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23 생각하는 삶(2)
- 암삵의 삶: 위단비(연재 종료)
- 2020. 4. 24. 18:00
삵은 마음으로 생각을 비춰보았다.
길에는 이정표가 필요하다. 그리고 가로등도, 그 길을 걷는 나 자신도 필요하다. 경험이라는 이정표가 비춰주는 생각이라는 길은 때론 캄캄한 어둠이 내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기 일쑤다. 이를테면 도저히 앞날이나 지금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경험을 겪었을 때, 혹은 생각의 여력이 없을 만큼 다양한 경험을 쏟아지듯 겪게 됐을 때. 어린 나는 압도적인 경험 앞에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캄캄한 밤길을 헤매듯 헤짚으며 걸을 뿐이었다. 열네 살의 일도, 열아홉 살의 일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럴 땐 가로등을 켜면 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길을 비춰볼 수 있는 불빛. 내게도 가로등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아주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내게 가로등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안 것은 스물다섯 살 때였다. 사랑하는 삶 2편의 주인공이 아팠을 때. 그는 군 복무 말년에 조울증을 크게 앓았다. 망상과 환청이 동반된 극조증이 그를 찾아왔다. 완전히 바뀌어버린 그. 내가 알던 그가 아니었다. 마지막 외박에서 그런 그의 상태를 처음으로 인지했다. 군 간부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그의 삼촌과 함께 그를 입원시키고, 입원 기간 내내 편지를 쓰고 면회 가고, 제대해서는 병원 예약일까지 한 달가량을 그와 24시간 붙어있었다. 직계가족이 없던 그에게 나는 유일한 보호자였고, 조증이 와서 잠을 못 자는 그와 함께 밤새 밤거리를 걷거나 끊임없이 떠드는 그의 말을 들어주는 역할이 내게 주어졌다. 스물다섯 살의 내가 감당하기는 꽤 힘든 경험이었다.
무엇 하나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압도적인 상황 앞에서 나는 하나만 붙들고 버티고 또 버텨나가며 할 수 있는 걸 했다. 그를 사랑한다는 간절한 마음. 그 감정. 그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 어떻게든 할 수 있는 걸 다 해내고 싶은 그 간절한 마음. 나의 가로등은 나의 감정, 나의 마음이었다. 가로등에 의지한 채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냈다. 부대에 상황을 알리고 삼촌에게 전화를 걸고, 조울증에 대해 닥치는 대로 공부했다. 매일 편지를 쓰고, 직계가족이 아닌 내가 면회 갈 수 있도록 부대에 허락을 구하고 그의 망상에 배운 대로 최대한 대응했다. 나를 생각하게 한 것은 내 감정이었고, 그를 향한 마음이었다.
마음과 생각은 별개의 것처럼 생각되기 쉽다. 실제로 그 둘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둘은 분명한 연관이 있다. 마음이 생각을 이끌고 생각이 마음을 이끈다는 것. 나는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만한 경험일 때에는 생각이 마음을 이끄는 편이었다. 생각이 먼저 찾아오고 그를 통해 감정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생각과 감정을 통합했다. 그러나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운 경우에는 내 마음속에 드는 하나의 감정, 혹은 둘 이상의 감정을 통해 생각에 접근해야 했다. 경험이 감당하기 어려울수록 그러했다. 마음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목표를 향해 생각이라는 지도로 항해하는 느낌이었다.
마음과 감정은 저평가되고 있다. 합리적인 인간, 이성적인 인간상을 추구하는 것. 우리는 여전히 감정을 쓰는 것에 인색하다. 긍정적 감정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권유되고 있지만, 부정적 감정은 그렇지 않다. 외로움, 우울함, 슬픔 등의 부적 감정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지양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 때문에 부정적 감정이 들 때는 자신을 그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시도하기 쉽다. 그러나 감정은 곧 자아와 연결되기에 나 자신과 떼어 놓을 수 없다. 감정이란 ‘나’라는 존재가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압도적인 경험 앞에서 ‘나’를 느껴야 했다. 나를 느끼고 그 느낌을 따라 걸어가야 했다. 그래야만 나를 위한 판단이 가능하기에. 스물다섯 살 이전까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스물다섯 살 때는 조금 달랐다.
스물다섯 살의 나는 무엇을 느꼈을까. 사랑하는 마음, 간절함, 두려움, 무력감, 분노, 우울감……. 둘 이상의 수많은 감정이 나를 덮쳤다. 감정 소모라는 말이 있다. 불필요한 감정은 소모일 뿐이라는 말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필요에 따라 감정이 구분되고 버려져야 하는 것이라면 저 감정들 중 부적 감정들은 내게 쓸모가 없었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그 모든 감정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무력감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 짓게 해 줬고, 상황에 대한 분노는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줬다. 우울감은 내가 나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을 내게 가져다줬다. 온전히 주관적으로 나의 감정을 바라보고 알아채고 판단하고 사용한 결과였다.
감정은 삶이 그렇듯 사랑이 그렇듯, 주관적이다. 순간적이고, 즉각적이고, 나 자신의 것. 감정은 누가 알려줄 수 없다. 오직 자기 자신만 알아챌 수 있다. 그 때문에 무시되고 경시되기 쉬운 게 감정이기도 하다. 자아가 분명하지 못한 사회,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개인이 사라진 사회. ‘나’라는 존재가 사라진 세상. 어쩌면 개인은, ‘나’는 감정과 의식과 사랑과 삶처럼 주관적인 것들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라는 지도를 비춰줄 가로등은, 그 사이를 걷는 ‘나’는 살아 숨 쉬고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만 주도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생각하며 판단해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이 사회는 개인이 그런 삶을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조각조각 파편화된 개인. 우리를 비추는 수많은 깨진 거울들. 여성, 인종, 나이 등의 사회적 거울들부터 내향적, 삶의 방향성 등의 내면적 거울들까지. 너무나도 많은 거울이 우리를 비추고 있고 그 거울들은 우리를 낱낱이 검열한다. 그 안의 빛나는 ‘나’를 보이지 않게 한다. 내가 나로서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한다. 물론 그 거울들을 보는 주체가 ‘나’라면, 그래서 그 거울들의 모습을 통합할 수 있다면 무척이나 좋겠지만 ‘나’의 존재가 부정되는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사회에서의 ‘나’는 실종된 지 오래다. 타인의 시선과 제시되는 기준들, 권장되는 개인의 특징과 그렇지 않은 특징들, 그리고 그에 의한 차별은 이미 만연하다.
나의 감정을 판단하고 이용할 수 있는 주체는 오직 나지만, 어떤 감정은 부정적인 것으로, 어떤 감정은 긍정적인 것으로 판단하는 사회에서는 이조차도 불가능한 일이다. 지워내라고, 숨기라고 강요하는 감정들은 그대로 갈 길을 잃고 내면을 헤맨다. 스물다섯의 내가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상태였다면 나는 마음껏 우울해하고 마음껏 무력감을 느끼고 마음껏 슬퍼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할 수 있었을까. 이 사회가 개인의 부적 감정을 알아주길 바라는 게 아니다. 이 사회가 굴러가게끔 하는 것에 앞서 개인이 먼저 존중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존중에 대한 문제. 생각과 감정에 대한 존중. 모두에게 모두의 가로등이 있고 지도가 있고 그 길을 걷는 ‘나’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 잊어버리기 쉽지만 잊어버리지 않으려 해야 하는 사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끊임없이 되뇌어야 하는 사실. 내겐 ‘나’의 감정이 있고 ‘나’의 생각이 있으며 ‘나’의 삶이 있다는 것. 내 삶을 항해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것. 죽은 친구의 마지막 일기장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인생의 키는 내가 쥐었다. 바다는 오르고 내리고 성났다가 잠잠했다가. 바다야 난 너와 나를 이해해. 한 몸으로 다 같이 항해하자.’ 모두에겐 바다가 있고 그 바다를 항해하는 것은 온전히 그 개인의 몫이라는 것을 그 친구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에겐 우리의 바다가 있다. 그리고 그 바다를 항해할 지도도 이미 펼쳐져 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길을 비추고 그 길을 걷는 ‘나’를 느끼는 것일 것이다. 삶을 걸어 나가는 ‘나’를 느끼며 살아가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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