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25 개인주의자적 삶(6)

    암삵의 삶을 연재한 지 1년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라는 개인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덧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장과 장을 연결하는 ‘개인주의자적 삶’ 시리즈에서 나는 ‘나’라는 개인의 면면들을 연결하고 통합하고 싶었다. 그게 잘 되어 왔는지는 모르겠다. 마지막 ‘개인주의자적 삶’을 쓰기에 앞서 지금까지 써 왔던 ‘개인주의자적 삶’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각각의 이야기마다 그래도, 적어도 개인주의에 대한 내 생각이 담겨 있긴 한 듯 같다. 그 사실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다르다는 사실’, ‘언어 뒤에 감춰진 불확실성’, ‘폭력의 정체’, ‘주관적인 사랑과 삶’, ‘생각과 표현’. 지금까지 개인주의자적 삶을 통해 다뤄온 이야기들이다. 다르다는 사실을 통해서는 개인을 인지하는 것을, 언어 뒤의 불확실성을 통해서는 구분되지 않는 개인의 고유함을, 폭력을 통해서는 개인의 존재적 투쟁을, 주관적인 사랑과 삶을 통해서는 삶을 ‘나’로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생각과 표현’을 통해서는 개인의 발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결국은 이 모든 이야기를 통해 한 개인이 독자적 삶을 살아나가는 데 필요한 것들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 ‘개인의 삶’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내게 개인주의는 어떤 의미일까. 사회의 울타리에서 튕겨 나온 14살 이후 ‘나’라는 개인은 늘 내게 화두였다. 내가 튕겨 나온 울타리는 ‘올바른 청소년’이라는 울타리였다. 올바른 청소년이라면 교우 관계가 좋고 공부를 그럭저럭 열심히 하며 ‘성 경험이 없어야 한다는 인식’. 내가 14살 때 겪은 성폭행은 당시의 사회적 기준에서는 성폭행으로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당시의 인식에서 나는 ‘성폭행 피해자’가 아니라 ‘성 경험이 있는 청소년’이었다. 그 경험으로 인해 말 그대로 울타리에서 ‘튕겨 나온’ 나는 울타리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나를 보호할 수 없었다. 그저 자발적으로 울타리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행동하는 것만이 그 상황으로부터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의 일로 나는 강제적으로 심리적 독립이 된 것 같다.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한 경험으로 인해 부모의 자리가 내 안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때는 부모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고만 생각했지만, 그 밑바닥에는 부모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 사실 진작에 내 안에는 부모의 자리가 없었던 걸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나는 그 일로 인해 가족이나 사회와 규정으로부터 분리된 ‘나’라는 개인에 대해 전보다 더 치열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규정하던 ‘평범한 혹은 모범의 학생’, ‘좋은 딸’이라는 타이틀은 더는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울타리에서 튕겨 나와 처음 든 감정은 절망감이었다. 학교생활은 무척 어려웠다. 친구들에게 이질감을 느껴 어울릴 수 없었다. 여중, 여고를 나온 나는 교사들이 수시로 말하는 성 경험과 폭력에 대해 들어야만 했다. 어떤 교사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너희 눈빛만 봐도 남자친구랑 어디까지 갔는지 다 보여.’ 그 눈빛 앞에서 얼마나 숨고 싶었던지. 청소년이라는 울타리, 집단 내에서 나는 숨겨야 하는 치부 같은 존재였다. 그 사실이 주는 절망감 다음엔 세상과 자신을 향한 분노를 느꼈고, 그다음엔 세상과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그 모든 과정을 지나서 나는 비로소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울타리는 사람보다 우선일 수 없다는 것을. 울타리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사람, 즉 개인이 우선이어야 된다는 것을. 이를테면 내게는 청소년이라는 집단보다 그 안에 속해 있는 ‘나’라는 존재가 우선이라는 것을. 모든 사회적 집단은 집단의 구성원들로 이뤄져 있다. 당연하게도 집단의 구성원들은 전부 개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자주 잊어버린다. 집단을 하나로 묶어버리는 사고방식. ‘구분되지 않는 삶’에서 이야기한 구분의 사고방식이다. 구분의 사고방식 아래에서 개인은 집단의 그림자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거기에 있다. 집단의 그림자에 숨겨져 개인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 집단은 공통점으로 묶여있다. 가족, 나이, 성별 등의 공통점들. 그리고 각각의 공통점 사이에는 위계가 발생한다. 차별과 폭력은 여기에서 발생 된다. 공통된 특징, 각각의 특징들이 만들어낸 위계를 너무 과대평가해 버리는 것이다. 한 사람을 규정짓는 하나의 공통점으로 그 사람의 모습을 가려버리는 것, 그게 차별이다. 차별은 폭력을 낳는다. 가정 내에서도, 사회 속에서도. 부모와 자식 간의 위계,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위계, 성별 간의 위계, 힘의 위계, 나이의 위계. 위계는 힘을 가져다준다. 힘을 가진 이가 사람을 물화시키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기보다 공통된 특징으로만 대하게 되고, 그것이 폭력을 만드는 것이다.


    차별과 폭력에 신물이 난다. 내가 분절되어 각각의 조각들이 이곳저곳에서 뜯어먹히는 그 기분. 내 몸은 이곳저곳에 흩뿌려져 있다. 흩뿌려진 몸들을 주워 모으려는 시도가 암삵의 삶 연재의 시작이었다. 연재가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 나의 파편들은 얼마나 서로 다시 만났을까. 나는 지금 ‘나’로서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한 명의 개인으로 잘 살아가고 싶다.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고 싶다는 욕망. 분절되어 있던 내게 이 욕망은 거추장스럽고 날 괴롭게 하는 것이었다. 나의 조각들이 뜯어 먹히게 내버려 둘 수 없게 했으니까. 그러나 지금의 내게 이 욕망은 흩뿌려진 조각들을 모을 수 있는 힘이 되어 주고 있다.


    나의 파편들은 어쩌면 죽을 때까지 완전히 하나로 모이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내 중심에 있는 나의 핵은 죽는 날까지 나와 함께할 것이라는 거다. 연재를 시작하던 시점보다 지금의 나는 그 핵을 더 잘 느끼고 있다. 나라는 존재의 핵. 나를 주도적으로 살게 하는 힘. 내 몸이 조각나고 뜯어먹혀도 절대 훼손될 수 없는 것. 아주 오랫동안 내가 잊고 살았던 것. 어쩌면 많은 사람이 잊고 살아갈지도 모르는 사실. 내 안에는 나를 살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핵이 있다는 것. 훼손될 수 없는 개인의 존엄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들을 수도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나의 존엄성, 그리고 존엄성이라는 단어 안에 미처 담을 수 없는 존재적 가치는 죽는 날까지 나를 나로서 살아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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