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감 - “엄마는?” - “포도 전지하러 가셨어요.” - “너도 도와드려야지!” 어렸을 때부터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듣고 또 들으며 자란 말은, “엄마 도와드려야지.”, “엄마한테 효도해야지.”라는 말이다. 어릴 때는 부모님의 일을 도와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이 특히, 엄마가 우리를 위해 밤낮으로 애쓰시는 것에 대해 감사함뿐만 아니라 ‘미안함’이 상당했다. 야간일 나가시는 엄마를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해 드리고, 엄마가 퇴근 후 새벽에 공장 청소를 나가시면 그 청소도 도우고, 엄마를 생각해서 마을의 어른들에게도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우리를 위해 밤낮없이 고생하시는 엄마를 생각하면 종일 잠을 자거나, 게으름을 피울 때 ‘엄마는 우리를 위해 애쓰시는데…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싶..
깨달음 입춘이 지났다.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하기 위해서 땅도 갈고, 무엇보다 포도나무 전지를 해줘야 하는 시기이다. 엄마는 전지를 위해 회사에 3일 휴가를 내셨다. 그러나 정작 한 나무도 전지하지 못한 채, 휴가는 끝이 나고 말았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처럼, 엄마에게는 자식이 넷이나 있어서인지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일이 많다. 큰언니는 어린 나이에 결혼해 출산과 양육을 감당하다가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작년 봄에 갑작스레 아빠가 돌아가셔서 큰언니에게 소홀했더니, 최근 정도가 심각해져 엄마와 나는 시시때때로 서울을 오가며 조카들을 돌볼 수밖에 없었다. 개미처럼 살면 늙어서도 개미처럼 일하고, 베짱이처럼 살면 늙어서 노래 교실 다니는 거라고 누군가 그랬다. 할머니는 개미였고, 아빠는 ..
딸의 다짐 “엄마, 나는 앞으로 명절에 외가에 가지 않을 거야.” 우리는 친가의 식구들이 없다. 조부모께서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셨는데, 곧 우리 아빠와 고모다. 할아버지는 30년 전에, 할머니는 재작년 여름에, 아빠는 작년 봄에 떠나셨고, 고모는 평생 아들만 챙기던 식구들에게 상처를 받아 연을 끊은 지 20년이 다 되어 간다. 반면에 외가는 딸 다섯, 아들 하나다. 외가 역시 그 잘난 아들 하나 얻자고 육 남매를 낳으셨다. 이모들은 대부분 어린 나이에 결혼으로 출가를 이루고, 팔순이 된 외할머니는 어느덧 중년이 된 막내아들을 여전히 각별하게 생각하신다. 명절이 되면 육 남매와 다섯 이모부, 그리고 12명의 사촌이 모이는데 그야말로 명절 분위기가 난다. 명절 때마다 서울 외가에 가면 무언가 늘 불편했다..
생각의 전환 지난 10월부터 1월까지, 총 14주 동안 매주 쓰던 글을 격주로 연재하게 되었다. 겨울이 되어 농한기에 접어들며 농사일이 한산해진 때문이기도 하고, 새해가 되며 새롭게 시작된 두 가지의 일에 적응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나누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연재 날짜가 길어진 만큼 긴 호흡을 가지고 글을 쓰리라 다짐하며, ‘리얼 포레스트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리얼 포레스트’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따왔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취업 준비를 하던 주인공 김태리는 “배가 고파서” 시골에 내려간다. 각자의 사정으로 그러나 모두 도시 생활에 지쳐 시골로 내려온 고향 친구들과 일상을 함께하며, 조금씩 자신만의 방식과 속도로 삶을 이해해가는 과정이 그려진 영화다. 그럼 나는? 나는..
두 개의 엄지손가락 ▲빨래판으로 만든 최정화 작가의 '늙은 꽃' “술래잡기할 사람 여기여기 모여라” “나도 할 거야. 근데 조이 손가락 말고 다른 손가락 잡을래. 조이 손가락은 무서워.” 엄마들은 뱃속에서 열 달 품던 아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 출산의 고통도 잊은 채 핏덩이 같은 모습을 하곤 우는 아이의 얼굴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아이가 어디 아픈 데는 없나 걱정하기도 하고, 눈코입은 누구를 닮았나 살피기도 하며 정말 콩알만 한 손가락 발가락이 열 개씩 잘 달려있나 세어 보기도 한다. 참 멋지고 설레는 순간이다. 우리 엄마는 나를 낳고서 이 멋지고 설레는 순간을 두려움과 미안함, 걱정으로 마주했다. 내게는 열 개의 발가락과 열 한 개의 손가락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하나가 아닌 두..
뜻하지 않은 연이은 한파에 결국 수도가 얼고 말았다. 날이 상당히 추울 때는 수도꼭지에서 한 방울씩 물이 떨어지게 틀어둬야 한다는 것을 엄마도 동생도, 나도 그 누구도 유념해두지 못했다. 한량 같던 아빠는 집 안 구석구석을 손보지는 못했지만, 유지 정도의 관리는 해 오셨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맞는 겨울에 그 빈자리가 더욱 실감 난다. “여보세요? 어머님, 아침부터 죄송해요. 집에 수도가 얼어서… 혹시 설비 잘하는 데 아세요?” 수도가 얼어버린 곳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채 온종일 씨름하고 가신 설비 아저씨를 겪고 결국 친구 어머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아이고, 진작 말하지. 알았어, 지금 아저씨 가시라고 할게.” 실은 친구 아버지도 설비 일을 하신다. 처음부터 도움을 요청할까 싶었지만 어려운 이..
그때는 미처 몰랐던 것들 동지를 앞두고 마을에서는 대동회가 열렸다. 2018년도의 임기를 지낸 이장님의 수고를 헤아리고 2019년도의 이장과 부녀회장이 선출되는 자리였다. 이장님은 면사무소에서 전달되는 소식들을 마을에 전해주고 처리하고, 이렇게 해마다 열리는 대동회에서 마을 식구들에게 식사도 대접하고,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에 관여하며, 이웃 마을의 이장들과 협업해서 지역사회의 일을 하기도 한다. 살아생전 한량이시던 아빠는 이장씩이나 할 위인은 못 되었지만, 마을에서 젊은 남성에 속했고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어 그것만으로 반장이라는 직책을 얻었다. 어릴 때는 세금 고지서 따위가 면사무소를 통해 이장에게 전해지고 마을의 반장이던 우리 집에 전해졌다. 그럼 저녁을 먹고 아빠와 언니들과 나는 마을을 한 바퀴..
예년보다 따뜻했던 초겨울 날씨가 이어지다가 대설이 지나자 꽤 추워졌다. 비로소 겨울이 실감 난다. 이제 아침저녁으로 추위에 대비하는 일만 남았다. 날이 추워져서 들판 일은 거의 없다. 그야말로 농한기에 들어선 것이다. 많아진 시간 덕에 요즘에는 조금씩 요리를 한다. 지난주 글에 첨부했던 소고기뭇국이 그 예다. 야간에 일 다니시는 엄마는 아침 8시쯤 귀가하셔서 주무시고 오후 세 시 반쯤 식사 하신다. 엄마에겐 점심도 저녁도 아닌 그 시간에 하는 식사가 아침이기에 되도록 챙겨드리려 애쓴다. 회사에서 자정에 보통사람들의 점심 같은 식사를 하시는데 엄마는 밖에서 잘 먹는다며 집에서는 매번 대충 챙겨 드신다. 건강한 음식을 먹는 것은 약간의 당뇨와 혈압이 있는 엄마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고, 딸의 입장에서도 엄마의..
‘엄마’. 태어나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말. 어쩌면 평생 가장 많이 내뱉는 말. 해를 거듭할수록 무겁게 느껴지는 말.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말. 존경하는 만큼 미안하고 고맙고 또 미안해지는 말. … 사랑하지만 좋아함에는 자신 없는 말. 내게 엄마(그리고 아빠도)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같‘았’다. 그렇게 느‘꼈던’데는 여러 서사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22살의 일이다. “엄마야. 아빠가 일하다 갈비뼈 세 개가 부러졌어. 그래서 지금 입원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히 좀 말해봐.” “공사 현장 나갔는데 기계가 아빠를 못 보고 쳤나 봐.” “하… 산재는?” “산재는 안 해주는데 현찰로 사백만 원 준데.” “엄마, 그게 말이 돼?! 사람이 갈비뼈가 세 개나 부러졌는데 사백만..
마을 어르신이 돌아가셔서 엄마를 대신해 장례식에 다녀왔다. 집에서 시내까지 마을버스를 타고, 시내에서 한 번 더 갈아타야 장례식장이 있다. 도착해서 조문하고 조문객들과 인사하다 보면 두어 시간은 금세 지난다. 그리고 또다시 두 번의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 반나절은 거뜬히 지날 것이다. 엄마가 이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취침 시간을 잃을 것이 뻔하다. 그래서 비교적 시간이 많고 운전도 할 수 있는 내가 엄마를 대신해서 장례식장에 다녀오게 되었다. 그 장례식장은 작년 여름에 할머니를, 그리고 지난봄에 아빠를 떠나보냈던 장소다. 서울이든 수원이든 외지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외길인데, 장례식장은 그 길목에 위치해있다. 장례식장이 위치한 언덕을 지날 때마다 작년 여름 할머니 장례를 마치고 추적추적 내리던..
어릴 적만 해도 동네마다 구멍가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모두 다 문을 닫고 한곳만 남았다. 그마저 남은 한 곳도 제 역할을 해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 집의 경우에도 10분 거리에 있는 시내의 큰 마트에서 장을 보거나 인터넷 거래를 애용하지 그 구멍가게에서는 과자 한 봉지도 구매하지 않게 된다. 이는 우리 집뿐만 아니라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자가용이나 마을버스 등의 교통은 편리해지고 자연스레 구멍가게의 소비자가 감소하게 되었다. 소비자가 떠나니 구멍가게의 진열대도 해를 거듭할수록 초라해져 마침내 담배가 주력상품이 된 것이다. 자본주의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어디 구멍가게뿐이겠는가. 우리 동네는 예로부터 ‘탯마당’ 혹은 ‘떼지거리’라 불렸다. 전자는 타작을 많이 하는 동..
마을 자투리땅의 풀을 보면 그 마을 사람들의 연배를 가늠할 수 있다. 어릴 적에는 집집마다 마당에 정원도 제법 가꾸고, 누구나 논둑이나 밭둑에도 콩을 심었으며, 길가에 많은 꽃도 심어져 있었고, 마을 귀퉁이마다 은행나무나 앵두나무, 살구나무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석류나무부터 해서 이름 모를 꽃들로 정원을 가득 채우셨던 이웃집 할머니 할아버지는 십여 년 전에 떠나셨고, 늘 기운차 보였던 옆집 할머니도 허물어지는 정원의 울타리에 그저 작대기를 세워둘 뿐 재정비하기 어려우실 정도로 늙으셨다. 함께 뛰놀던 또래들도 다들 이 마을을 떠났다. 우리 집만 해도 세 딸 모두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이 마을을 나서게 되었다. 젊은이들은 도시로 나가고 이곳에 삶의 터전을 이룩한 분들만 남아 가까스로 마을을 유지하고 있다..
벌써 입동이다. 다가오는 겨울을 맞이할 준비와 끝자락인 가을을 보내느라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가을걷이를 마치면 좀 한가할 줄 알았는데 큰 착각이었다. 일단은 김장 준비를 위해 여름 내 공들여 말린 고추를 가루로 빻았다. 고추를 이백 주 심었는데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갔다. 따서 옮기고, 통째로 며칠 말리고, 닦아 가위로 자르고, 햇볕에 말리되 타지 않도록 지나친 직사광선은 피해줘야 하고, 밤낮으로 비와 이슬을 살피며 거둬들이고 또다시 널기를 고추가 바싹 마를 때까지 반복하여야 한다. 가뭄으로 고추 농사가 어려웠기에 올해는 평년보다 고추 값이 좋았다. 본격적인 수확에 들어가기 전에는 호기롭게 내년에는 오백 주 심자고 엄마에게 제안했는데, 고추 손질을 한차례 마친 뒤에는 삼백 주 이상은 꿈도 꾸지 말자고..
종교의 영향이 큰데 ‘사랑’에 대해 많이 고민한다. 지난 번 글에서 엄마처럼 나도 나의 애정이 향하는 곳을 찾아야겠다고 했는데 슬프게도 어쩌면 그동안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인생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나 자신을 사랑하기’, 요즘 이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실천하려 애쓴다. 누군가 ‘종교란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멋진 말을 들려준 적이 있다. 인생의 한 치 앞도 알기 어려운 인간이 신을 알아가고 이해한다는 것은 꽤나 경솔하니, 종교를 통해 그저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이해해 간다면 그것으로 종교의 역할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참 솔직하고 겸손한 태도가 맘에 든다.(집 앞의 단풍) 편안함, 만족함, 뿌듯함, 기쁨, 희열, 성취..
“많이 변했어요. 전에는 굉장히 바쁘게, 열심히 살았던 것 같은데... 오해는 마세요, 나쁘게 변했다는 게 아니에요. 그렇다고 요즘은 열심히 안 산다는 게 아니고... 뭐랄까, 느낌이 변했어요, 여유로워졌달까?” 요즘 들어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주위 사람들뿐 아니라 스스로도 이 미묘한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변화가 익숙하지 않아서 간혹 멀미하는 듯한 느낌이지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매주 한 번씩 서울에 가는데, 언젠가부터 모임 사람들과 꼭 만나고 싶은 사람들만 만난다. 이것이 시골 생활의 큰 장점 중 하나라 생각되는데, 바로 ‘허수의 인간관계’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다. 서울에 짧은 시간 머물다 보니 그 만남이 즐겁고 반가운 사람들 위주로 마주하게 되고 자연스레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났다..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 더위도 아침저녁의 찬 공기에 한 발 물러난 계절이 되었다. 어느덧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농작물이 서리를 맞으면 냉해를 입을 수 있어 그전에 수확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들깨를 털고 고구마를 캐며 꽤 바쁜 한 주를 보냈다. 유난했던 가뭄과 벌레가 파먹은 덕에 그 수확량은 보잘것없지만 들깨를 베는 노동은 참 행복한 일이다. 특히 들깨의 고소한 내음을 깊이 들어 마시며 그 향기를 음미하는 것은 일 년 중 지금만 가능한 아름다운 경험이다. 들깨는 6월 정도에 파종하여 7월에 모종을 심는 것 말고는 크게 손이 가지 않는 작물이다. 집 근처에 심어두고 깻잎을 따 먹는 재미가 쏠쏠하고 들기름, 들깨가루, 깻잎 반찬 등 그 활용도 여러 가지다. 특히 입맛 없을 때는 깻잎을 간장..
“엄마는 나의 노력과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지난주에 엄마와 싸우며 엄마에게 내뱉은 말이다. 아니 어쩌면 싸웠다기보다 내가 일방적으로 화를 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늘 이런 식이다. 나의 평생에 기억되는 엄마는 늘 자식한테 헌신적이고 져주고 참아주는 사람이다. 이러한 엄마가 답답하고 싫었다. 논리와 기로 자식을 이기는 엄마, 훈육하는 엄마를 바랐다. 사람이란 늘 남의 떡이 커 보이고 가진 것에 만족하기보다 가지지 못한 것에 안달을 내는 법이라는 것을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착한 엄마를 두고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통해 실감한다. 가족이란 생사만 알고 있고 자주 왕래하지 않을수록 서로 행복할 수 있는 법이라고 늘 주위 사람들에게 말해왔다. 그러한 가족, 그중에서도 엄마와 한 지붕 아래 살고 ..
가을이 되면 달콤한 포도 향기가 가득한 동네, 마을버스 운전기사님에게도 포도가 쥐어지는 동네. 바로 내가 나고 자란 동네다. 누구의 고향이 다 그렇겠지만 내게도 고향은 참 많은 추억과 갈등이 서린 곳이다. 유치원 하원 길에 활짝 핀 수선화를 마주했던 어느 날에는 꽃을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주저앉아 꽃에 다가가다가 팔이 똑 하고 부러졌다. 수선화의 노오란 색감과 향긋한 꽃 내가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롭던지. 팔이 부러졌는데도 꽃이 좋아서 울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춘기 시절의 내겐 내 방도 없고, 자가용도 없는 우리 집이 너무 부끄럽고 싫었다. 사람이 가진 생각이 서로 다 다르듯 사는 모습도 같을 수 없다는 것을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대학 진학으로 고향을 떠나게 되었고 마음이 따뜻했지만,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