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21 개인주의자적 삶(5)
- 암삵의 삶: 위단비(연재 종료)
- 2020. 3. 13. 10:06
내 몸으로서의 삶, 연결되는 삶, 우울한 삶, 어떤 피해자의 삶, 사랑하는 삶. 그리고 미처 다 쓰지 못한 삶들까지. 그 모든 삶을 다중적으로 살아오면서 나는 끊임없이 생각을 해야만 했다. 내가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배워가는 건 생각을 통해서이기 때문에. 생각은 억지로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 만큼 나는 다가오는 생각을 맞이하는 법을 배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떨 때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의 생각들이 나를 덮쳐오기도 했다. 또 최근에는 다가오지 않는 생각 때문에 내 삶이 텅 비어버린 게 아닐까 걱정도 했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괴로운 건 매한가지다. 생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생각대로 와 주지도 생각대로 진행되지도 생각대로 끝나지도 않는다.
예전에 그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생각’의 다른 뜻이 사슴뿔이라는 것에서 착안해서 쓴, 사슴뿔로 꽉 차버린 터질듯한 곳간에 대한 글이었는데, 그 글 속의 나는 하마가 되고 싶어서 사슴뿔을 자르고 또 잘라내어 곳간에 처박아야만 하는 신세였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나는 하마가 될 수 없었고, 그저 진흙을 잔뜩 묻힌 뿔 없는 얼룩무늬 사슴일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생각을 잘라내서 창고에 처박는 일.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남들과 같은 옷을 입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벌어지는 일. 그럼에도 하마가 되지 못하고 흉내를 낼 뿐인 일. 하마는 과연 존재하긴 하는 것일까. 그들은, 나는 왜 하마가 되고 싶어 했고, 싶어 하는 것일까.
우리는 생각을 드러내기보다 감추는 것에 더 익숙하다. ‘어떤 피해자의 삶’에서 이야기했듯 생존 욕구와 평범함에 대한 욕망 때문일 것이다. 물론 때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기 위해 생각을 감추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생각을 감춘다. 감춘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생각을 자유롭게 펼쳐내는 공간을 갈망한다. 누군가한테는 일기장이, 누군가한테는 SNS가, 누군가한테는 아주 가까운 친구가 그 역할을 해 준다. 혹은 그 무엇도 찾지 못한 채 생각을 뭉개버려야 하는 상황에 놓인 이도 존재한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생각을 뭉개버려야 했다. 그 생각이라는 것이 하필이면 자려고 누우면 기지개를 켰기 때문이다.
지금보다 내일이 더 중요할 때 어떤 생각은 버려진다. 자기 전의 생각이라는 것이 특히 그렇다. 생각을 적어두는 것보다 한숨의 잠이 더 중요해지는 순간. 지금을 사는 사람들은 생각을 접어두거나 뭉개버리지 않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아주 오랫동안 했다. 삶을 살아가면서부터 시작된 한탄이었다. 내겐 내일의 삶이 있었고, 내일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오늘, 지금, 이 순간에는 잠을 자야만 한다는 강박적인 사고가 생겼다. 내일의 삶이 없었던 시절, 밤은 나의 시간이었다. 하루 중 나 자신에게 가장 솔직할 수 있었던 시간을 마음껏 누리고 낭비하고 생산했다. 그러나 내일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그 시간은 가장 괴로운 시간이 되었다. 내 생각을, 나를 외면한 채 잠들어야 하는 시간. 그때부터 나는 생각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내게 생각이란 살아있음을 의미했다. 감각과 감정에 무딘 나는 감각이나 감정보다 생각에 나의 존재를 많이 의지했다. 특히 어떤 생각을 만나고 그로 인해 무언가를 깨달았을 때 오는 희열은 살아있음 그 자체였다. 그런 내가 생각을 뒤로하고 뭉개고 두려워하는 상황은 견디기 꽤 힘든 것이었다. 생각이 미워질 지경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실은 그러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인생을 조금만 덜 심각하게 생각했다면, 내일의 무게를 조금만 덜 수 있었다면 오늘, 지금의 생각이 그렇게까지 나를 괴롭히진 않았을 것이다. 지금을 살아간다는 것이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내일의 무게를 조금은 덜어내는 것. 덜어낸 무게를 지금, 이 순간에 옮겨 심는 것.
‘지금’과 ‘생각’과 ‘내일’. 나는 그 셋 중 그 무엇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저 두려움에 온몸을 벌벌 떨면서 그 모든 것을 버거워만 한 게 아닐까. ‘지금’은 내가 살아 숨 쉬는 이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고 ‘생각’은 내 머릿속을 굴려 나가는 반짝임 같은 것이며 ‘내일’은 다시 찾아오는 지금인데. 어째서 나는 내일이 지금이라고, 생각이 지금의 반짝임이라고, 지금은 내가 살아 숨 쉬는 이 순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너무 무겁게 생각했고 살아왔다. 조금은 덜 무겁게, 살아 숨 쉬는 지금의 나를 발견하고 싶다. 지금을 광물을 캐듯 캐내고 싶다. 그래서 반짝이게 하고 싶다. 내일 찾아오는 반짝임을 위해서.
요즘의 나는 반짝이는 생각이 자주 들지 않는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시작된 변화일 수도 있고 환경의 변화가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최근까지 나는 그 사실이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 지금까지 생각이 가진 힘에 대부분을 의지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나 자신이 텅 비어버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감각과 감정과 생각이 균형을 맞춰가는 것이라고. 내게 생각이 살아있음 그 자체에 가까웠던 것은 그만큼 감각과 감정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살아있다는 건 감각, 감정, 생각의 균형임에도. 깨진 균형이 이제야 맞춰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지금까지 내 삶의 많은 부분은 생각이 이끌어왔고 앞으로도 많은 부분 생각이 이끌어 갈 것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경험과 좌절에 부딪히며 울면서 써 내려간 생각들. 지금까지의 내 글들은 그런 생각들이었다. 생각은 여전히 내게 반짝이는 보석이다. 경험이라는 광물을 캐서 연마한 보석들. 이제 나는 더 이상 내 생각이 밉거나 두렵지 않다. 내 생각대로 와 주지도 생각대로 진행되지도 생각대로 끝나지도 않지만, 생각은 나 자신의 존재 자체가 아닌 그저 내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곧 반짝일 것이기 때문에. 내가 생각을 연마하는 방법을, 그리고 나 나름대로 만들어 낸 반짝이는 것들을 이번에는 이야기해보고 싶다. 감추지도 뭉개지도 접어 두지도 않고, 지금과 다가올 지금을 만들어 온 이야기들을 나눠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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