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파종 999 ( Seeding of light 999) 나무에 아크릴, 각각 3×23㎝ 999개 1997년 조용히 생각을 고르고 글을 쓰려고 해도 마음은 시끄럽다. 웹진에 쓰는 원고도 두 번 연속 마감을 미뤘다. 원고를 미루는 동안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던 몇몇 작가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자신의 작업을 페미니즘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실망스러웠고 씁쓸했다. 남성중심 사회에 대한 내 분노가 혹시 내가 가진 피해의식은 아닌지 검열했고, 여성에게 더 실망하는 내가 페미니스트답지 못하다고 책망했다. 나는 더 이상 페미니즘을 모르던 시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데 매일매일 전쟁 같은 젠더 이슈는 숨이 가빴다. 올해 더위는 유난히 흉폭하고 습기 품은 여름은 더욱 느리게 흐른다. 나는 늘 여성들 속에 있..
윤석남의 , 1995년 작. 삼십대 초반, 한창 첫 그림책 작업을 하던 나는 정오 무렵, 영화를 보러 갔다. 평범한 일상을 살던 주부가 견딜 수 없는 불안과 우울 속에 아이를 맡기고 혼자 호텔로 가서 약을 삼킨다. 호텔 침대 위에 누운 여자와 온 방에 차오르던 물, 그 속에 고요히 누워있던 여자의 이미지가 지금도 또렷하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맡길 아이도 없는 나였지만 그녀가 왜 그러는지 그냥 알 것 같았다. 당시 작업 중이던 그림책의 출간은 미정이었고, 밤마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문득 문득 이게 허망한 짓은 아닌지 자주 의심했다. 내게 재능은 있는지, 그림이 밥벌이가 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면서도 작업을 놓지 못했다. 나는 존재 증명에 목마른 애처로운 삼십대였다. 영화는 인기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작년에 여러 예술 활동을 하면서 한 단체의 달력 작업을 했다. 7,80년대 국가폭력 피해자분들을 지원하는 단체였는데 그곳에서 70년대 노동 운동을 했던 여성 노동자들을 만났다. 그 분들과 함께 예술 워크숍을 하고 그 과정을 그림으로 그려 달력으로 제작했다. 장년의 여성노동자분들을 그리면서 인물 주위로 꽃을 그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멈칫했다. 꽃이 여성을 비하하는 진부한 클리세임을 모르지 않는 내가 꽃을 그리다니! 놀라웠다. 그러다가 알아차렸다. 이제야 나는 나의 과거와 조금씩 화해하고 있다는 걸. 내게 꽃은 더 이상 여성을 비하하는 상징이 아니었다. 십대의 여성노동자에서 장년의 여성노동자로 살아온 시간의 상징이었고 꽃을 피워내듯 삶을 피운 그분들을 정성을 다해 그리고 싶은 내 마음의 소박한 표현이었다..
Les Grappes de raisins - 포도송이 1930년 L'arbre de vie – 생명나무 1928년 성경에 나오는 를 제목으로 하는 그림 자신의 그림 앞에서 세라핀 루이 세라핀 루이, 그를 나는 영화로 알게 되었다. 시골마을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여자가 신의 계시로 그림을 그리다가 정신병원에서 죽었다는 간략한 이야기의 영화였다. 마음이 갔지만 보지는 않았다. 차마 대면하기가 두려웠다. 그 무렵 나는 마흔이었고 경력은 미천하고 미래는 막막했다. 홀로 하는 작업은 뜻대로 되지 않았고 그림 그리는 것은 당연히 돈이 되지 않았다. 밤마다 구직 사이트의 청소나 서빙 알바를 체크하며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를 상상하곤 했다. 몇 차례 그림책 기획이 엎어지면서 나는 자주 불안했고 밥이 되지 못하는 그림을..
작업실에서 나혜석의 모습, 1932년 추정, 개인 소장. (사진 제공=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내가 처음 접한 그림 그리는 여자는 나혜석이었다. 풍문 속의 모던 걸 나혜석은 변호사이자 외교관인 남성과 결혼했고 남편친구와 연애를 했으며 그리고 이혼했다. 그의 그림보다 세상이 수군거린 그의 사생활을 먼저 알았다. 불륜의 대명사, 정조 잃은 여자 나혜석을 좋아하지 않았다. 기왕지사 남편 몰래 연애할 거, 입 무겁고 괜찮은 남자랑 연애할 것이지, 찌질하게 소문이나 내고 다니는 남자랑 연애하다니, 안목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혜석의 그림 역시 별 감흥이 없었다. 일제 강점기 부유한 집안에서 아버지와 오빠의 사랑 속에 성장하고 오빠의 권유로 미술을 선택했을 뿐, 그 선택이 자신의 의지라는 언설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