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체(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과연 여자들에게 좋은 것일까? 내가 농구 하는 것, 스포츠 시장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해 생각하는 것, 공공장소를 점유하기 위해 부딪치고 맞서 싸우는 것, 학창 시절 운동장의 기억을 현재의 시간으로 불러오는 것 등 나의 고유한 경험을 말하는 것이 페미니즘 운동을 추동하는 동시대의 여자들에게 어떤 힘을 줄 수 있을까? 에세이는 응당 보편성을 획득하거나 진정성을 품거나 또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을 셀링 포인트로 삼아야 하는데, 이 연재는 세 가지의 조건을 충족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 글은 누가 읽는 것일까? 주변을 둘러보면 농구 하는 친구들은 정작 내가 쓰는 글에 별 관심이 없고, 오히려 스포츠라면 하는 것보다 보는 것에 가치를 두는 대학원생들이 읽..
아마추어 농구선수로서 코트 위의 나는 메인 캐릭터라기보다 부캐에 가깝다. 김신영의 ‘둘째 이모 김다비’나 박나래의 ‘조지나’같이 인종, 계급, 세대 등 특정 조건들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본캐와 부캐에 따라 주로 사용하는 얼굴 근육, 목소리 톤, 단어 선택, 그리고 걸음걸이 등 크고 작은 습관들의 차이가 발생한다. 캐릭터를 넘나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약간의 강박으로 사람들을 웃기는 걸 좋아하고, 상대방이 호감을 가질 것이라는 믿음, 일종의 데이터가 있기 때문에 적극적인 관계 맺기에 주저하지 않고 참여하려 든다. 어떤 공간에 놓였는가, 누구와 어울리는가,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치고 빠지는, 또는 새롭게 획득하는 습관들은 공동체 안에서 반복되면서 쌓여간다. 예컨대 철학자의 저서를 발..
* 계집애 던지기(throwing a girl)는 Iris Marion Young의 「Throwing like a girl」 (Bloomington: Indiana University Press, 1990)에서 ‘like’ 빼고 베껴왔다. 공을 던지는 최초의 기억을 떠올린다. 제 몸만 한 탱탱볼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어른들의 박수를 받는 유아 때의 사건 말고, 그러니까 내가 소녀였을 때 유효타를 날렸던 최초의 공놀이를 떠올려본다. 점심시간 이후의 수업은 언제나 졸렸지만 체육 시간에는 오히려 에너지 넘쳤다. 체육부장이었던 내가 준비 운동 동작과 함께 하나 둘 셋 넷 선창하면 반 애들이 둘둘 셋 넷하고 반복하는 것으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손목, 발목부터 허리와 골반을 골고루 비틀고 나면 관절이 열리고 무엇이..
스포츠의 타임라인은 갖가지 예측을 뛰어넘는 플레이의 출현이 쌓아 올려진 레이어라는 생각이 든다. 스포츠가 만들어내는 특유의 정동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면서도 동시에 불확실한 것들 사이에서 촉발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결과가 뻔한 경기보다 도저히 예측이 불가능한 경기의 결과를 좋아하고, 또 그보다는 강팀이 방심한 틈을 약팀이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 보란 듯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포츠의 순간들에 열광한다. 2019 NBA 파이널에서의 배팅률은 골든스테이트가 약 1.5, 휴스턴 로키츠가 약 3.5로 나왔지만 결과는 휴스턴의 승리였다. 예측 가능하지만 결코 불확실한 스포츠가 가진 자질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며, 특히 국가를 대표하는 스포츠의 경우 경기 데이터 베이스를 통해 올해의 우승부터 프로 선수의 연봉..
-1980년대 오정희 소설의 여성 신체를 다시 읽기 1. 낳거나, 낳지 못하거나, 낳지 않거나 1980년대 여성 소설을 다시 읽는 것이 새로운 여성서사를 요구하는 페미니스트 동년배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바로잡고 싶은 것이 있다면, 여성서사와 신체를 사유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한국문학/비평장의 일련의 문법을 거치면서 오정희 소설의 여성 인물의 신체는 아이를 지나치게 많이 낳거나, 낳지 못하거나, 낳지 않는 신체로 구분되면서 자연스럽게 여성의 삶과 출산이 나란히 배치되었다. 할머니-어머니-딸로 이어지는 여성성의 계보는 아이를 낳다가 낳지 않는 것으로 세대 간의 차이와 공통된 자궁의 가능성을 공유한다. 가부장제를 통과하지 않는 방식으로 여성의 신체를 읽을 수 없게 되어버려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거나..
최근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노래 부르는 사람을 보고 살인자가 될 뻔 했다는 트윗을 읽고 크게 웃었다. 그러나 금세 길거리에서 노래 연습하는 수많은 남성들을 무사히 지나쳐보낸 내 모습이 떠올라, 왠지 모르게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위협을 가하는 제스처를 한번도 제대로 취해보지 못했지만(아닌가? 어쨌든...)) 대부분 그들은 노래를 잘 못 불러서 소리 발산 행위의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고통스럽고 동시에 위협적이다. 타인의 분노를 일으켜도 실제로 죽임을 당하거나 적어도 신체에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확신이 부르는 노래는 구구절절 K발라드로 장르화되어 있어서 멜로디를 내뱉는 행위부터 가사까지 하나도 빠지지 않고 고통스럽다. 흥얼거림이나 포효하기로 차지하는 공적 공간의 점유는 길거리를 사적 공간..
1. 두 개의 섹스, 두 개의 신체 사진작가 하워드 샤츠(Howard Schatz)는 ‘ATHLETES’라는 작업에서 스포츠 종목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발달된 선수들의 신체를 한 줄로 나열했다. 사이클 선수의 허벅지, 수영 선수의 광배근, 레슬링 선수의 납작한 귀와 땅딸막한 체구, 농구 선수의 길쭉하게 붙은 종아리 근육 등 각기 다르게 발달한 신체를 통해 스포츠의 특징을 한 프레임 안에서 볼 수 있었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신체에 나타난 종목 간의 유사성인데, 비슷한 또는 같은 종목이라고 생각해왔던 종목들이 예상과 다르게 각기 다른 신체 발달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200m 육상 선수의 신체는 같은 러닝 레이스 종목인 마라톤 선수의 신체보다 오히려 농구 선수의 신체와 닮아 있었다. 특히 마라톤이나..
- 퀴어여성게임즈 후기 지난 9월 8일, 퀴어여성게임즈 3:3 농구 종목에 나가 우승을 했다. 2018년부터 개최한 퀴어여성게임즈는 종목에서 남/여 구분이 없고, 대회 취지에 동의하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나는 매년 4~5개의 전국대회와 서울시리그 등 농구 대회에 나가 뛰고 있지만 퀴어여성게임즈는 그렇고 그런 대회들과는 달랐다. 평등한 스포츠 문화 만들기에 앞장서는 취지에서 오는 차별점 이외에도 농구, 배드민턴, 풋살, 계주 4개의 종목을 한 장소에서 동시에 아우르는 시공간부터 모두를 응원하고 박수치는 다정한 분위기까지 여러모로 굉장히 새롭고 놀라웠다. 기존에 출전했던 농구대회는 아무리 아마추어 대회라고 해도 출전하는 모든 팀이 우승과 트로피를 원했다. 잘하면 박수 받지만 실력이 없으면 출전 시간을 ..
언제부터 스스로 브라를 찾아 입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기억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노브라로 등교하는 나에게 아침마다 엄마는 아동용 스포츠 브라를 현관까지 들고나와 흔들었다. 학교 가는 것은 좋았지만 등교 시간은 지긋지긋했다. 겨울에는 그나마 방한용으로 괜찮았지만 쉬는 시간 틈틈이 운동장을 뛰어다니던 여름에 몸에 무언가를 더 하나 걸치는 것이 아주 싫었다. 어쩌다 입고 나오는 날이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몸을 티셔츠 안으로 꼬깃꼬깃 접어 1층까지 내려가는 동안 후딱 벗어 가방에 넣었다. 나는 복도와 운동장을 뛰어다니는 정신없는 초딩이었기 때문에 스포츠 브라를 입으면 왠지 머리가 잘린 삼손이 된 듯 힘이 빠졌다. 하루는 점심시간 축구 경기 중에 공을 두고 몸싸움을 하다가 넘어졌다. 나는 짜증이 났지만 스포츠..
내가 어릴 때 가지고 놀았던 아기 인형을 생각하면 그것도 꽤 리얼했다. 피부는 딱딱했고 팔다리의 관절은 섬세하지 않았지만, 누이면 눈을 감고 세우면 눈을 떴으며 찌르면 울음소리를 냈다. 유모차부터 침대까지 육아 놀이 풀세트를 유치원 크리스마스 행사 때 산타에게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포장지를 뜯기 전까지 커다란 상자의 압도감에 기분이 좋았지만, 포장지를 뜯고 나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던 똘똘이(미미월드의 인형 이름)를 보고 나는 울음을 터트릴 뻔했다. 올해 6월 한국 대법원이 리얼돌 수입을 허가하면서 리얼돌 판매 금지 청원이 23만명을 돌파했고 리얼돌이 성기구인지 또는 포르노인지에 대한 토론이 온라인에서 뜨겁게 이어지고 있다. 재료를 다루는 기술이 발전할수록 조각난 신체의 기관들이 만드는 인위적인 이미..
3. #농구하는여자 전국농구연합회의 NABA 규칙에 문제점을 느낀다면 아마추어 대회나 동호회 정기 모임에서 로컬룰을 적용하면 되는 것 아닌가. 우리 팀은 선수 출신과 외국 국적의 선수가 많아서 대부분의 선수들이 이러한 규칙에 문제를 느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을 바꾸는 것은 역시 쉽지 않다. 농구 규칙 안에서 배려의 이름으로 배제와 차별로 작동하는 정상규범의 문제들에 대해 농구 경력이 긴 두 명의 선수 출신 농구인 고인물(가명, 27세), 조상(가명, 26세)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허주영(이하 허): 본인의 농구 경력을 간단하게 말씀해 주세요.고인물(이하 고):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농구를 시작했고 숭의여중, 숭의여고에서 선수활동을 하다가 1학년 때 그만두고 성인이 된 후에 본격적으..
1. 장미란도 “남자”한테는 당연히 진다. 옆 테이블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힘 센 여자=장미란도 “남자”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총 326kg의 기록을 세운 장미란은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에게 무조건 진다는 말이다. 그가 말하는 남자는 무엇일까. 실체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납작한 강자와 약자의 도식을 공공장소에서 무방비 상태로 듣고 말았다. 어떻게 저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까. 과연 ‘모든 남자한테 진다’라는 말처럼 ‘나에게도 진다’라는 말도 감히 할 수 있을까. “남자”라는 기표에 은근히 자신을 포함 시키면서 여성을 객체의 위치로 끌어내리는 방식으로 주체성을 획득하는 모습은 아마 우리에게 익숙할 것이다. 이브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