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공공장소에서 애정표현을 멈추지 않았다. 애인의 볼과 머리카락에 뽀뽀하고 허리에 손을 두르고 포옹을 했다. 점점 면역이 생기는지 애인도 내 스킨십을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볼지 두려움이 들 때마다 나는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이성애 커플과 우리는 다른 점이 없는데 왜 내가 행동을 삼가야 한단 말인가. 애정표현을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하는 것은 혐오자들에게 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숨고 싶지 않았다. 이성애 커플들이 그렇듯 우리의 사랑도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오랜 시간에 걸쳐 스스로를 의심하고 부정한 후에 나온 것이었다. 담금질 한 후 얻은 확신이었기에 굳건..
카페에 가면 애인과 나는 묘한 공방전을 시작한다. 옆자리에 앉으려는 나를 피해 애인은 건너편에 앉는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소파 옆자리를 퉁퉁 치며 ‘여기 앉아요, 여기’ 라고 말하지만 애인은 그런 나를 무시한다. 내가 일어나서 애인 옆으로 옮겨가면 반대편으로 도망간다. 옆에 앉기를 격렬하게 거부할 때마다 나는 다른 테이블의 커플을 가리키며 보라고 했다. 나란히 앉아 한 몸으로 얽혀 서로의 얼굴을 연신 쓰다듬고 있는 이성애 커플들을 말이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러는 것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그들을 불편해하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심통이 잔뜩 나서 ‘왜 우리는 안돼요?’ 라고 포효했다. 카페뿐만 아니라 식당, 공원 등 데이트 장소라는 분위기가 풍기는 모든 곳에서 그랬다. 공공장소에서의 애정표현은 ..
사람이 꽤 붐비는 길거리였다. 우리보다 조금 앞서가는 남녀 커플이 거의 껴안다시피 걸어가고 있었다. 딱히 관찰하려는 게 아니고 두 걸음도 안 되는 앞에 있어서 보였을 뿐이었다. 핑크빛 기운이 예사롭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점점 얼굴이 가까워지더니 프렌치키스를 했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옆에 있는 애인을 바라봤다. “우리도 뽀뽀해요!” 애인에 따르면 공공장소에서 나는 명실공히 트러블메이커다. 우리 관계가 깊어진지 두 달 정도 되었을 무렵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한창 흥행했다. 영화를 보러갔는데 사람이 꽉 찬 300석이 넘는 영화관에서 우리의 자리는 중간 복도 끝이었다. 내 옆은 복도였고 애인의 옆에는 우리와 나이대가 비슷한 여성과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분이 앉아있었다. 영화가 시작되자 나는 의자 걸이..
앞선 글 ‘#19 연말의 대전쟁’을 쓰고 처음 보여준 사람은 애인이었다. 당사자가 보기에는 너무도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보여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쁜 일을 서로에게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오히려 소외시키는 거라고 강조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전할 말과 못 전할 말이 있는 게 아닐까 고민스러웠다. 그 글을 읽으면 분명 나와 헤어지겠다고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 설사 헤어지겠다고 하지 않더라도 내 부모님이 본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니 속상할 것이었다. 누군가 나를 탐탁치 않아한다는 것도 그다지 기분이 안 좋은데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이 그렇다면 더욱 마음이 아플 터였다. 그런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하다니 가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
사건의 발단은 2019년이 3일 남은 12월 29일 저녁 식사에서 시작된 아빠의 반찬투정이었다. 엄마와 아빠, 나와 동생 모든 식구가 모여 밥을 먹는데 아빠가 코다리찜에서 비린내가 난다고 화를 냈다. 처음에는 가만히 있던 동생이 점점 강도가 세지자 맞붙어서 싸웠다. 그걸 말리려는 나와 엄마도 같이 소리를 질러 결국 부엌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동생과 아빠가 일찍 퇴장하고 식탁에는 나와 엄마만 남았다. 엄마가 은근하지만 굳센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아빠가 몸이 아프니까 저러는 거야. 아빠가 너네 이렇게 키워주느라 얼마나 고생했니. 얼른 아빠 손잡고 결혼식장 들어가야 은혜를 갚지. 이번 주에 남자 친구 데리고 와라.” 이 무슨 길 걷다 새똥 맞는 소리인지. 앞서 벌어진 상황과 엄마가 한 말이 전부 충..
또 실패했다. 엄마와 감정적으로 거리를 두겠다고 다짐해놓고 끌려다니고 말았다. 공기 반 소리 반의 ‘네니요’(네와 아니요를 합친 말)로 상황을 모면하려니 한계가 있었다.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점이 가장 답답했다. 앞선 글에서 너무도 많이 다루었던 주제라(5. 현실도피를 위한 공상, 7-9. 아빠친구딸의 결혼식 등) 쓰기 민망함에도 강하게 옥죄는 문제여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엄마가 자신의 끓어오르는 불안, 걱정, 분노 등등을 나에게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엄마를 벌집 쑤시듯 들쑤셨을까. 내 고등학교 동창이자 친한 친구의 결혼 소식(내가 직접 말했을 리 없다)을 들은 것이 시발점인가 싶었는데 그보다 한 주 앞서 시작됐으니 다른 이유였다. 엄마의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 자식..
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엉망이었다. 무언가가 매우 슬프고 화나는데 무엇 때문인지 몰라서 당혹스러웠다. 나는 누구고 무엇을 하는 중이었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어제를 살아낸 관성으로 시간을 버텼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전부 나를 기분 나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고 귀찮은 일을 나에게 미루려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뜻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평소 ‘정상적일 때’를 떠올려서 머리로 이해해야 했다. 납득은 잘 가지 않지만 내 기분대로 반응했다가는 큰 싸움이 일어날 거 같았다. 차라리 걸리는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하고 속을 푸는 것이 좋은 방법일까 싶기도 했는데 나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화가 더 잘 나는 것을 보고 그만 뒀다. 강한 사람들에게 화냈다가는 그저 나만 다치고 말 것이라는 걸 ‘본..
애인은 가끔씩 돌발 질문을 던져 놀라게 만들곤 했다. 이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달달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작스런 질문을 했다. “만약 내가 남자여서 나 닮은 아이를 낳아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에요?” 아기를 낳는 것에 대해 꽤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지라 입장은 확고했다. 질문을 듣자마자 생각이 주마등처럼 흘러갔고 당혹스러웠다. 애인과 내 뜻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아파서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쯤이었나 친한 사촌 오빠가 아기를 낳고서야 아기를 ‘나의 일’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동안 아기가 싫었기 때문에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친한 사람이 (나는 싫어하는) 아기를 낳다니, 당혹스러웠다. 그런데 아기가 왜 싫지? ..
애인에게 쓰는 편지인데 웹진에 올리는 것을 염두하고 썼습니다. 편지의 주인에게 허락을 받고 올립니다. 아직 당신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워요. 지난주 금요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 해명을 충분히 하지 못한 것 같아서 말이에요. 그동안 우리는 불안 질투 분노 좌절 같은, 관계에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일들을 겪고 나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진득하게 대화를 나누고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내곤 했어요. 서로 자신이 어떤 상황이었고 어떤 생각들을 했고 어떻게 느꼈는지를 설명하고 상대방이 정확하게 이해했는지를 확인하곤 했죠. 감정의 연원을 따라 내려가면 너를 사랑해서 그랬다는 것이 드러났고 부정적인 감정들을 말끔히 태워버릴 수 있었어요. 그러고 나면 당신과 더 단단하고 견고하게 엮인 느낌을 받았..
이 글이 업로드되는 날은 제 아버지 환갑잔치 전날입니다. 일가친척들을 모시고 잔치를 하는데 나름 이벤트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편지를 쓰기로 했습니다. 열심히 쓰긴 썼지만 잔치 자리에서 저는 이 편지를 읽지 못할 것입니다. 가족들에게 낱낱이 밝히기 힘든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니까요. 직접 말하지도 못할 거면서 뒤로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비겁한 짓이긴 합니다. 아버지 흉 보는 이야기라 더더욱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쓰지 않으면 속이 터져버릴 것처럼 답답해서 썼습니다. 개인적인 속풀이를 하게 된 점 죄송하지만 그동안 쓴 글들도 전부 제 개인적인 글이었으니 구애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저는 항상 제 글을 저희 가족이, 당사자가 보게 될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뒷감당을 할 수 있는지 말입니다. 염두에 ..
‘사람들의 성은 여성/남성이라는 젠더로 구분되어 있다’는 깨달음은 ‘사람들의 신체가 사실은 여성/남성이라는 성별로 구분되어 있다고 볼 수 없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과는 또 다른 층위의 문제고 심각하게 고려할 사항이었다. 아무리 옷차림과 외모를 성별을 뛰어넘어 따라할 수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여성/남성이라는 젠더는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으니 말이다. 외적으로 남성적으로 꾸미고 행동해도 결국 ‘여성’이라는 점을 강요받게 되는 때가 있는 것이다. 공중화장실이나 수영장에서 뿐만 아니라 온갖 서류들을 뗄 때, 병원에 갈 때, 결혼할 때, 회사에 입사할 때와 같이 매우 중요한 순간들에 말이다. 트랜스젠더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방식도 이런 것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었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놓인 이 벽은 어디에서 왔는지 궁..
1, 2편을 다시 읽어보니 ‘젠더’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부분이 눈에 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앞서는 성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다가 젠더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도입을 쓸 때까지만 해도 좋아하는 혹은 사랑하는 감정이 생겨서 관계를 만들어가는 문제는 너무도 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적인 관계의 두 사람은 숟가락/젓가락처럼 동등한 위치에 있으니 ‘성별’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갑자기 ‘남성, 여성의 구분은 젠더 문제잖아!’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성별 대신 젠더를 의식적으로 쓰기 시작하자 알 수 없는 불편함과 꺼림칙함이 끼어들었다. 이 꺼림칙함은 도대체 무엇인가. 여성/남성을 성별로 표현할 때와 젠더로 표현할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몇몇 문장을 통해 생각해 봤다. “나는 ..
이런 나를 양성애자라고 부르는 게 맞았을까? 단어를 엄밀하게 따져보면 양성애(바이섹슈얼)라는 말은 여성/남성 양쪽 성(性) 모두에게 성적 끌림을 느껴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하니 말이다. 내가 사랑에 빠진 것은 상대방의 성이 아닌 그 사람 자체였다. 아니, 그렇다면 그 사람과 성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성이란 무엇인가? 개와 고양이가 다른 생물종인 것처럼 남성/여성은 확고하게 존재한다고 보는 주장부터 남성,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논의가 있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다양하다는 말이 맞을까? 남녀는 각각 금성과 화성에서 왔기에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아주 오래된 시각이 사회의 주류를 이뤄왔고 그에 대항하는 시각들이 미미하게나마 생겨나는..
언젠가부터 자기소개가 참 어려워졌다. 내가 누구인지를 밝힐 때 말하는 것들, 어디에 살고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같은 것들은 말하는 지금에야 그렇지만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기자, 패션잡화MD, 선생님, 마케터 등으로 직종을 뛰어넘어 직업을 바꿔왔다. 지금 하는 일은 또 다르고 이 일을 언제까지 할지 그 후에 내가 무슨 일을 할지 장담하지 못하겠다. 직업으로 나를 설명할 수 없다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는 곳이나 음식 취향은 어떨까? 무엇을 말하든 한시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불편했다. 성적 지향이 무엇인지 정의내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느 긴 시간동안은 연애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고 어느 때는 남성을 만났으며 어느 때는 여성을 만났다. 이 모습들을 ..
아버지의 가장 친한 친구 딸의 결혼식이 있었다. 가족끼리 친하기도 해서 부모님이 나에게 결혼식에 같이 가자고 말했다. 안 그래도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사연 많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통에 부담스러운데 같이 가자니, 전혀 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결국 부모님 두 분만 다녀왔다. 그 후 가열차게 결혼하라고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웬일인지 시들시들했다. 아버지께 너무 가까운 사람이어서 그런지 감정이입이 많이 된 모양이었다. 좋은 것도 아니고 싫은 것도 아닌 복합적인 감정을 주는 듯 했다. 복잡한 눈빛으로 멍하니 앉아계시던 아버지가 나에게 혼잣말 같은 대화를 거셨다. “너 어릴 적에는 뽀얗고 예뻤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됐냐.” 지금 못생겨졌다는 말이기에 발끈해서 ‘내가 뭐 어때서?’라고 응수했다. 하지만 ..
결혼하기 싫으면 안 하면 되지 왜 별별 이유를 다 붙여서 결혼 안 해! 라고 외치는 것일까. 찬찬히 들여다보니 사실은 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었다. 애인과 데이트를 끝내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마다 같은 집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헤어지기 싫었다. 사회인이다 보니 주중에는 바빠서 주말에 겨우 만날 수 있는데 그조차 각자 약속이 있으면 만날 시간이 더 줄었다. 주중에도 볼 수 있었으면, 하루 일과를 끝내고 돌아가는 곳에 애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보고 싶을 때만이 아닌 싸울 때도 그랬다. 전화로, 텍스트 메시지로 소통하다가 다툴 때가 있는데 바로 옆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했더라면 싸우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이 결국 결..
아버지는 가끔씩 내게 결혼하라는 말을 던지곤 했다. ‘아빠 퇴직 2년 남았어. 그 안에 결혼해야 축의금을 회수하지’, ‘회사 가지 말고 시집이나 가’, ‘친구가 아니라 남편을 데려와야 할 거 아니야’ 등등. 그때마다 나는 왜 아버지가 나에게 결혼을 하라고 할까 궁금해 하며 그 이유를 추측하곤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부모라는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무 말이다. 아버지는 회사 다니는 것이 너무도 지겹고 힘들지만 ‘너희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는 내색을 내 평생에 걸쳐 하셨다.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물리적인 것도 함께, 성인이 된 후에는 정서적으로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물론 그런 것들이 회사 다니기 싫다는 뜻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등학생 때는..
많은 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쓰는 단어가 불편하고 거슬리는 것은 소수자가 겪는 일들 중 하나일 것이다. 매끄럽게 흐르던 대화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단어들이 이 생각 저 생각을 이끌고 상대방에게 전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검열하게 한다. 요즘 들어 더 생각하게 된 단어가 있는데,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줄여서 남친, 여친)’다. 성적지향을 인식하지 못했을 때는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지만 여성 애인이 생기는 순간 쓸 수 없는 단어가 됐다. 이성애자만이 남자/여자친구를 연인을 뜻하는 말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단어를 들을 때마다 이성애는 너무도 일상적이고 지배적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남자/여자친구 대신 ‘애인’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생긴 몇 가지 일화가 있었다. 첫 번째는 지..
어째 잠잠하다 싶더니 또 시작이다. 이전에는 서른네 살이었던 거 같은데 이번에는 서른여섯 살이다. ‘누가 바로 사귀라고 하니, 밥만 먹고 와. 이 남자 저 남자 만나봐야 할 거 아니야.’ 드라마 대사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어머니의 말에 간곡한 심정이 한 가득이다.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거지. 지금이야 젊다지만 늙어서까지 혼자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지 아니? 그러니까 얼른 만나봐.’ 내 얼굴만 보면 성화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내적 갈등 끝에 겨우 ‘만나는 사람 있어요’ 라고 대답했다. 누군지 당장 데려 오라신다. 누구인지 만나보면 기절하실 텐데. 어머니의 정신건강이 걱정되므로 내가 알아서 잘 만나고 있다고 둘러댔다. 피하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굴하지 않고 재시작이다. ‘밥 한 번 먹..
많은 사람들이 외모, 스타일, 사회적 지위 같은 조건들에서 로맨틱한 끌림(‘연애감정’이라는 단어는 연인이라는 계약 관계를 내포하는 느낌이라 피했다)을 느낀다고 한다. 나도 분명 그런 것들에 영향을 받긴 하겠지만 결정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사랑에 빠지려면 그 사람과 내가 통하는 지점이 있어야 했다. 고유한 이야기, 그리고 내가 그 이야기에 공명하는가가 사랑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성별도 조건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의문이 들었다. 그가 여성이어서, 남성이어서 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들을 듣고 내가 끌렸다면 나는 그 사람이 여성이어서, 남성이어서 사랑한 것 아닐까? 레즈비언의 성적 지향 이야기에 많이 끌리긴 하지만 남성의 경우에도 그가 가진 독특한 사고방식, 삶의 경험 이런 것들에 매혹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성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