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자유가 있으리라. 하지만 자유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또한 나는 많은 통제와 구속 안에 있기도 하다. 그것은 내 안의 자유를 인지하기 전부터 지속되어온 관습적인 측면이다. 이미 뿌리내린 것을 뽑아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이런 어지러운 정원에는 전문 정원사를 두면 딱 좋겠지. 좋은 건물을 구경할 때면 언제나 따라오는 훌륭한 조경처럼 멋지게 가꾸는 거야. 그러나 곧 나의 정원에는 조경 업체가 낄 만한 예산이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씁쓸하게 피어오른다. 내게 있는 통제라는 식물, 그것은 잎사귀의 테두리를 따라 미세하면서도 날카로운 가시를 가져 장갑 없이는 함부로 다듬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장갑은 나만이 만들 수 있다. 모든 이들의 정원에는 각..
나의 이십대는 그랬다. 내면의 방황이 깊어질수록 가야할 곳과 해야 할 것이 늘어났다. 내가 어느 정도 선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때문에 어떤 일이든 너무 무리했고, 자주 번아웃을 겪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끝내 번아웃을 겪는다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하루에 한 번씩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삶은 언제 끝나지?’ 한 톨의 아쉬운 것도 아끼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없다는 듯이. 나에 대한 소중함, 나를 아껴주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 그런 것들이 모두 멸종해버린 일종의 ‘정서적 아포칼립스’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주어진 명이 아직 남아있는 것일까, 나의 삶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끝내 죽는 것보다는 살아서 새로운 길을 걸었다. 나는 자연의 ..
내가 글을 쓴다는 걸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를 응원했다. 물론 면전에 대고 네 수준에 무슨 연재를 하느냐고 말할 수는 없겠지. 하하. 하지만 나도 사람이다.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들 내 도전을 진심으로 기뻐해주었다. 그러니 여러분, 나처럼 똥을 싸라. 농담이고, 시도를 해봐라. 뭐든지 일단 해야 한다. 혹시라도 나처럼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감이 없고 늘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다면, 또는 우울증에 오래 시달렸다거나 만성 불안으로 일상생활에서조차 어려움이 있다면, 내가 지금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게 뭔지를 꼭 생각해봐야 한다. 이런저런 의심, 부정적인 생각이 피어오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구석에서 왠지 재미있을 것 같고, 기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놓치지 말아야..
종종 내가 쓴 글들을 읽어보려다 실패한다. 모든 글이 결국 내가 붙들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던, 달콤 쌉쌀한 꿈이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의 서툰 몸부림을 마주하는 것이 아직은 어려운 탓이다. 공개적인 곳에 무언가를 쓴다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나는 그런 점에서 일면 좀 미친(?)구석이 있는 것 같다. 누가 묻지도 않았건만, 호기롭게 내 어린 시절의 치부라면 치부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잔뜩 써내려갔다. 내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요즘 매일같이 이런 생각에 시달리고 있다.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거야?’라거나 ‘얘는 뭔데 글을 써?’ 혹은 ‘자아비대증 말기로군.’ 같은 식으로 나를 비웃을까 봐 두렵다. 그러나 한편으론 나 자신에게 이런 말도 자주 한다. ‘예..
그런 날이 있다. 분명 어젯밤에 꿈을 꾼 것 같은데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고, 꿈속에서 경험한 감정만이 ‘느낌적인 느낌'으로 남아있는 경우. ‘참 희한한 꿈이었는데, 내용이…’, ‘왠지 내가 막 웃었던 것 같단 말이지. 근데 내용이…!’, ‘뭔가에 쫓기는 기분을 잔뜩 느꼈어. 근데 내가 뭐에 쫓겼더라?’ 같은. 나의 과거지사도 그러하다. 이미 꿈처럼 아득히 멀어진 일이라 기억나는 것은 소수일 뿐, 대체로 ‘그랬던 것 같아…’의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렇다면 전 편에서 내가 적어 내려간 것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어떤 시각으로 보면 반은 진짜고 반은 가짜일 테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모든 것이 가짜일지도. 사람들은 자기만의 시각을 갖고 있다. 꼰대처럼 굴지 말고, 개똥철학 좀 넣어두라는 핀잔은 ..
나는 20대 초반 아주 일찍부터 결혼을 꿈꿨다. 만나는 애인마다 이만하면 결혼할 재목인지 나름대로 늘 따져보았다. 스물한 살에는 엄마 앞에서 만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며 호들갑을 떨다가 등짝을 맞기도 했다. 스물부터 스물넷, 짧다 하면 짧고 길다 하면 긴 5년이라는 시간. 나는 해마다 다른 사람을 만났다. 마음 곳곳이 여전히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활활 불타고 있었으므로 누군가와 오래 관계를 이어가는 일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애를 멈출 수 없었는데, 그것에는 필사적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애인을 사귀게 되면서 처음으로 안전하게 보호받는 기분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연애란 내가 꿈꿔온 무조건적인 사랑에 걸맞은 훌륭한 시스템이었다. 내 감정을 알아달라고 아무리 소..
엄마와의 사건 이후 삶의 동력으로 삼아왔던 무언가가 작동을 멈춘 기분이 들었다. ‘우리 가족들이 언젠가는 내 상처를 알아줄 거야.’ ‘언젠가는 내가 원했던 만큼 사랑받게 될 거야.’ 나를 살게 한 것은 아마 이런 것들이었으리라. 그러나 운명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곳에 나를 데려다놓은 것이다. 열 살 무렵의 일이다. 나에게는 큰고모와 작은고모가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그들은 종종 술에 취한 채 우리 집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곤 했는데, 그날 역시 그런 날이었다. 목적은 엄마인 것 같았다. 언니가 거실에서 큰고모와 몸싸움을 하며 그녀를 막았지만 작은고모가 대신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에 있던 엄마의 목을 졸랐다. 나 역시 침대 위로 기어올라 울며불며 작은고모의 손을 떼어놓으려고 애썼다. ‘제발 ..
다행히 중학교 3학년 무렵 부모님은 이혼을 했다. 나는 그 일이 천운이라고 생각한다. 근본적인 문제를 살피지 못하고, 눈앞의 사사로운 고통과 편견에 휘둘리던 나의 가족. 그 모습은 마치 밑 빠진 독과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빠는 순순히 이혼해주지 않았다. 엄마와 나는 무작정 아빠의 짐부터 정리했다. 함께 살던 친할머니는 약 1년 전부터 큰고모와 함께 집을 얻어 분가하신 참이었다. 아빠가 나간 사이 엄마 차에 짐을 싣고 친할머니 집에 내려다 놨다. 엄마는 차에서 내리지 않았고 내가 홀로 할머니 집 앞에 짐을 옮겼던 것 같다. 소란스러움에 문을 연 할머니가 나를 쳐다보았었지. 엄마보다 더 엄마같이 느껴지던 친할머니는 더 이상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아빠와 내연녀의 관계를 모두 알고 있었으면서 비밀에 ..
Unexpressed emotions will never die.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They are buried alive and will come forth later in uglier ways. 산 채로 묻힌 뒤 훗날 더 추악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Sigmund Freud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을 꿨다. 어떤 남자가 벽을 따라 늘어선 키 높이의 풀들을 다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물을 것이 있는 듯 주변을 서성거리며 우물우물 거린다. 앞에 선 그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남자는 이내 인상을 찌푸리더니 대답 대신 다듬던 풀잎파리를 쥐고 확 잡아 뜯는다. 입을 다물라는 뜻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동시에 이 상황이 모두 나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또한 꿈임에도 불구하고 가..
“공예는 왜 연재를 하면 안 돼?” 친구 D의 물음으로부터 시작된 나의 에세이 도전기. 그래, 만들고 쓰고 전부 다 해보자! 나는 (자칭)예술가 이밈달. 나름대로 복잡한 유년 시절을 보냈지만 긍정의 색채를 잃지 않는 타고난 예술형 인간이다. 스스로 이렇게 정의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모름지기 예술가의 삶이란 ‘표현’과 떼어놓을 수 없는 법. 나 역시 나만의 방식으로 ‘표현’과 ‘표출’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다리기하며 살아왔다. 방황한 시간만큼 이래저래 발을 담군 곳이 많아 전문분야가 어디라고 특정하긴 어렵지만 편집디자인, 양초공예, 레진공예, 3D프린팅, 사진(포토아트) 등 여러 가지 것들을 두루두루 즐기고 있다. 지난 시간 나는 무엇을 만들든 ‘상처받은 나’에 잔뜩 취한 채 작업했다. 용광로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