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운 나의 방에 도착했다. 오늘은 꽤 고된 날이었다.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람이 서늘해진 탓이라고 날씨 탓을 해본다. 보일러 기운이 들어오니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서늘한 바람에 얼어붙었던 몸이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늘 그렇듯이 너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나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네 옆에서는 늘 너와 하나가 되길 바랐는데. 네가 떠나고 나서 나는 느꼈다. 이제야 너와 내가 하나가 됐다는 것을. 내가 그토록 바라던 일이 너와의 물리적 분리로 이뤄져버렸다는 것을. 멈칫한다. 생각도, 글도. 자꾸만 의심이 든다. 물리적 분리라니. 너와 하나가 됐다니. 단어가 흩어진다. 멀리 날아간다. 다시 돌아온다. 흩어지고, 날아간다. 물리적으로 분리된 너의 마지막 말은 그거였지. 내 생각을 있는 그..
그는 방금 집에 돌아왔다. 닫히는 문의 소리가 난다. 그리고 적막. 습관처럼 신발을 벗는다. 집에는 가구나 집기가 거의 없다. 전등을 켜지 않는다. 어둡다. 그러나 그는 어둠이 두렵지 않은지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의 표정이 궁금하다. 좀체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방이 어둡다는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태양 아래에서도 그의 표정은 좀처럼 선명하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넌 경계선이 흐릿한 사람 같아.” 그녀는 그를 여러 이름으로 정의했다. 경계선이 흐릿한 사람, 순수가 가려진 사람, 회색 인간,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정의들로. 그는 누군가로부터 정의 내려지는 것이 처음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아니, 누구도 그에게 그만한 관심조차 없었다..
너에게 편지를 써. 이제는 닿을 수 없는 너에게. 네게 편지를 쓸 때마다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는 기억들을 마구 꺼내어서 내 작은 방에 무지막지하게 쏟아 놓는 기분이야. 그렇게 쏟아 놓다 보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도 떠오르곤 해. 그 만남이 무척이나 반가워서 이렇게 자꾸 네게 편지를 써. 나중에 정리하는 게 아무리 고된 일일지라도 말이야. 오늘은 사실 몸이 무척 아팠어. 아프다 보니 차갑던 네 방이 떠오르지 뭐야. 오랜만에 찾은 네 방은 벽이 깨끗했어. 우리가 함께할 때는 낙서와 담뱃진으로 벽이 가득 채워져 있었는데. 아마 도배를 새로 한 모양이더라고. 함께한 시간이 기록된 벽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기가 힘들었던 거니? 새로운 마음으로 네 삶을 꾸려가고 싶었던 거니? 어떤 이유든 ..
2015. 02. 15 영혼을 갈아 넣는 느낌이다. 아니, 갈아 넣는다기보다는 영혼의 외피를 전부 벗겨서 말랑하고 여리고 투명한 영혼의 속살을 안이 뾰족한 상자 속에 구겨 넣는 느낌이다. 내 영혼이 치명상을 입지는 않겠지만 계속 거슬리게 아픈 생채기가 나는 것이다. 아무리 생채기가 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나를 그 작고 차가운 상자 속에 밀어 넣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기는, 대가 때문이지. 내 영혼을 밀어 넣는 대가. 그것은 안정감이다. 밥을 먹고 숨을 쉬고 어딘가를 나다닐 수 있게끔 하는 동아줄. 돈이다. 안정적으로 지급되는 돈.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그 안정감을 주는 동아줄이 고작 115만원이기 때문이다. 내 영혼의 대가가 고작 115만원이라니. 물질에 매몰된 삶, 안정에 ..
“아가씨, 강아지 데리고 타면 안 돼. 못 타, 못 타.” 버스 기사 아저씨는 손을 휘휘 젓는다. 순간 이동장 안에 있는 만지가 너무 불쌍해진다. 아니, 만지를 불쌍하게 만드는 건 나였다. 기사 아저씨 앞에서 한 마디도 못하고 버스에서 내리는 내가 만지를 불쌍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만지의 존재가 부끄러운 것도 아닌데, 나는 이런 순간마다 이상하게 작아진다. 한번은 만지와 산책을 하다가 이런 일도 있었다. 만지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쁜 외형을 지니지 않았다. 새까맣고 다소 푸석한 털에 긴 허리, 투박하게 짧은 다리를 가지고 있고 주둥이는 얼굴에 비해 지나치게 두껍고 길다. 귀는 예쁘게 접히거나 서 있지 않고 반쯤만 어색하게 접혀 있다. 그런 만지를 보고 지나가던 아이들이, “못생긴 개다, 못생긴 개야. 저..
서점에서 책 한 권을 발견했다. 파란색과 보라색, 빨간색이 뒤섞인 표지가 너무 예뻐서 골랐는데, 읽다 보니 이 책의 일부를 소개하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쓴다. 다음은 ‘말하지 못하는 것과 말해야만 하는 것의 경계에서’라는 책의 일부다. 이 책의 저자는 평범한 삶을 살아오다 이 책을 써내고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나의 삶도 바뀔 수 있을까. - 조금씩 그녀들을 따라 하는 나를 발견한다. 흉내 내는 삶. 내가 흉내 내는 것은 그녀들의 삶이었다. 다이어트에 관심을 가지려 하고 연애를 하려고 하고……. 언젠간 결혼을 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 언젠간 누군가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나는 그들을 흉내 낼 수밖에 없는가. 왜 나는 누군가를 계속해서 흉내 내며 살아야 하는가. 어쩌면 ..
엄마, 엄마한테 말하지 못한 게 있어요. 그날 걸레질하는 엄마의 굽은 등을 보고는 절대 이 말만은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어요. 마치 노을 지는 언덕 같은 엄마의 등. 눈물이 많은 엄마는 그날 이유 없이 울음을 터뜨렸죠. 그 눈물이 마치 나를 찌르는 빗방울들 같아서 엄마에게 이 말만은 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네요. 엄마는 고등학생인 제 머리를 빗겨주고 제 양말을 신겨주곤 해요. 아침에 비몽사몽인 제 입에 김에 싼 밥을 하나씩 물려주죠. 마치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것처럼요. 저는 눈을 반쯤만 뜬 채로 김밥을 받아먹었어요. 엄마 눈에 저는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어린아이예요. 제 방 침대에는 분홍색 캐노피가 걸려 있어요. 제 방 벽지는 구름 그림이 그려져 있죠. 여전히 강아지인 나. 아마도 엄마는 저..
외줄타기를 하는 사람은 생각했다. 자신은 하늘에도 땅에도 속할 수 없는 존재라고. 그래서 그는 늘 외로웠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곳이 외줄 위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그도 딱 한 번 외로움을 잊었던 순간이 있었다. 더는 양팔을 휘젓지 않아도 걸을 수 있었던 순간. 그 순간이 끝나고 그는 땅으로 스스로 떨어졌다고 한다. 여기, 외줄을 타는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땅으로 떨어지기보다는 스스로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오늘도 그는 카페에 간다. 비틀거리기보다는 안전하게 두 발을 땅에 내디딜 수 있도록 양팔을 힘껏 휘적였다. 키보드 위를 휘젓는 그의 손길이 멈췄다. “상철아!”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효선이었다. 아마도 효선도 상철과 같은 목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