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두 달이 넘는 시간을 꼬박 매달렸건만, 일정은 꼬이기 일쑤였고, 일정이 맞아떨어지면 관계가 꼬였다. 박여사와 수미씨와의 말다툼으로 분위기는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덕기 아줌마가 일찍 도착해 회의실 중앙에 보따리를 풀었다. 매번 음식 싸오는 사람은 덕기 아줌마 밖에 없었다. 덕기 아줌마의 혼합잡곡 때매 난리가 났다지만, 정작 아줌마의 수제 깨강정 맛은 일품이었다. 오도독 오도독. 회의실에는 고소한 깨강정 소리만 가득했다. 곧이어 박 여사가 들어와 “아이고. 솜씨도 좋아 맨날 이게 뭐람” 하며 깨강정을 한웅큼 집어들었다. 위층에서는 오전 에어로빅 수업이 시작되는 모양이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가 계단을 타고, 벽을 타고 우리에게까지 울리기 시작했다. “좋을 때다. 관절 성할 ..
시끌벅적한 설명회가 끝난 뒤 일주일. 벽화봉사단은 지지부진한 회의와 소모적인 다툼으로 꽉 찬 시간을 보냈다. 봉사단 인원의 상당수가 설명회 전, 심선생의 공공미술 수업과정에서 나가버린 터라, 남은 인원은 많지 않았다. 제대로 된 인원만이 남았다며 이제부터 진짜라던 심 선생은 회의마다 얼굴이 상하는 게 눈에 띌 정도였다. 남은 인원의 반 이상이 나가버렸고, 생활지원팀장도 흥미를 잃은 듯 우리 눈에 띄지 않았다. 어쩌다 만나도 어딘가로 급하게 통화를 하며 지나갔다. 뭐 외부에서 보기에 나름 알찬 일주일이다. 지역 답사도 했고, 지역토박이 인터뷰도 했고, 브레인스토밍을 통해 몇 가지의 키워드도 잡아냈고, 나름 진행된 건 사실이다. “아니 몇 번이고 말하는데 왜 사람 말을 안 들어요? 어르신들이 무슨 취향이 있..
노인회장의 인사가 마무리 되자 선매동 벽화마을만들기 팀원들이 신나게 박수를 쳤다. 한낮을 향해가자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연신 땀을 닦으랴 양산을 들랴 박수를 치랴 쉴 틈이 없었다, - 박수 칠 때마다 양산이 한들한들하는 것이 아주 나비 떼가 따로 없구나! 장관일세! 그 말을 들은 박여사가 곧바로 “예술적 감각이 끝내주시네” 하며 추켜올려준 덕에 사방에서 살뜰한 대화들이 오고갔다. 박여사도 덩달아 신이 났다. 조만간 춤판이 벌어져도 어색하지 않을 분위기다. - 안녕하십니까. 선매동 벽화마을 지원사업 진행을 맡고 있는 문화예술기획자 심종상입니다. 여러분. 마을 벽화 하면 무엇이 먼저 생각나십니까? 과거 열악한 환경을 예술로 가리려는 환경미화적 목적에서 진행되었다면, 현재는 지역민의 생활 속..
- 세상에! 우리 선생님들! 어쩜 이리 좋은 벽을 찾아내셨을까? 내가 한 번씩 왔는데도 전혀 몰랐네. 역시 보는 눈이 달라. 생활지원 팀장이 호들갑을 떨며 노인정에 들어왔다. 거친 듯 무심하게 쓰인 현판은 나름 고졸한 맛이 느껴졌는데, 역할에 충실한 것은 물론, 공간에 대한 기대감도 높여주었다. 품성이 소란하지 않은 노인들이 나름의 규칙을 지닌 채 서로에게 의지하며 지내는 곳. 상상 속 노인정은 세련되지 않지만 여유롭고 노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품위 있는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심지어 마당에는 수도시설이 되어 있었는데, 여름에는 찬물에 수박을 시원하게 넣어두고, 겨울에는 김장을 하느라 바쁜 모습이 그려졌다. 이상적인 커뮤니티란 이런 곳에서 탄생하는 것인지도. -계십니까? 조심스레 심 선생이 우리의 존재를..
- 음. 벽화라고요. 잠깐 들어와 봐요. 원이는 다짜고짜 동사무소 직원입네 하고는 벨을 눌렀다. 그러자 현관문은 생각보다 쉽게 열렸다. 벽은 온통 진한 색 나무 판넬로 감싸져 있었다. 어린 시절, 동네 부잣집 친구네 집이 이런 느낌이었지... 뜨거운 낮의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내부는 어둡고 서늘했다. 입구에 늘어선 하얀 리본 달린 슬리퍼에 조심스레 발을 넣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거실 곳곳에는 상장과 감사패, 온갖 종류의 기념사진들이 가득했다. - 음. 내가 말이죠. 벽화에 대해 할 말이 아주 많아요. 사실 우리 사돈처녀가 추계예술대학교에서 강의해요. 알죠? 추계예술학교! 나도 어려서 음악을 시킬까 미술을 시킬까 할 정도로 집안 자체가 예술에 조예가 깊어요. 그런데 벽화라는 게 이렇게 말하면 좀..
나는 마을 벽화를 싫어한다. 솔직히 혐오한다. 가득이나 조악한 그림에 심기가 불편한데, 명분까지 있으니 최악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우리 동네에 라는 밑도 끝도 없는 요상한 프로그램이 생긴다면 앞장서서 초를 치고 다닐 생각이다. 여기는 왜 앉아있냐고? 일당 좀 챙겨준다는 말에 2시간 걸려 왔는데, 하필 이 더운 날, 동네 담벼락 찾아다니게 생겼으니 그런 질문은 삼가줬으면 좋겠다. 충분히 힘겹다. 내 비록 지방 예고출신이긴 하지만 나름 자부심을 가질 만한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성한 나름 엘리트 미술교육을 받은 사람이란 말이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미술관에서 어시스턴트도 했었다. 고작 두 달 단기 일용직이지만 학벌과 능력들이 넘쳐난다는 미술 인력 중 뽑힌 거니까 그래도 자랑할 정도는 된다..
- 소개는 이제 마치고요. 이쪽 어머님부터 어떻게 벽화교실에 참여하게 되셨는지 간단하게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심 선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단박에 일어났다. - 우리 집 담장이 너무 흉해요. 길가에 있는 단독이니까 그렇다고는 하는데, 관리를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이꼴 저꼴 안 보려면 애들 어릴 때 그냥 나갔어야 했는데. 우리 선매동이야말로 젠트리. 그 암튼 젠트리의 피해자라고요. - 젠트리피케이션 말씀이십니까? 왜 젠트리피케이션의 피해자라고 느끼시는건지 여줘봐도. - 젠트린지 젠틀인지 암튼간에 사는 사람들이 힘들면 젠트리지! 교육 핑계로 그냥 강남갔어야 하는데. 우리집 양반이 애들 공부잘하는데 뭔 말도 안되는 소리나게 하는 통에. 늦게 이게 웬 난리 인지. 사실 애들이 공부를 좀 잘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