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7 사랑하는 삶(1)

삵은 자신을 건 사랑을 했다

 

  “그냥, 싫어졌어.”

  그 한마디로 사랑이 끝난 적 있다. 방황에 방황을 거듭하던 열여덟 살의 끝 무렵에 만난 사랑이었다. 그와 나의 사랑은 72일로 그렇게 막을 내렸다. 나는 그를 만나면서 나의 지난날을 전부 이야기했다. 그 일들이 어떤 일인지 나도, 그도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 잘못은 아니라고 처음 말해준 사람. 열 몇 시간을 통화하고도 말이 끊이지 않았던 그와 나. 아침에 눈을 뜨면 너무 행복해서 셀카를 찍어두던 시절. 반면에, 사랑을 잃어버린 고통에 대해 처음으로 느끼게 해 준 사람. 이별 후 비루하게도 매달리던 나와 그런 나를 차갑게 비웃던 그. 눈을 뜨는 게 고통스러워서 배 아래 쪽부터 울려 나오는 울음을 쏟던 시절. 첫 연애는 아니었지만, 나의 첫사랑이었던 그와 나의 이야기.

  그와 내가 만나온 이야기보다 헤어지는 과정과 그 이후에 대해 더 쓰고 싶다. 어쩌면 나에게 그는 만남보다 이별의 의미가 더 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함께 썼던 메신저의 커플 상태 메시지를 지웠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 전화한 내게 이별을 고했다. 그냥 싫어졌다는 그 짧은 한마디로 마무리된 통화를 끊고, 내 눈앞은 저린 다리처럼 잡음이 끼었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고 또 갑자기 울음이 새어 나왔다. 발은 오갈 데 없이 여기저기에 보이지 않는 발자국을 찍어댔다. 머리는 윙윙 울리듯 멍했다. 그 밤은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발코니에만 노랗게 불이 켜진 내 작은 방과 그 안을 헤집듯 헤매던 내 모습뿐이다.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배 아래 쪽부터 터져 나오는 눈물을 꺼이꺼이 쏟아냈다.

  그 이후로도 내 몸과 마음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에게 연락을 계속하고, 그가 살던 경기도까지 찾아가고, 달라는 대로 돈을 주고, 비웃음을 당하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매달렸고 또 매달렸다. 기어이 그에게 욕을 들었고 그렇게까지 상황을 만든 내가 미워서 방황하고 또 방황했다. 자해를 시작하고 담배를 시작하고 끊임없이 남자를 만났다. 나는 나를 완전히 저버렸다. 그와의 이별은 왜 그리도 힘들었을까. 단순히 처음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안 될 정도로 이별 그 자체에 과몰입된 상태였다. 나는 그를 사랑하던 내 모습이 좋았다. 아침마다 퉁퉁 부은 얼굴에 띤 미소를 셀카로 남겨뒀을 정도였으니까. 그를 만나기 전까지의 삶과 내 과거에 대한 의문들과 끝없이 추락하는 자아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를 만나고 나서는 나 자신과 모든 것이 선명해진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를 만나는 중에도, 이별 후에도 오직 나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별 후 그가 단 한 번도 밉지 않았던 것만 봐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나와 만날 때도, 나와 헤어지고 나서도 나에 대해 온갖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그에게 비참하게 매달렸을 때 그는 내게 지칭할 수 있는 가장 더러운 욕을 했다. 만나는 중에는 내게 무리한 성적 요구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를 단 한 번도 미워하지 않았다. 내가 그를 그렇게 행동하게 했다고 생각하고 나 자신을 더 미워했다. 얼마나 오만하고 자기만 바라보는 사람인가. 그의 행동까지 전부 내 탓으로 돌리다니. 그를 정말로 사랑했다면 이별 후에 그를 미워하거나 혹은 적어도 그에 대한 감정을 품었어야 한다. 나는 오직 나에 대한 미움만 가득한 이별을 했다. 그와의 이별은 나와의 이별이었다. 그의 옆에서 행복했던 나 자신과의 이별.

  그만큼 아팠을 것이다. 내게 그를 만난 건 숨을 얻은 것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에. 죽어가던 나를 다시 살린 숨. 그때는 그가 내 세상의 전부였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느낀 느낌들. 그를 사랑하며, 그와 이별하며. 그런 시절을 겪었다는 건 그래서 행운이자 비극이다. 모든 것을 걸 수 있었기 때문에 행운이고, 그만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비극이다. 나는 나의 존재 자체를 그에게 걸고 있었다. 자아상조차 제대로 가질 수 없는 자만이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건다. 자신을 건 사랑은 낭만이 아니라 비극이다. 사랑이라는 불확실성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는 자의 비극. 당시에 쓴 글에 나는 이런 표현을 썼다. 벼랑 끝에 있다가 누군가가 나를 평지에 내려놨는데 사실은 그게 꿈이었고 나는 여전히 벼랑 끝에 서 있다는. 그게 내가 느낀 나였다.

  한참을 힘들어했다. 이 뒤에 쓸 다음 사랑을 만나기 전까지 한참을. 이별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깊게 느꼈다. 그럴 법도 하다. 나 자신과의 이별이니 아픔이 깊을 수밖에. 그와의 사랑보다 그와의 이별이 내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도 그만큼 아팠기 때문일 것이다. 왜 나는 나의 자리에 그를 놓았을까. 그리고 왜 그 공간을 나로 다시 채우지 못했는가. 왜 나는 처음부터 나 자신조차 제대로 갖지 못했을까. 지금의 나는 나를 제대로 가지고 살고 있는가. 의문이 든다. 내가 겪었던 폭력의 시간만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타고난 기질이 그러했던 것일까. 어쩌면 애초에 설명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그렇듯이.

  나의 첫 번째 사랑은 이러하다. 추락하던 나를 그로 채운 사랑과 이별. 그를 만나면서는 참 행복했다. 같이 많이 울기도 울고 웃기도 많이 웃었다. 그는 내 이야기를 처음으로 귀 기울여 들어줬고 나도 그에게 그러했다. 우린 서로에게 분명 의지가 됐을 것이다. 적어도 나한테 그는 큰 의지가 되어줬다. 그와의 사랑이 정말로 그와의 사랑인지, 아니면 그를 사랑하던 나 자신만의 사랑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때의 내가 느낀 감정들이다. 사랑하던 순간, 그리고 이별하고 난 후의 내 느낌, 감정, 생각들. 사랑이라는 것은 삶이 그러하듯이 주관적인 것이니까. 그리고 주관적인 그때의 사랑과 이별을 해낸 나는 텅 비어있지 않은 나 자신이었다는 것도. 주관과 느낌은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나로부터 느껴지는 사랑이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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