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오스크』의 주인공 올가는 키오스크(가판대)를 지키는 사람이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 올가의 하루가 열리고 닫힌다. 그림책의 문장처럼 “키오스크는 올가의 인생이나 다름없”지만 키오스크의 좁디좁은 공간과 각진 테두리는 올가의 세상이 아니라 올가가 세상과 만나도록 하는 몸 혹은 피부에 더 가깝다. 키오스크를 통해 올가는 세상과 이어지고, 그러면서 올가는 매일매일 환해지니까. 미소 가득한 얼굴로 단골손님을 맞는 올가는 그들이 무엇을 살지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또는 어떤 마음으로 이곳을 찾는 것인지를 거의 알고 있어서, 그 마음과 필요에 걸맞은 물건을 정확하게 건넨다. “연애에 늘 실패하는 숙녀는 여성 잡지에서 도움말을 찾아요.” “머리를 올려 묶은 아주머니는 낚시랑 고양이랑 정치에 관심이 많아요.” “..
나를 왜 낳은 거야? 내 허락도 없이? 청소년 시절, 목젖 끝까지 이런 말이 차오른 적이 종종 있다. 삼키고 또 삼켰다. 그게 내 부모든 신이든, 대답은 침묵으로 돌아올 게 뻔했으므로. 그때 세상은 온통 숙제로만 가득했다. 고통과 환멸과 지루함으로 이뤄진 숙제. 숙제를 내주는 사람의 기쁨만을 위해 숙제가 존재하는 세계. 거기에 종종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란 말이 기쁨을 더 찬란한 기쁨으로 만드는 액세서리가 되기도 하는 세계. 초등학교 때 만났던 단 한 명의 선생님을 존경했다. 아이들을 조건 없이 골고루 살피고 보듬고 있다고 느낀 유일한 분이었다. 나머지는 이내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가 다 보였다. 그들이 더 많이 호명하고 더 많이 웃어주는 학생의 경우, 예외가 없었다. 그들 어머니의 얼굴을 번번이 ..
그림책의 첫 페이지를 열면 창 너머로 바깥을 만나는 아이의 환한 얼굴이 있다. 아이가 쫓는 것은 창밖의 존재들이다. 소나무, 까마귀, 달, 그리고 무엇보다 낱말들... 아이는 낱말들에 귀를 기울이고 그 낱말들을 읊어보려다가 이내 풀이 죽는다. 낱말 앞에서 아이의 혀는 어김없이 미끄러지고 가차 없이 튕겨나가기 때문이다. 낱말들은 한 번이라도 온전히 아이의 것이었던 적 없다. 아이는 그렇게 느낀다. 그 느낌은 아이의 하루하루를 차근차근 삼켜가는 중이다. 하루를 내어주고 대신 아이는 슬픔을 얻는다. 그 슬픔을 돌덩이처럼 안고 아이는 학교에 간다. 학교와, 교실과, 교실에 들어찬 학생들. 아이를 더욱 아프게 하는 존재들이다. 매일 반복되는 악몽 같은 시간을 지나 아이는 강 앞에 앉는다. 흐르는 강물을 본다. 강..
이 책의 그림을 그린 이는 천루이추라는 대만의 작가다. 그런데 글쓴이가 특이하다. 글쓴이 이름의 자리에는 개인이 아닌 ‘대만 산업재해피해자협회’라는 단체명이 표기돼 있다. 이것만 봐도 책의 내용이나 주제에 대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산업재해피해자협회라니. 책을 펼치기도 전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걸 어쩔 수 없었던 누군가는, 이 책을 가만 집어 들었다가 재빨리 본래의 자리로 내려놓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집어 들던 순간보다 더 조용하게.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요즘의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앞 문장에서 ‘요즘’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넣었다 뺐다 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야 산업재해피해의 현장과 그 현장에 잇대어진 죽음들과 삶들에 대해 제대로 들여다보게 된..
하드커버로 된 표지를 열자 노란색 간지가 드러난다. 큰딸 이름이 삐뚤빼뚤 커다란 글씨로 적혀 있다. 거기엔 글자들의 세계에 처음 편입되어 이제 막 제 손으로 그것을 쓸 수 있게 된 아이 마음의 환희가 담겨 있다. 서지정보가 새겨진 페이지를 보니, 이 책의 초판 1쇄 발행일은 1999년이고 2007년 36쇄 발행까지 이뤄진 것으로 나와 있다. 큰딸이 6~7세 되던 해에 구입한 책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의 책장을 아이와 함께 넘기곤 했던 당시의 기억이 선명하지는 않다. 다만 눈이 트일 정도로 환한 톤으로 그려진, 또 아이가 간지에다 써넣은 글씨만큼이나 삐뚤빼뚤한 그림체에 끌렸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밝은 톤의 그림이 아니었다면 책을 금방 덮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고양이는 신기한 존재다. 온갖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어도, 힘겨운 마음 때문에 어쩔 줄 모르다가도, 고양이 쪽으로 눈을 돌리면 적어도 그렇게 고양이를 바라보는 동안만큼은 함부로 행복과 평화를 말하고 싶어진다. 아무리 바라봐도 질리지가 않고, 눈앞에 저 존재가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워서 네가 나를 사랑하는지, 혹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물을 겨를조차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물론 함께 살게 될 경우 성가신 일이 많긴 하다. 고양이와 사는 건지 털 뭉치와 사는 건지 모를 만큼, 사방에 날려가 달라붙은 온 털들을 처리하는 것이 매일의 숙제로 건네진다. 고양이 대변 냄새는 또 너무 강렬한 나머지 매일같이 새롭다. 하지만 이런 매일의 일거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나는 이렇게나 아름다운 고양이가 내 가까이에 실재하..
마흔 되면 죽어야지, 그 추레한 나이를 어떻게 견디고 살아? 마흔 되기 전에 뭐든 이루지 않으면 일단 실패 아닌가. 마흔 넘은 뒤에는 그저 견디는 삶만 남잖아, 다 져버린 삶. 20대 초반, 친구들과 둘러앉아 이런 이야기를 나누던 게 생각난다. 이런 대화는 힘이 세서 혼자 남겨진 뒤에도 귓속에서 숱하게 되풀이되었다. 정말 오래된 이야기인데도 이 말들은 여전히 생생하다. 물론 그 생생함과는 다르게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20대 후반에 결혼하여 10년간 직장 생활을 이어갔으며, 그 와중에 딸아이도 둘 낳고 키웠다. 이혼도 했다. 시와 산문을 쓰는 사람이 되었으며, 글을 쓰고 만지는 일, 글 쓰는 이들을 보살피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되었다. 기획자와 활동가의 정체성 또한 키워가고 있다. 그러는 동안 ..
“왜 어떤 사람은 살고 싶지 않을까?” 그림책의 화자는 단발머리를 한 여자 어린이다. 위 문장은 이 어린이가 아빠를 떠올리면서 자문하는 말이다. 어린이는, 개가 있고 나비가 있고 하늘이 있는데 어째서 살고 싶지 않을 수가 있는지 묻고, 아빠에 대해서도 또 한 번 묻는다. “어떻게 아빠는 살고 싶은 마음이 안 들까? 내가 있는데.” 하고. 나를 사랑한다고 수도 없이 말하던 사람이 별안간 살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한다면 누구든 이렇게 묻게 되지 않을까. 나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마음이 변한 건가. 혹시 내 존재를 지우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이의 아빠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어떤 마음의 병은 교통사고처럼 예고도, 이유도 없이 들이닥친다. 그것은 나의 의지와 의도를 넘어선다. ..
둘째아이 출산을 몇 주 앞두고, 6년 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그 전 직장의 근무 햇수까지 포함하면 10년여의 직장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라 해도 무방했다. 그건 예감이 아니라 기정사실에 더 가까웠다. 전문직 종사자도 아닌 여성 노동자가 아이를 어느 정도 키워놓은 다음 자신의 자리를 찾아 ‘돌아가는’ 경우는 전무하다시피 했으니까. 다니던 직장에 크고 작은 문제가 있어 적잖이 염증을 느끼던 차였다. 후련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막막했고, 걱정스러웠다. 전업주부 생활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두 아이의 성실한 엄마 노릇을 거뜬히 해낼 수 있을지. 무엇보다 사회적인 쓸모를 다한 것만 같은 내 스스로를 견딜 수 있을지가 가장 자신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집에만 있고 아이 둘만 바라보면서도, 모든..
“나는 알아, 이 도시에서 작은 몸으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책의 처음부터 이런 작은 목소리가 있다. 끄덕이는 목소리. 목소리 아래에는 겨울 도시의 풍경과 한 아이의 뒷모습이 행인1처럼 부려져 있다. 물론 아이의 몸은 그 밖의 행인1들에 비해 턱없이 작다. 작은 몸이 거기에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 건 추위로 빨갛게 달아오른 아이의 볼 때문이었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아이가 단단히 짊어진 가방이 눈에 들어온다. 목소리는 아이의 것으로 짐작되지만 그 목소리가 누구를 향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목소리는 계속 이어진다. 도시의 골목골목에 대하여 낱낱이 알려주고, 도시 안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을 속삭여주고, 도시 안의 숨을 수 있을 만한 공간을 찾아 귀띔해준다. 목소리 안에는 다정이 가득하다. “숨..
두 달 전 동네의 한 작은책방에서 이 책을 업어왔다. 책방지기의 추천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강렬한 표지에 이끌렸다. 아이의 모습은 온통 푸른빛과 잿빛으로 가득하다. 또 아이의 목구멍에는 생선 가시가 걸려 있다. 젓가락을 쥔 모양새는 또 어떻고. 그 젓가락은 반찬을 집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를 찌르기 위한 것만 같다. 무엇 때문일까. 아이는 왜 이다지도 깊은 잿빛의 모습으로 여기에 있게 되었을까. 첫 페이지를 펼치자마자 많은 게 설명된다. “너 같은 거 꼴도 보기 싫어!” 아이가 들은 말이다. 이 한 마디뿐이었다. 아이의 친구는 이 말만 뱉은 뒤 빠르게 멀어졌다. 이유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이는 순식간에 누군가에게 미움의 대상이 되어버린 셈이다. 아이는 그걸 견딜 수가 없다. 서둘러 나름..
2015년의 강남역 살인사건과 2016년의 문단내성폭력 말하기 운동은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들이 얼마나 비일비재하고 노골적이며 일상적인가 하는 비밀이 폭로된 사건이었다. 비밀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비밀이 아니라, 비밀이 되어야만 하는 당위로서의 비밀이었다. 폭력의 행위자들이 욕망하고 요구하는 비밀 말이다. 2015년 이후의 페미니즘 리부트는 그 비밀을 더 이상 비밀로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들의 총합에 다름 아니었다. 도처에서 증언들이 이어졌고, 증언들 뒤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연대체들이 생겨났다. 증언과 연대의 주체는 거개가 여자들이었다. 그 이후로 내 눈에 보이는 여성의 모습은 주로 ‘싸우는 여성’이었다. 방식과 영역은 달랐지만 모두가 그들 나름으로 싸우..
2008년에 둘째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그해에, 6년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아이 둘을 맡기면서까지 직장을 다니는 것이 수지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당시에는 경제적 계산 때문인 거라 여겼다. 남편 월급이 내 월급보다 많았으니까 내가 그만두는 게 맞다고.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엄마니까, 여자니까 내가 그만둬야 하는 거였다. 한 가족 단위에서 누군가 하나 직장생활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여자가 집에 ‘들어앉아야’ 했다. 가장인 남성이 ‘가족임금’을 수령하고, 일개 아내일 뿐인 여성은 그에 종속되어 무임금으로 돌봄노동과 육아를 맡는 게 당연했다. 보이지 않는 이러한 억압을 당시에는 몰랐거나, 모르는 척 했다. 첫 아이 출산 때는 몸과 마음 모두 회복이 빨랐다. 돌아갈 직장이..
지난 가을, 첫 시집 『치마들은 마주 본다 들추지 않고』를 냈다. 시집 제목은 시집의 가장 마지막에 놓인 시 에서 따왔다. 출간을 앞두고 시집 제목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어느 하루, 운명처럼 이 그림책을 만났다. 경의선책거리의 한 책방에서였다. 당시 책방지기는 번역도 하고 출판도 하는, 내가 신뢰하는 어떤 선생님이었다. 시집 제목을 ‘치마’가 들어간 이 제목으로 바꾸려 하는데 괜찮은 생각인지 확신이 없다는 말을 했을 때, 선생님은 별안간 등을 훽 돌리더니 울긋불긋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시집 제목 너무 좋아요. 이 그림책이 당장 떠올랐거든요. 이 책, 놀랍지 않아요?” 맑고 높은 선생님의 목소리가 더 높게 날아올라 새의 부리처럼 책방 천장을 콕콕콕 두드렸다. 나는 재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선생님의..
글을 시작하기 전에 그림책 앞에서 한동안 가져온 나의 이중감정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 이중감정은, 지금은 청소년이 된 나의 두 딸아이가 글자를 모르던 어린시절을 지나던 시기에 특히 깊었다. 그림책은 아이를 위한 것. 그림책 읽기는 부모가 아이를 위해 해주어야 하는 필수적인 행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걸 뺀다면 그 밖의 돌봄 목록에서 가장 상위에 있는 것이 바로 그림책 읽어주기일 테다. 말하자면 그것은 아이의 정신을 키우기 위한 것이고, 영혼을 돌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림책 읽어주기는 대개 엄마만의 숙제일 때가 많다. 전업주부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젖 먹이듯 아이를 품은 채로, 혹은 ‘엄마냄새’를 풍기며 지붕처럼 아이를 감싼 채로, 그 누구도 아닌 엄마의 목소리를 들려줘야 한다는 무언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