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에게 현재를 살아가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다. 동식물에게는 생존이 모든 것들에 우선하며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예측도 후회도 없다. 하지만 인간은 미래의 설계도를 그리고, 있지도 않은 관념과 상징을 신봉하며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말하자면 자의식과 회한 덩어리이다. 이것이 내가 지금까지 알게 된 세상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또 다른 세상의 실험대 위에 서 있게 되었다. 캡틴과 안드로이드들이 새로운 ‘초인류’를 만들어내는 비밀 기지는 이곳을 찾아낸 ‘로봇파괴 혈맹단’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잭이 안드로이드들을 모아 방어에 나섰지만 ‘로봇파괴 혈맹단’의 규모는 생각보다 크고 조직적이었다. 캡틴이 주도한 ‘초인류 프로젝트’ 기지의 모든 시스템과 부품들..
캡틴은 우리를 중앙 데이터 시스템 관리국을 안내했다. 그곳에서 캡틴이 알려준 조이를 찾는 방법은 단순하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나와 수의 기억에 있는 조이를 모두 끌어내는 것인데,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적분법을 활용이었다. 조이와 함께 했던 시간과 공간을 축으로 기억들을 적분해 나가면서 조이와 근접한 데이터의 홀로그램 파일을 찾아내는 방식이었다. - 조이가 여기 있다면 당신들의 기억들과 일치하는 홀로그램 파일이 반응하게 될 겁니다. 수와 나는 캡틴이 안내하는 대로 기억 재생 장치를 머리에 쓰고 의자에 앉았다. -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조이를 처음 만났던 때부터 떠오르는 기억들을 불러오면 됩니다. 그 기억들은 점점 더 선명해질 것입니다. 최면을 통해 숨겨져 있던 기억들을 모두 끌어오는 원리와 ..
얼핏 보면 기괴하다고 볼 수 있는 안드로이드들이 복도를 오가고 있었다. 그들의 부서진 신체 부위에는 최첨단 기계들이 덧붙여져 있었다. 시장에 쌓여 있던 기계와 부속들이 이들을 고치는데 쓰이는 듯했다. 보기 좋진 않았지만 기능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 듯했다. 오히려 부서져 고친 부위는 정교하고 섬세했다. 그들은 같은 기종의 안드로이드라도 해도 서로 같지 않았다. 새롭게 바뀐 신체 부위는 오히려 각자의 개성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냈다. 커다란 방의 사면에 즐비하게 늘어선 홀로그램에는 파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안드로이들이 홀로그램에서 파일들을 꺼내 바쁘게 오갔다. 그곳은 요즈음엔 거의 사라진 납골당처럼 보였다. - 저희는 조이를 찾으러 왔어요. 혹시 조이가 여기 있는 건가요? 나는 조심스레 캡틴에게 ..
사라진 조이에게는 이틀 째 아무 소식이 없었다. 경찰은 집과 연구소 주변의 CCTV와 스마트 장치로 위치를 추적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남은 단서는 밤늦게 연구소에서 그가 파일로 남긴 고고학 보고서가 유일했다. CCTV와 위치 추적 장치 안의 기록은 어느 것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 이렇게 행적이 깨끗하게 소멸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관할 경찰서 컴퓨터에는 범죄사고의 예방 차원에서 개인의 행적기록들이 자동으로 하드에 기록되니까요. 하지만 조이 씨에 대한 기록은 이제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요.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실종되기 전까지의 모든 기록들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경찰관들은 컴퓨터시스템에서 개인 정보가 유출되거나 삭제되었다는 경고알림을 확인하고 바로 이곳으로 출동했다. 수가 경찰에 전화를 거는 순간 ..
카페 남자와 헤어지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그쳤던 비가 다시 내렸다. 대기는 축축하고 서늘했다. 어쩐지 시간을 곱절 이상으로 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며칠 동안의 시간이 한나절 속에 차곡차곡 접혀 들어가 있는 듯 느껴졌다. 길을 걸으면서도 접힌 자국들에 새겨진 상념과 기억들에 발이 붙들리곤 했다. 걸음은 느려졌고 날은 빨리 어두워졌다. 나는 반복되는 일정한 패턴과 생활, 규칙을 익히게 되면서 서서히 진화해왔다. 조이의 주변 환경에 대한 인식의 습득이 주된 학습 동기였다. 하지만 남자를 만나고 난 후 나는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남자를 통해 내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남자는 나를 통해 그의 애인이었던 데이빗을 떠올렸으며 그와 내가 얼마나 닮았는지를 비교했을 것이었..
비에 젖은 공원의 나무들은 햇볕을 받고 한결 싱그러워졌다. 조끼와 모자를 벗고 재킷에 크로스백을 맨 남자는 자주 웃었다. 그는 카페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젊어보였으며 목소리도 한층 밝아져 있었다. 그는 내게 이름을 물었다. 조이스라고 대답하자 남자는 좋은 이름이라며 시를 읊듯 내 이름을 반복해 중얼거렸다. 내가 그를 힐끗 쳐다보자 남자는 수줍은 듯 미소를 지었다. 금세 그의 귀와 볼이 빨개졌다. 남자는 내가 안드로이드이며 조이의 섹스봇이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일부러 그를 속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 혹시 음악을 하시나요? - 그냥 혼자 흥얼거리며 노래를 만들어 부르곤 해요. 원두를 사러갈 때마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묻던 남자의 질문에 나는..
샤워를 마치고 식탁에 앉은 조이는 커피 향을 맡으며 내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조금 처진 눈과 반달로 벌어진 입이 천진한 아이 같았다. 웃으면서 생기는 눈가의 주름은 나이를 느끼게 하기보다는 즐겁고 만족스러운 감정을 분명하게 알게 해주었다. 나는 조이의 표정들을 기억했다가 거울을 보고 연습을 하곤 한다. 하지만 아무리 연습을 해도 비대칭으로 근육을 움직여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는 표정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 신체는 지나치게 정확한 비율로 만들어진 탓이다. 내게 입력된 표정은 56가지이나 된다. 하지만 인간은 50여개의 얼굴 근육으로 만여 가지의 표정을 만든다. 아무리 최첨단의 소재를 사용해 인간의 피부와 근육을 완벽하게 재현했다고 하지만 나는 인간의 복제품일 수밖에 없다. - 오늘 좀 늦을 거야. ..
12층으로 신축된 멀티쇼핑몰에는 화려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쇼핑몰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여러 종류의 인공로봇들도 적지 않았다. 집사봇이라 불리는 인공로봇들은 아이를 달래기도 하고 노인들의 휠체어를 밀기도 했다. 얼핏 보면 사람과 구별되지 않는 고급 사양의 휴머노이드부터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구 모델의 로봇까지 다양했다. 조이와 나는 신발 매장에서 일하고 있는 수를 찾아갔다. 수는 멀리서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유니폼을 입고 있는 수는 일하고 있는 다른 안드로이드 로봇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일과 상관없는 이런 일을 왜 해야 하는 걸까? 언젠가 조이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정말 중요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결국 수도 돈 때..
나는 왜 조이스야? 나는 천정을 바라보고 누운 채 심드렁하게 물었다. 조이는 고개를 틀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왜 갑자기? 그냥 궁금해서. 사실 그냥 궁금했던 건 아니었다. ‘조이와 조이스’, 그건 마치 ‘덤 앤 더머’ 처럼 단순하고 우스꽝스러운 짝패 같았다. 난 좀 특별한 이름을 갖고 싶었다. 내 이름이 조이잖아. 넌 조이의 것이란 뜻이야. 소유란 인간 세계에서는 자신의 부와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이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돈을 주고 산 나 역시 조이에겐 단지 소유물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도 이 세상에서 확실한 내 것 하나쯤은 가져도 되지 않을까? 그것이 조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조이 꺼, 그럼 조이는 내 꺼야? 그는..
어둡다. 곁에는 조이가 나지막이 코를 골고 있다. 아마도 그는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가끔씩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는데 알아들을 수는 없다. 알 수 없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꿈을 꾸는 데 하루의 4분의 1을 소비하는 조이. 참으로 효율성이 떨어지는 유기체이다. 그래도 아침이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하러 나가는 조이를 보면 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조이는 마치 움직이기 위해서 태엽을 감아야 하는 인형 같다. 하지만 나의 정체를 알게 되면 사람들은 반대로 나를 인형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원하는 것을 제공한다. 최첨단 인형이라고나 할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안드로이드이다. 조이는 나를 집사겸 섹스봇으로 작년 이맘 때 즈음 로부터 나를 사들였다. 나는 진화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