는 아기 천사가 그려진 플라스틱 접시, 드문드문 금테가 벗겨진 옥색 밥그릇. 내가 좋아하는 할머니의 유품들이다. 돌이켜보면 할머니도 물건에 집착이 깊었다는 게 생각난다. 1층짜리 작은 단독주택인 할머니 집에는 잡초가 무성한 작은 마당이 있었고 집안 여기저기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잡다한 물건이 많았는데, 깨진 부분을 접착제로 붙여 놓은 도자기 장식품에다 내가 살짝 손이라도 댈라 치면 금세 불호령이 떨어졌다. 방에는 커다란 자개장롱과 자개서랍장들이 화려하게 서 있었고 곳곳에 먼지 쌓인 플라스틱 조화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사용하지 않는 크리스털 컵과 접시, 그리고 유통기한이 지난 듯한 오래된..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고 있을 때도, 외로움에 지쳐 죽고 싶을 때도, 내가 짜증을 부릴 때도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준. 항상 얼굴을 마주하며 잠들고, 낮잠을 자고 있으면 어느새 내 품에 안겨 있는. 품 안에 얼굴을 숨길 때 닿는 코의 차가운 감촉이 기분 좋은. 나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편안해 보이는. 너는 나의 친구고 가족이고 분신 같은 존재야. 14년을 함께한 내 낡고 오래된 사랑의 주인공 나의 고양이 미쉘. 나는 고양이를 무서워했다. 어릴 때 무심코 번쩍 안았던 고양이가 등에 손톱을 박고 떨어지지 않았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스무 살 즈음이었을까. 집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길 한가운데에 앉아 나를 보고 울었다. 나를 향해 계속 야옹야옹 우는 게 난 너무 무서워서 그 넓은 길목..
“고향이 어디야?” “마산이요.” “그럼 아버지가 어부시니?” 내가 서울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알바하던 편의점 사장은 마산이 어촌인 줄 알았나 보다. 마산이 바닷가 근처이긴 하지만 나는 직업이 어부인 분을 만난 적이 없고 회도 좋아하지 않는다. 마산에 있을 때는 서울이 그리 멀어 보이지 않았는데, 서울에서 마산은 아주 멀었다. 나는 줄곧 마산을 떠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서울에 가면 직업도 다양하고 즐길 거리도 많고 재밌는 경험과 기회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마산을 떠나던 날, 서울에서 무엇을 이룰 것인가에 대해 상상하던 그 설렘이란... 마산을 떠나 처음 살게 된 곳은 뜻밖에도 서울이 아닌 천안이었다. 함께 살기로 한 친구 B가 구한 집이었다. 나는 서울에 있는 일러스트 학원을 다..
모든 추억을 기억할 수는 있지만 모든 기억을 추억할 수는 없다는 말을 어느 소설책에서 읽었다. 요즘 내 낡은 기억과 추억을 떠올려보면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흐려지고, 즐겁고 아름다웠던 추억은 선명해진 느낌이 든다. 그래서 마음은 편하지만 조금 슬프기도 하다. 아픔을 지우고 행복만 남긴 것이 왠지 거짓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오늘 고향집에서 보관해오던 옛 친구의 편지와 사진이 든 박스가 택배로 도착했다. 오랜만에 박스의 실물을 보려 하니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만 같았다. 가끔 궁금해져서 열어보고 싶다가도 얼핏 떠오르는 과거의 부끄러운 나를 마주하기가 힘들어서 외면해 왔지만, 최근 들어선 내 머릿속에만 있는 기억이 아닌 조금은 객관적인 과거가 궁금해졌다. 풀풀 날리는 먼지와 함께 낡..
잊히는 것과 버려지는 것은 같은 동그라미 안에 있다. 단지 낡았다고 해서 버려지거나 잊히는 게 아니다. 낡았다는 건 소중하고 특별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기필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워낙 조용한 아이라서인지 나는 투명한 셀로판지 같았다. 어떤 목록에서 내 이름이 빠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그렇게 내 이름이 빠졌다는 말도 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학교에서 말을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내가 존재한다는 걸 알아챌 때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학교에서 편을 먹거나 조를 짜야 하는 상황도 곤욕스러웠다. 나는 어디서나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았다. 어릴 때부터 꽤 오랫동안 매일 두 번의 기도를 했었는데 하나는 ‘무서운 꿈을 안 꾸게 해주세요’였고 또 하나는 ‘내성적인 성격을 고..
내가 아기일 때부터 초등학생 시절 무렵까지 서울에 사는 친척 언니의 옷을 물려받을 때가 종종 있었는데 난 그걸 참 좋아했다. 남쪽지방에 살던 우리에게는 ‘서울’이라는 단어 자체가 세련됨과 고급스러움을 뜻했기에,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나도 서울 사는 사촌 언니가 멋있어 보였다. 사실 서울은 아니고 인천에 살았지만. 엄마는 그게 너무 싫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조카들 입으라고 보냈다며 비싼 옷이라고 생색내던 할머니가 미웠을 것이다. 또 보내온 옷들 중에는 형편없이 낡아서 입기 민망한 것들도 섞여 있었다고 한다. 엄마의 주관적인 기억이 덧씌워져서 과장됐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분명 엄마에게 즐거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눈치 없이 나는 그 낡은 옷 한 보따리를 산타할아버지의 선물 보따리처럼 좋아했던 기억만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