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 님께, 정수 님, 요즘 하늘 보고 계신가요? 밤에만 산책을 다니셔서 가을의 아름다운 하늘을 보지 못하셨을까 괜한 염려를 하고 있어요. 저는 며칠 전 2차 백신까지 모두 접종을 완료했어요. 왜인지 백신을 맞고 나니 더 돌아다니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서 하루에도 한강을 몇 번이나 걸었는지 몰라요. 어제는 자전거를 좀 탔는데, 나무그늘 아래를 지나가면 제법 서늘한 공기가 훅 끼쳐서 귀가 시렸어요. 하지만 가을은 밤이든 낮이든 아름다운 계절이니 정수님의 요즘 밤 산책에는 또 다른 묘미가 있겠죠? 며칠 전에 오랜만에 이상한 꿈을 꿨어요. 꿈속 세상이란 게 늘 이상한 일투성이지만, 그날의 꿈은 좀 특별했어요. 이젠 기억이 가물가물해졌지만, 제 시선이 닿는 저 끝에서 끝까지 아주 거대한 수조가 저를 둘러싸고 있었..
다정한 은수 님께 모든 게 흘러내릴 것 같은 더운 날이 계속되고 있네요. 잠깐 외출해도 마스크 안이 땀으로 범벅되는 게 너무 싫어요. 요즘 마음은 너무 혼란스러운데 무료한 날을 보내고 있어요. 일도 손에 안 잡혀서 해야 할 일을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 있기만 해요. 너무 심심한데 아무도 만나기가 싫고요. 조금쯤 충동적인 상태이면서 자극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요. 왜 이렇게 답답한지 잘 모르겠어요. 한 달 정도 자기 전에 게임을 하고 잤는데요. 게임에서 친구가 한 명 생겼어요. 어쩌다 보니 처음으로 음성으로 대화하며 게임을 하게 됐고 사적인 대화도 나누며 친해진 거예요. 근데 이 친구가 이성이기도 하고 늦게까지 같이 노는 경우가 많다 보니 배우자가 싫어했어요. 그래도 제가 워낙 재밌어하니 적당히 알아서 하라..
정수 님께, 정수 님, 잘 지내고 있어요? 요즘 공포영화 생각이 진짜 많이 나요. 사실 저는 영화를 볼 때 장르를 가리진 않는 편인데도, 공포영화는 좀처럼 보지 않는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정수님이 공포영화 얘기를 종종 하셔서 그런지, 저도 덩달아 공포영화를 많이 보게 되고 관심도 많아진 것 같아요. 특히 지금 보면 참 엉성한 옛날 공포영화 같은 거요. 나름 그 재미를 알게 되었달까요. 그러고 보니, 작년엔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주연으로 나온 영화 를 보러 갔잖아요. 아주 웅장하고 멋진 수중괴물이 나오는 데다, 마지막에 여성이 세상을 구하는 내용이라서 둘 다 무척 마음에 들어 했었죠. (여성 버전의 국뽕 없는 아마겟돈 같달까) 올해는 또 어떤 공포영화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무척 기대돼요. 이제 공포영화..
은수 님에게 요즘 날씨가 많이 더워진 게, 여름이구나 싶어요. 전 여름을 즐기지는 못하지만 여름만의 붉고 푸른 에너지를 구경하는 건 좋아해요. 여름 하면 선풍기를 틀어놓고 TV를 보면서 수박 먹는 풍경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전 길치라서 길을 자주 잃곤 하는데요. 제 어릴 때 뜨거운 여름날 길을 잃어서 헤매다가 가파른 육교를 오르던 중 너무 힘들어서 눈물이 찔끔 나왔는데, 그때 수박을 먹는 그 장면이 머릿속에 가득했어요. 가끔 힘들 때는 종종 그 육교를 오르는 꿈을 꿔요. 여름밤의 추억들도 떠오르네요. 홍대 놀이터2(라고 우리는 불렀던 공원)에서 친구들과 밤을 새우던 기억이요. 그곳은 바로 제 집 앞에 있어서 저의 주요 서식지였죠. 정말 다양한 사람들과의 추억이 가득해요. 돈 없는 우리의 만남의 장소였..
바쁜 꿀벌 정수 님께, 정수 님, 요즘 많이 바쁘시죠? 바쁜 와중에도 며칠 전 실의에 빠진 저를 위로하러 한 걸음에 달려 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정수님을 볼 때마다 얼른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다짐하는데 참 쉽지 않네요. 무기력함을 느낀 지 어언 1년 남짓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아요. 우울증과 공황 장애로 인해 찾았던 병원을 다니는 동안 스스로도 인정했던 것이 번아웃이었는데, 나아지는 듯 아닌 듯 더딘 변화를 느끼며 살고 있어요. 현재 근무 중인 회사를 다닌 지도 어언 8년 차가 되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있냐 깜짝깜짝 놀라곤 하는데, 지나온 시간을 돌아봤을 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인 것 같아요. 처음엔 인턴으로 입사해 1년 후면 재계약이 되지 않을 거란 말에..
식물 집사 은수님께 은수님 오늘 편안한 하루 보내고 계세요? 요즘 식물들과 사랑하느라 바쁘신 걸로 아는데 뭐든 사랑한다는 건 참 좋은 일인 것 같아요. 저는 딱히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 건 없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미워하는 것도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져서 배우자와 밤 산책도 종종하고요. 산책하다 은수님의 집 앞을 지나가게라 되면 은수님은 지금 뭐하고 계실까 생각도 해요. 최근에는 은수님이 직업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셨는데 저도 비슷한 고민을 조금 하던 중이었어요. 올해 들어, 안 그래도 없던 일감이 더 줄어드니 저의 부족한 능력을 탓하게 되고 마음이 초조하더라고요.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때 학교에서 미래에 내가 어떻게 되어 있을지를 상상해서 나이대 별로 적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저..
정수 님께, 정수 님, 설 연휴 잘 보내셨나요. 저는 근 반 년 만에 본가에 다녀왔어요. 오랜만에 산에도 오르고, 이제 곧 떠날 채비를 하는 백조들도 보았어요. 어떤 밤엔 동생과 긴 산책을 다녀오기도 했고요. 왜인지 뿌연 밤이었는데, 가로등 불빛 앞에 선 메마른 가지들이 생각나요. 산책 나온 사람도 거의 없어서 그 텅 빈 공간을 미친 듯이 달렸다면 아주 후련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요즘 저는 일상을 견디고 있어요. 뭐든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될 때도 있지만, 때때로 이렇게 벽에 가로막힌 듯한 느낌이 깊숙이 밀려올 때가 있어요. 저를 둘러싼 환경이 영영 바뀌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 매일 경악스러운 뉴스가 쏟아져 나오지만, 저는 그저 정해진 일정대로 일상을 반복하고 있어요. 제가 밥을 먹고 ..
은수 님에게, 올해 첫날은 하루 종일 잠만 잤어요. 잠깐 깨서 배달 음식을 먹고 게임기를 켜서 게임 속 동물 친구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다시 잤죠. 그 전날, 전전날부터 계속 그랬던 거 같아요. 작년의 끝과 올해의 시작은 “잠만 잤다”가 되겠네요. 작년은 유행병이 돌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힘든 해였고 저는 또 별개로 엄마의 유방암 진단으로 건강에 대해 많이 공부한 해였어요. 그러고 보니 작년에 가장 많이 간 곳이 세브란스 병원과 서울역이었네요. 엄마의 보호자가 되는 게 힘들기도 했지만 내가 누군가를 위해 고생한다는 사실, 아니 다들 고생한다고 생각해줄 거라는 사실에 조금 만족했던 것 같기도 해요. 제 마음을 돌아볼 때마다 복잡한 기분이 듭니다. 글의 시작부터 조금 우울한 분위기가 풍기지만, 이렇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