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분치 인생 구두 신고 다니던 대장군고무신 신는 이와 만나장화 신고 논에 들어가다 하기 싫은 건 손도 대지 않던 대장군바깥에 나갈 때 허락을 받고 나가다 술과 사람을 좋아하던 대장군매일 밤 숨어 마시게 되다손에 물도 안 묻혔던 대장군여섯 집의 김장과 하루에 열 번 밥상 차리느라물 마를 새 없어지다 너는 결혼하지 말아라학교에 가 내 삶도 네 삶도 공부해라 나는 대장군을 찢었다 뒤꿈치부터 머리털 끝까지 그녀의 피땀을 먹고 자라그녀를 증오했다그보다 더 증오했다가까운 만큼눈물지어지는 만큼 더 증오하고닮을까봐 더 증오했다 혼자 있어도 어깨가 무거웠다털어내기도 하고 도망치기도 하고모른 척한다고 몰라지는 게 아니어서아직도 왼쪽 어깨에 내 인생 1인분오른쪽에 대장군 1인분 한 걸음 내딛기 무섭게발이 푹 푹 몸이 점점..
그냥 그런 줄 알았지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비를 맞으며손바닥으로 걷는 것이 익숙해그냥 그런 줄 알았지 피가 거꾸로 흘러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때눈구멍으로 피를 토하면서그렇게 세상이 검붉게 물들어도그냥 그런 줄 알았지 똥구멍으로 아이를 낳고발가락을 쪽쪽 물리며 아이를 기르고머리카락으로 목을 졸라 죽여도 그래도 되는 줄 알았지그냥 그런 줄 알았지 시인 홍지연이 말합니다. 소리치지 않아도 들릴 때까지 작은 목소리로 얘기할게요.
애도는 사랑하는 도路 나는 형체 없는 공기, 캐스퍼 같은 유령으로저녁녘에 모락모락 연기 피어오르는 집집마다 있어요우리네들 엄마, 자매, 이모, 고모, 할머니한테 가서 물어봐요날 창조한 이의 영혼이 아직 날 놓지 않고 필요로 하는 한, 그 눈앞에 모습을 비추죠그리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날 붙잡지 않고 내려놓아서로 하늘처럼 자유로울 수도 있답니다 멋들어지게 우거진 숲 아래, 보배로운 보석 대지 어딘가의 안쪽, 거기 난 통로로 거슬러 올라가면 펼쳐지는 동굴 궁전창조자는 자신 안에 이것들을 힘으로 지녔죠난 그의 의식 저편,빙산의 몸통, 수면 아래 잠긴 웅장한 부분에 살죠한 때 그가 뱃속의 물로 나를 에워싸 품었었죠나는 형상으로 특정할 수 없어요, 어떠한 기운이나 바람 같죠오직 특별한 경우에만, 창조주의 의식..
형법 제269조 나는 무엇도 죽이지 않았다. 나는 나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무엇도 죽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나를 살리고 싶었다. 나는 무엇도 지우지 않았다. 그것은 심장 속에 존재했다.잊혀지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시인 '강윤지'는페미니즘적 실천을 하며 살고 싶은 연극쟁이.
맨스플레인 구멍이 되려고 태어나신다소리 나는 구멍이 되려고조였다 풀었다 소리 나는 구멍이부드럽고 미끄럽게 조였다 풀었다 제대로 죽여주겠다는 막대기를 오르내리며바늘머리를 빼닮은 신념들이 ‘제대로’라는 오버사이즈를 걸치고허락 없이 자꾸만 흘러 들어와서 구멍이 되려고 태어나신 구멍은간지러워 죽는다 구멍이 되려고 태어나신 구멍은 도리가 없다생으로부터 돌아서신다 죽음으로 생을 벅벅 긁으며죽음이 낫구나,죽음은 이렇게 시원하구나! 시인 '희음'은 말합니다. 이따금 시인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나의 시는 그들에게 들리지 않았어요.나의 목소리를 의심했지만, 이제 나는 내가 아닌 세계를 의심하기로. 처음부터 다시 씁니다. 가깝고 먼 곳에서 경련하는 귀를 봅니다.
너는 내 운명 너는 말했어 나만이 너를 채울 수 있다고 나는 부드러운 살점을 내줬지 너는 말했어 나만이 너를 위로할 수 있다고 나는 선홍빛 심장을 내줬어 내 눈에 빠지고 싶다고 말해서 두 눈알을 파내 네 손에 쥐어줬어 내 귀에 속삭이는 캔디 같은 사랑해 마음에 밀랍을 부었어 너를 위해서만 내 모든 것을 쓰게 한 너는 내 운명 헤어지자 한 마디에 하얗게 얼어버린 연탄덩이 내 머리통에 갈긴 너 사랑하지 않아 한 마디에 국가대표급 이단옆차기로 나를 날려버린 너 시선을 돌릴 때마다 내 머리카락 뜯고 잘라버린 너 다른 운명을 향해 나아갈 때마다 찢기고 멍들었던 내 몸의 주인인 너는 내 운명, 너는 내 운명? 한 세기를 지나니 산더미처럼 쌓인 엿 같은 운명들 엿가락처럼 늘여 엿가위로 뚝뚝 끊어 먹고 핥아 먹고 다 ..
살기 나는 내가 여자인 줄 몰랐다착하게 자라야 한다고 해서착한 척하는 아이에서 더 못 자랐을 뿐 여자가 나대면 안 돼적당히 해여잔 남자를 잘 만나야지너는 비정상이야 아무 것에도 화낼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산 적이 없어서 몰랐지몇 인간만이 아니라세상이 온통원래 그렇다고? 다 그렇게 산다고? 일반화 하지 마불편해서 어떻게 살아예민해서 일상생활 가능해? 뭐가 이렇지?온통 잿더미 속의 나재를 먹고도살아남으려면 싸워야겠다 나까지 그렇게 살라고?치렁치렁 인형 옷을 찢어버릴래긴 머리털을 다 뽑아버릴래매끈한 다리를 꺾어버릴래 나는 살기가 필요해나는 내 살기를 원해 시인 '채은'은 외자 이름 아닙니다. 내 언어를 갖고 싶어 시를 썼습니다. 인생 목표는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 현재는 천방지축 삽니다. 인류애를..
자궁에 핀 라플레시아 “그럼 앞으로 우리 섹스 못하는 거야?” 카페 안으로 울려퍼지는 너의 목소리가 나의 이곳저곳을 베어 먹는다 이틀 전, 자궁에 크고 붉은 라플레시아들이 마구잡이로 피었다는 진단을 받았고 그 사실을 너에게 막 말한 참이었다 베어 먹힌 나는 절반의 미소만 지을 줄 알고 너는 그런 내가 추해서 견딜 수 없다고 지껄인다 점점 커지는 너의 목소리에 금이 간 유리잔은 이내 터질 것만 같지만 사람들은 투명한 손으로 눈을 가릴 뿐이다 돌연 자궁에 핀 라플레시아들이 부들부들 경련하기 시작하고 나는 아랫배를 꽉 움켜쥔다 하지만 움켜쥐면 움켜쥘수록 라플레시아들이 피워 올리는 분노는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나를 노려보는 너는 상한 흙더미 속에서 썩어가는 수박 씨앗 같다 마침내 산산조각 난 유리잔을 ..
손이 여덟 개인 여신과 나눈 대화 어느 먼 나라 힌두교 대사원 앞에서 호랑이 탄 여신이 나를 불러 세웠습니다.여신의 손 여덟 개에서 삼지창과 칼, 활과 화살이 번뜩였습니다. “내가 못해도 너보다 광년은 더 살았을 거야. 편하게 말할게.손이 모자라? 몇 개 더 있었으면 좋겠어?“ “누구 좋으라고 일손을 더 늘려주겠어요.” “여자 인간들이 손을 쓰는 용도는 대체로 너그러워. 한국도 그렇지.내 자랑을 좀 하면, 난 악마를 천 개의 팔로 찢어버렸다고.“ “그건 당신이 태초에 신들의 분노로 태어났기 때문 아닌가요?대부분의 여자는 그렇게 강하지 못해요.오죽하면 참는 게 미덕이라는 말이 생겼겠어요.당신도 조금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당신 남편인 시바신이 파괴의 신이라고 하던데,당신이 강하다고는 해도, 그를 화나게..
모든 숫자는 영으로 수렴된다- 소설가 천희란에게 부치는 편지 있잖아 내가 요 며칠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8은 너무 오만해 9는 너무 완벽하고 그럼 3은? 3은 좀 다정한 것 같아 4는 깍쟁이고 2는 자기밖에 몰라 5는 완전 맹탕이고 6은 좀… 뒤가 구리지 1은 정말이지 내가 참 할 말이 많은데 너무 순수해서 피곤해 0은 어떤데? 0은, 0은 늘 차분하지 1부터 9까지 모두 0의 이해를 바탕으로 그렇게들 설치는 거야 0은 그들의 모자란 부분들을 모두 감안해주고 조용히 입을 다물지 0은 그런 사람이야 0은 검지를 인중에 가져가던 첫 손짓이고 시를 쓰고자 마음먹었던 그때 그 시간이자 모든 일이 지나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 노랗게 마른 들판을 홀로 서있는 사람 그런 사람 하나쯤 있어야 세상은 어딘가 비빌 언덕이라..
점 정수 시야를 가득 채운 여백그 위를 어슬렁대던 문자들이 점 점 작아지더니 흔적도 없다.거기에 무언가 있었는지 대부분 알지 못한다. 내가 어떤 문장이었던 적은 있을까.귓바퀴 구석구석을 멤도는 들리지 않는 메아리.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그것은 내 타고난 천직이다. 나는 거대하다.네 눈에 온전히 담기엔 한없이 펼쳐진 커다란 여백네가 찢고 때 묻힌 커다란 흔적은 내 코에 작게 붙어있는 점애잔하게 안겨 있던 그 점은 점 점 작아지더니 흔적도 없다. 시인 '정수'는, 그림을 그리고 사부작거리며 시도 씁니다. 나를 피폐한 동굴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한 모든 것들.기다려요.지금 죽이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