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이름-바깥
- 불온한 구멍: 지아
- 2020. 11. 20. 11:33
어느 날 나는 생각했다. 할 수만 있다면,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노래를 지어 장안에 퍼트린 서동처럼, 이런 설화를 세간에 퍼트리고 싶다는.
「이 세상을 짓기로 결심한 신은 삼라만상을 있게 한 뒤 마지막으로 인간을 빚었다. 한 인간은 여자로, 다른 한 인간은 남자로 이름하였다. 신의 실수였는지 무능의 소산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어느 날 남자로도 여자로도 이름 지을 수 없는 인간이 태어났다. 너는 나의 아이가 아니로구나! 조리에 어긋난 탄생에 의구심을 느낀 신은 이 ‘이상한’ 인간을 세상 밖으로 내쫓았다. 더불어 ‘이상한’ 인간에게 그가 지은 세상이라면 그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저주를 내렸다. 그런데 이상하지. 인간은 죽지도 않고 오래도록 걸으며 보았다, 계속해서 이름-바깥의 인간이 태어나는 것을. 신도 마찬가지였다. 촘촘히 직조되어 있던 세상은 이름-바깥의 인간들로 인해 하나둘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자신이 지은 세상을 지키기 위해 신은 그들에게 더 큰 불행과 억압을 주었으니 누군가는 그로 인해 삶을 잃기도 하였으나, 누군가는 견뎌내기 위해 이를 더 악물었다. 죽어간 아이들의 어금니를 주머니에 넣었다.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여기 살아있다.」 1
과연 이것에 귀 기울여 들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망상에 빠진 광인이 어설프게 지어낸 이야기라고 여기지 않으려나. 이름-바깥의 인간이 도대체 무어냐, 그런 인간이 있을 리 없다. 당연한 일이다. 대개 사람들은 ‘신’의 세상 안에 있으니까. 상식과 사상을 공유하고 낯선 것을 경계하도록 만들어졌으니까. 하지만 이름-바깥의 인간은 분명 존재한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그 이름-바깥의 인간이니까.
∞
문득, 이런 식의 전개는 매우 불친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조금은 명확한 설명을 덧붙여보려 한다.
우선 이름-바깥의 인간이라 감히 명명하고 앞으로의 연재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트랜스/젠더퀴어 스펙트럼 중 하나인 ‘에이젠더’이다. ‘에이젠더’는 사회문화적 성별을 뜻하는 ‘gender’에 없음을 뜻하는 접두사 ‘a-’가 결합하여 ‘젠더 없음without gender’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성정체성으로서의 에이젠더는 젠더를 가지지 않거나(이때 혹자는 자신을 ‘젠더리스’로 정체화하기도 한다) 자신을 남성으로도 여성으로도 느끼지 않으나 여전히 젠더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그들은 자신의 성정체성에 맞는 단어를 가지지 못했다고 여기며, 단지 ‘사람’으로 정체화하기를 선호한다. 에이젠더는 적절한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할 수 없을 때 디스포리아를 느끼기도 하지만 모든 에이젠더가 디스포리아를 겪는 것은 아니다. 2
드물지만 미디어에 노출된, 에이젠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노리 메이 웰비(Norrie May-Welby)는 최초로 ‘남성도 여성도 아닌 특정하지 않은 성별(No specific sex)’, 즉 에이젠더(혹은 논바이너리) 정체성을 법적으로 인정받은 인물이다. 그는 지정성별 남성으로 태어나 자신을 바이너리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생각하고 1990년에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이 여/남성 젠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후 2013년 대법원 판결에서 승소함으로써 법적으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약 35만명의 구독자를 가지고 있는 유튜버 챈들러(ChandlerNWilson) 역시 공식적으로 에이젠더로 커밍아웃한 인물이다. 그는 16세에 자신을 명확히 에이젠더로 정체화하고, 유튜브에 에이젠더가 무엇인지(“What is Agernder?”) 설명하는 영상을 올렸다. 이후로도 그는 에이젠더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경험과 삶을 기록한 영상을 유튜브를 통해 공유하고 있다. 최근 영상에 따르면 그는 테스토스테론을 주입받는 트랜지션 과정을 거치고 있다. 3
(이건 개인적인 감상인데, 나는 영화 <헤드윅>의 주인공 헤드윅 역시 에이젠더 혹은 젠더리스 정체성을 가진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내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나는 지정성별 여성으로 태어난 에이젠더다. 어째서 자신을 여성도 남성도 아니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방법이 없다. 다른 트랜스/젠더퀴어가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에이젠더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스젠더에게 당신이 어째서 여/남성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어도 같은 답이 나오지 않을까? 다만 에이젠더로 정체화하기 이전의 내가 느꼈던 이질감 따위에 대해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질감. 나는 그것의 유무가 시스젠더와 트랜스/젠더퀴어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몸과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들에 대해서 ‘아무래도 어색해.’ ‘뭔가 이상해.’라고 느낄 때 그는 여/남성이라는 견고한 ‘이름’의 너머를 생각하게 된다. 세상의 문법과 불화하는 순간이 잦아질수록 ‘이름’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벽이 아니라, 어쩌면 깨트릴 수도 있을 것 같은 두꺼운 유리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깨어진다. 이름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름이 되지 못한 이름들이다. 그는 천천히 이름-바깥을 걷다가, 이윽고 발견하게 된다. 이질감 없이 입을 수 있는 자신의 이름을. ‘이게 나야.’라고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정체화가 늦은 편이었던 나에게, 적합한 언어를 찾았을 때의 짜릿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 같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에서 오는 안도감 역시 상당했다. ‘나만 어딘가 잘못된 게 아닐까?’라며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무척 기쁜 일이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우리’로 묶일 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그로부터 느껴지는 소속감은 사람을 안정적으로 만들어준다.
그런데 사실, 나는 굳이 이름-바깥으로 가지 않아도 충분히 사회의 일원으로 안온하게 살 수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나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요건을 충족했다. 내 모든 외형과 성격이 ‘여성’을 충실히 수행했기 때문이다.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한다면 나는 그저 여성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는지, 아니면 삐져나온 것을 가만두지 못하는 성질을 가진 사람이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나는 나에게 붙여진 ‘여성’이라는 이름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이름 너머로 달아났고 비로소 이질감 없이 들을 수 있는 이름을 찾았다. 그 선택이 어떤 고통을 수반할지는 예상하지 못한 채.
정체화 이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트랜스젠더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보면 일부 공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질투와 답답함 등의 것들이 뭉친 부정적인 감정 덩어리가 생겨났다. 그것은 특히나 ‘몸’과 관련해 일어나는 감정이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여성의 몸도 남성의 몸도 아닌데 세상에는 그 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럼 영원히 나는 나의 몸을 가질 수 없는 건가. 나는 궁금했다. 다른 에이젠더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어떻게 자신의 몸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일까? 그 외에도 여러 불편함들을 어떻게 감수하거나 또는 저항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하지만 에이젠더의 이야기는 드물어서 나의 궁금증과 답답함을 해소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써보기로 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다며 운을 띄워보기로 했다. 일 년간의 집필 과정과 텀블벅 후원을 거쳐 에이젠더 서사를 담은 책을 냈다. 할 말을 모두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책이 나온 후에도 나는 여전히 갈증을 느꼈다. 더 써야 하고, 다시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책을 집필했던 때와 현재 사이에 나는 꽤 많은 변화를 겪었으니, 그때보다 좀 더 많은 것들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더 친절하고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쓴다면 누군가는 응답해주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품고 천천히 장막을 걷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