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24 생각하는 삶(3)
- 암삵의 삶: 위단비(연재 종료)
- 2020. 5. 8. 00:39
삵은 자신을 위한 생각을 하고 싶었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아는 것은 어렵지만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느끼는 건 상대적으로 어렵지 않다. 나의 몸과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하나로 통합하여 ‘나’라는 존재를 느끼는 것. 감정과 몸은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에 ‘나’를 느끼는 것은 나의 감정과 몸을 느낌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러나 내가 ‘나’라는 당연한 그 느낌이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다. 내게는 조울증 말고 또 다른 병명이 있다. ‘경계성 인격장애’가 그것이다. 경계성 인격장애는 만성적인 공허감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흐릿한 자아감과 연관되어 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느낌이 덜하다 보니, 그 자리를 공허가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내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건 스물세 살 때 처음 알았다. 당시 상담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상담 선생님이 내게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는 말을 한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감정을 지나치게 잘 느끼는 게 문제라고 생각했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들이 나를 덮쳐온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흔히 말하는 감정 기복이라는 게 심한 편이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감정 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감정을 잘 느껴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내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감정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감정을 제 때에 알아채지 못하는 것. 내 고질적인 문제다. 열네 살의 성폭행 피해 경험에서, 나는 해리 증상을 경험했다. 그것은 마치 유체이탈을 한 듯이 내가 내 몸에서 빠져나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 몸을 내가 제어할 수 없고 내 감정을 내가 느낄 수 없는 상태. 해리 증상은 그 뒤에도 두어 번 정도 나를 찾아왔다. 이는 경계성 인격장애의 한 증상이기도 하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나 경험이 찾아올 때 해리 증상이 발생한다고 한다. 해리 증상까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도 나는 대체로 내 감정을 제대로 느끼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이다.
내 감정의 빈 자리는 공허와 생각이 채우고 있다. 예전에는 공허보다는 생각이 차지하는 영역이 훨씬 컸는데, 요즘에는 공허가 차지하는 영역이 더욱 크다. 다행인 것은 약물치료를 시작하면서 그 자리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생각과 공허가 채우던 감정의 빈자리가 사라지니 감정 기복도 줄어들고 나는 좀 더 평온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실이 내게 두려움을 갖게 하기도 한다. 30년을 가지고 있던 빈자리는 빈자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또한 나를 채우고 있는 나의 일부분이었다.
채워짐은 빈 부분이 사라진다는 것과 같다. 사라진다는 건 비워지는 것과 비슷하다. 나의 공허감은 비어가고 있다. 비어가는 공허감을 부여잡고 있고 싶지는 않지만, 새로운 국면이란 늘 두려운 것이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 변화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의 부족. 변화는 늘 인생의 옷자락에 꼬리표처럼 달려 있다. 그리고 그리움의 발자국을 남긴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그리운 게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게는 30년 치의 그리움이 쌓여 있다. 얼마 전 죽은 내 친구는 뭔가를 그리워하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그리울 것들을 많이 만들어야 해.’ 상실과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큰 내게 현재와 미래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 말이었다.
시선을 과거에서 현재로 되돌려야 한다. 내 생각들의 화살표는 현재나 미래보다는 과거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의 일과 이유에 관한 생각들. 그 생각들은 날 괴롭게 하는 생각들이었다. 반면에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하는 생각들도 있었다.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생각들이었다. 위기상황에서 감정을 가로등 삼아 내 생각의 길을 비춰본 경험들. 할 수 있는 것들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내고, 최선을 다해 현재에 임하기 위해 머리를 굴린 일들. 변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 지금의 내게 필요한 것은, 내게서 사라져버린 것들을 붙잡지 않고 현재의 나를 바라보고 현재의 나로 살아가며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생각의 지도를 그려나가며, 경험이라는 이정표와 감정이라는 가로등에 의지해 길을 걸어가는 ‘나’는 그렇게 탄생한다. 현재의 경험과 감정을 통해 펼쳐지는 생각을 비춰보고 걸어 나갈 때, ‘나’라는 존재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때 펼쳐지는 생각들은 나를 괴롭히는 생각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생각일 것이다. 나를 살리기 위해서 나는 생각해야 한다.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를 가리키는 생각들을. 그러기 위해서 나는 나의 감정과 경험을 잘 느껴야만 한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기 위한 키는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현재의 감정과 경험을 잘 느껴내는 것.
느껴내는 것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특히 나처럼 자아감이 약하고 감정과 경험을 잘 느껴내지 못하는 이는. 그러나 혼자만의 연습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감정과 경험을 타인에게 수용 받은 기억이 그 한계선을 높여 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기억이 많지 않다. 이는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 사회는 개인의 감정과 경험에 관심이 없다. 아니, 오히려 등한시한다. 개인보다는 전체에 모든 기준이 맞춰져 있다. 평범이라는 기준. 평범이라는 실재하지 않는 것에 몸을 욱여넣고 생각을 욱여넣고 감정을 욱여넣는다. 이는 주관적 생각의 실종을 불러온다. 주관적 생각은 개인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오는 것인데, 감정과 경험에 객관적 타당성과 평범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개인의 생각과 삶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평범과 객관적 타당성이 강요되는 이유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생존과 질서다. 생존과 질서를 위해 객관적 타당성이 필요한 경우도 물론 있다. 그러나 개인의 감정과 경험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타당성은 필요치 않다. 감정과 경험은 있는 그대로의 감정과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감정과 경험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도, 수용되기도 어려운 것일까. 그리고 왜 개인의 삶과 생각은 억압되는 것일까. 이는 두려움 때문이다. 감정과 생각은 그 자체만으로는 사회와 삶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것인데, 행동과 감정, 혹은 행동과 생각을 도식화하다 보니 감정과 생각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예를 들어 분노라는 감정과 폭력적인 행동을 도식화하면, 분노라는 감정 자체가 지양해야 할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과 같다.
원인을 찾아가는 것이 때로는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과거를 향하는 생각의 화살표처럼. 하나의 원인이 제거되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그러나 그 원인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고, 원인의 완벽한 제거란 애초에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재이다. 그리고 현재가 만드는 미래다. 과거는 현재를 보조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감정이든 행동의 전적인 원인이 될 수 없듯이. 그러나 나는, 사람들은 참 쉽게도 모든 일을 도식화한다. 개인의 삶, 경험, 생각, 감정까지도 도식화해버리는 것이다. 도식화는 삶과 감정과 생각과 감정을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닌, 지향 혹은 지양해야 할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한다.
살아서 생동하는 삶을 믿어야 한다. 도식화될 수 없는 개인의 삶, 도식화될 수 없는 나의 삶. 내 생각, 나의 감정. 삶이라는 길을 걸어가는 생동하는 나. 그리고 그런 나에게서 비롯되는 가치관과 생각. 거기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삶. 개인의 삶을 산다는 것은 지향점이 아니다. 이미 우리는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 필요한 것은 그런 우리의 삶을 받아들이고 또 수용 받는 것이다. 인생에서 내가 애써야 할 부분은 오직 그것뿐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받아들이고 수용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만큼 내게 크다는 뜻일 테다. 생동하는 삶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받아들이는 것. 나를 위해 생각하고 나를 위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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