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22 생각하는 삶(1)
- 암삵의 삶: 위단비(연재 종료)
- 2020. 4. 10. 10:25
삵은 스스로 지도를 그리는 게 서툴렀다.
‘생각’하면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 4차원 식구 중 한 명, 사랑하는 삶 2편의 주인공, 암삵의 삶 로고를 그려준 사람. 2020년 3월 24일, 그 친구는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나갔다. 갑작스럽게, 그러나 급하지 않게 벌어진 일이었다. 나와 하루를 따뜻하고 조용하게 보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그렇게 되었다. 갑작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급하게 떠났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루를 조용히 함께 보낸 뒤라 그런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친구의 배려였다는 생각은 든다. 늘 내게 따뜻한 숨 같았던 사람. 한없이 아껴주던 사람. 마지막까지 그 친구는 나를 배려했다. 나와 하루를 잘 보내고, 뒤늦게 발견되어 내가 속상하지 않게 집으로 가는 길에 그렇게.
그 친구는 굉장히 이성적이고, 생각이 깊고 많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13년 동안 많은 생각을 나눴다. 때론 싸움으로, 때론 대화로, 때론 따뜻한 말들로. 그는 나를 생각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삶 2편에 썼듯 나는 그 친구의 세계를 사랑했다. 그 세계는 감정의 세계보다는 이성과 몽상과 상상력의 세계였다. 그곳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깊은 생각과 상상들이 펼쳐져 있었다. 기찻길을 보고 ‘저 기찻길이 내 발톱이라면, 발 한번 움찔하면 온 세상이 출렁일 텐데.’라고 말하던 스무 살의 그를 기억한다. 우주와 인간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을 말해대던 그를 기억한다. 끝없이 펼쳐지는 그의 상상력과 생각들. 감정이 떠오르는 것이라면, 생각은 펼쳐지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펼쳐진 생각들의 궤적을 하나씩 밟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에 대한 오해는 의도적으로 생각을 펼쳐낼 수 있다는 믿음에서 온다. 생각에 의도가 개입될 때 우리는 경직된다. 그 차갑고 딱딱한 감각. 우리는 그것을 생각이라고 믿는다. 생각이라는 것을 마치 울창한 수풀의 나무를 베어내고 길을 내는 것 같은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생각이란, 이미 만들어진 길을 만나는 것과 같다. 깨달음이라는 이름의 만남. 반짝이는 반가움. 내게 생각이라는 길의 방향을 비춰주는 이정표는 경험이다. 경험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의 눈앞에는 생각이라는 길이 펼쳐진다. 그 순간 선택해야 한다. 생각의 길을 따라갈 것인가, 조금 더 머물러서 떠오르는 감정을 느낄 것인가.
나는 대체로 주저 없이 생각의 길을 따라 걸어갔다. 이는 내가 감정을 제대로 떠올리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인 탓도 있겠지만, 내가 느끼기보단 바라보는 사람인 이유도 있다. 감정이 주관적 경험이라면 생각은 주관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느껴지는 것과, 보이는 것의 차이. 보이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때로는 그 길을 걷는 게 두려웠다. 그럼에도 계속 그 길을 걷게 해 주는 원동력은 경험이라는 이정표였다. 이건 그 친구와 나의 차이점이기도 했는데, 그 친구는 경험보다는 마음에 떠오르는 지도를 따라 길을 걸어간 느낌이다. 길을 걷는 원동력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에게나 길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길은 자연스럽게 생긴다. 그리고 보일 것이다. 지도를 통해서든, 이정표를 통해서든. 그리고 누구나 어느 시점엔 그 길을 걷게 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어디쯤 서 있는지 감각하는 것이다. 감각하지 못하는 걸음은 사람을 방황하게 한다. 생각의 길에서 지금이 어디쯤인지 감각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언어. 생각의 언어화다. 말이든, 글이든 생각을 언어화 혹은 시각화함으로써 우리의 생각이 어디쯤 서 있는지 감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형의 생각은 언어를 통해 형태를 갖추게 된다. 생각이 형태를 가진다는 것은, 이미 놓인 길을 닦아내어 지도를 그려내는 것과 같다. 누군가는 책의 형태로, 누군가는 그림의 형태로, 누군가는 말의 형태로 그 지도를 그려낸다.
지도를 그려내는 것이 익숙한 사회는, 즉 생각을 언어화하는 것이 일상화된 사회에서는 생각의 길 위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이가 적을 것이 자명하다. 언어는 전달을 목적으로 한다. 언어에는 대상이 필요하다. 생각을 언어화하는 게 일상적이라는 것은, 타인의 언어화된 생각을 듣는 것 또한 일상적이라는 뜻도 된다. 타인의 생각을 듣는 데에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타인’이라는 인식, 바로 존중이다. 언어적 소통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존중이 없는 언어는, 존중받지 못하는 언어는 일방적 외침과 고립에 불과하다. 일방적 외침과 고립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나의 길을 의심하게 만든다. 나 자신에게 되뇌일 순 있어도 부딪힘을 통한 확인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존중에 대한 신뢰가 쌓인 사회에서 확인의 기회는 더 쉽게 주어진다.
인간적 존중은 사람을 살린다. 존중의 부재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존중의 정의에는 많은 시도가 필요하겠지만, ‘타인’이라는 인식이 그 시작점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와 다른 존재, 나와 다른 ‘인간’.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일. 수많은 차별적 인식과 타인에 대한 재단 속에서 존중은 실종된다. 존중이 실종된 그 자리에는 불안과 의심만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실존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끊임없이 떠들고 또 들어줄 공간과 그만큼의 거리가 필요하다. 일방적 외침이 아닌 소통의 대상이 필요하다. 존중받고 존중하는 그 당연한 일이 정말로 당연해져야 한다.
당연한 일이 당연하지 못한 세상에서 나와 그 친구는 늘 불안했다. 그리고 의심했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의 말을 듣는 이는 서로밖에 없었다. 그 친구는 수백 장의 그림을 남겼다. 고립과 불안 속에서 그 친구는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했다. 반면에 나는 끊임없이 사람을 찾아다녔다. 내 말을 들어줄 이를, 내 글을 읽어줄 이를.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 친구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어서일까. 혼자서 지도를 만들어내는 것이 힘겨웠다. 확인해 줄 누군가가 늘 필요했다.
그 친구가 내게 건넨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다. ‘진심을 다 말해. 종이에 진심을 정리해서 다 말해.’ 그 친구는 늘 내 생각을 언어화하길 바랐다. 말이든, 글이든 표현하라 했다. 나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내 불안에 갇혀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다. 그 친구한테 배운 것은, 적어도 나는 나를 존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 생각을 들어줄 수 있다는 것. 존중이 실종된 세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 것이다. 내 생각의 길을 닦아내고 지도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걸어 나갈 것이다. 지도의 끝에서 그 친구를 웃으면서 만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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