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9 사랑하는 삶(3)
- 암삵의 삶: 위단비(연재 종료)
- 2020. 1. 31. 12:05
삵은 있는 그대로를 나누는 사랑을 했다.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직감은 했다. 우리는 언어적 소통을 통한 관계 이상의 관계가 될 거라는 것을. 그와의 첫 만남, 노래방에서 음정을 틀리고 어쩔 줄 몰라하는 그의 모습에서 진부하고 또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의 영혼을 보았다.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보였으니까. 서툴고 솔직하고 그래서 이리저리 다쳤지만, 그런 그의 모습 그대로 여지껏 살아남은 그의 영혼이. 아니, 이렇게 말로 표현하는 것으론 내가 본 것이 다 담기지 않는다. 마치 사과의 맛을 아무리 언어로 표현한다 한들 그 맛이 느껴질 수는 없는 것처럼.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발견과 소통을 나눈 관계, 그와 나의 사랑이다.
우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알 수 없는 일들이 우리에게 참 많이 일어났다. 신기하고 이상한 일들. 하루는 지하철에서 앞자리에 앉은 아이가 먹던 상어밥을 우리 둘 다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를 마주 보았는데, 서로의 눈빛 속에서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맛.있.겠.다.’. 한 글자 한 글자 너무 선명하게 보여서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사랑을 고백했던 때도 떠오른다. 분명 서로에게 그 말을 하고 싶은데, 그 마음이 서로에게도 선명히 보이는데 왜인지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말하고 들을 수 있었던 말이었다. 그가 내게 ‘사랑해’라고 말하는 순간 그의 주변엔 알 수 없는 색깔들이 펼쳐졌다. 내가 그에게 ‘사랑해’라고 말하는 순간엔 그의 눈앞에 ‘사랑해’라는 글자가 점점 커지듯 다가왔다고 한다. 우리에겐 참으로 낯선 감각이었다. 그가 느낀 감각은 평소에 내가 느끼는 감각이었고, 내가 느낀 감각은 평소에 그가 느끼던 감각이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마음을 담아 말을 전하다 보니 감각을 공유한 것 같다고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사랑은 주관적이라고 지난 이야기에 쓰긴 했으나, 이쯤 되면 나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싶다. 우리만의 느낌에 대한 이야기밖에 쓸 수 없으니 말이다. 채 담을 수 없는 이야기를 언어에 담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랑’이라니. 우리끼리의 느낌과 우리끼리의 결론을 언어에 담으려는 시도가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일까. 언어는 분명 한계를 가지고 있다. 언어에 담긴 뜻은 언어 그 자체와 연결성만 가지고 있을 뿐 직접적인 표현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단어는 어떤 대상을 일컫는 말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대상이 어떤 색깔이고 어떤 모양인지는 사람마다 조금씩 제각각 다르게 떠올린다. 그에 비해 그와 나는 이를테면 ‘사과’라는 단어가 아닌 사과의 모양 자체를 서로에게 전달하는 식의 의사소통을 나눠왔다. 언어적 한계에 부딪히지 않는 비언어적 소통 방식을 나눠온 것이다.
그러나 최근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직면할 수 밖에 없었다. 언어가 가지는 이점은 과정을 목격할 수 있다는 지점이다. 언어는 실제 언어가 담고 있는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 만큼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대상에 가까워지려는 끊임 없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때로는 쉽지 않고 많은 경우 완성되지 않지만, 과정을 목격함으로서 A가 왜 A인지 설명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는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지만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관계를 형성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나는 왜 이렇고 너는 왜 이런지, 그래서 우리의 관계는 어떠한지 언어적 소통을 통해서 점차 규명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나는 언어적 소통으로 서로의 관계를 시작하지 않았고 관계의 과정마다 비언어적 소통을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서로와 각자와 관계에 대해 설명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과 밀접하다. 이해한다는 것은 순간적이고 결론적인 것이 아니라 서사적이고 과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설명이 그러하듯이. 우리는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부분이 있지만, 서로를 그만큼 이해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렵다. 서로의 모습이 보이는 만큼 그 모습들을 감안하거나 받아들이려고 애쓰기만 한다. 그와 나는 가끔은 눈을 감을 필요가 있다.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오직 언어로만 소통할, 아니 적어도 언어를 중심으로 소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핑퐁을 통한 대화. 주고받음으로써 서로를 조금씩 이해해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순간들이 결론뿐 아니라 과정이기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적어도 서로를 이해해야 하는 순간들 만큼은.
그래서 우리는 연습을 했다. 서운했던 사건들을 복기하며 서로의 입장을 모른다는 가정하에 언어적으로 소통해 보려고 한 것이다. 쉽지 않았다. 그는 중간에 머리가 아프다며 그만두려고 했고 나 또한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미 있었던 일을 가지고도 이렇게 어려운데 실시간으로 서운한 일이 생겼을 때에는 과연 연습한 대로 진행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분명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대화하면 우리가 분명 싸우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연습이라서 그런지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이렇게도 우리가 대화할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약간의 확신이었다.
설명을 통한 이해는 확신을 만든다. 과정을 목격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단계를 밟아나간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건물의 토대와 기둥과 천장이 쌓아 올라가는 모습을 목격한다면 그 건물에 대한 신뢰도 또한 올라갈 것이다. 우리의 관계는 건물의 외벽을 만지면서 시작됐지만, 이제는 토대가 올라가는 모습을 이해하고 목격하는 단계에 와 있다. 나는 늘 불안과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다가 우리가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예감.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예감은 아니었다. 서로의 모습을 감안하고 감당하다가 어느 순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는 헤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언어로써 대화하려는 시도는 나의 불안을 어느 정도 잠재워 줄 것이고 그와 나 서로에게 서로를 이해할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다.
그와 나의 사랑은 이러하다. 서로를 첫눈에 알아보고 받아들였고 이제는 서로를 이해해가려는 사랑.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한들 우리가 우리를 알아본 것의 가치가 훼손되진 않을 것이다. 그에게 반했던 순간이 있다. 죽고 싶다고 그에게 울면서 매달렸을 때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정말로 죽고 싶을 때는 안락사할 수 있는 나라로 가는 비행기표를 내가 끊어줄게. 정말로 죽고 싶어지면 이야기해. 대신에 지금은 아닌 것 같아.”
나의 죽음마저 받아들이고 그 순간에조차 나의 편안함을 바란 사람. 내가 본 그는 그런 사람이다.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 우리의 사랑과 낭만은 그것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이제는 서로의 관계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쌓아 올릴 용기를 가져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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