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 장작과 피넛이라는 규범


    막 성에 눈을 뜬 사람 마냥 지나가는 바지춤만 봐도 침을 꼴깍 삼킬 만큼 성적 에너지가 활활 타오르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그 화력을 키운 마른(Thin) 장작 같은 한 사내가 있었다. 실제로 그는 길쭉하고 말라서 흡사 마른 장작 같았다.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나는 속으로 그의 물건을 추앙해 마지않았다. 그것은 단연코 그의 신체 중 가장 덜 마른 장작스러운 것이었다. 그 역시 경험적으로 자신의 물건이 값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앞으로 결코 다른 사람과의 잠자리를 만족하기 어려울 거라며 저주에 가까운 허풍을 떨었다. 나는 피식 웃어주었다. 그도 별 수 없는 ‘한국 남자’였다. 마른 장작의 ㅈ부심은 나름 일리가 있었다는 게 뒤이어 만난 한 사람을 통해 드러났다. 


    그이의 그것은 일명 피넛 (땅콩)이라고, 나의 성기와 그의 성기가 만났는지 헤어졌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이름값을 했다. 왜 좆만하다는 둥, 좆같다는 둥 자조적인 욕이 만연한지 알게 된 사건이었다고나 할까. 이 상반된 경험으로 인해 남자 성기의 크기는 내 성생활 만족도의 신화적 기준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당시 내 성행위는 오로지 성기 접촉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의 이성애 쾌락 지수는 완전 발전단계에 이르렀다. 마른 장작을 기점으로 피크를 찍고 급격히 침체기를 겪더니 어느 지점에 반등하며 완만하게 일정선을 유지했다.


    남자만이 날 성적으로 흥분시킬 수 있다는 신화(myth)는 수년 전 어느 선술집에서 부서졌다. 그녀는 무한히 위태롭고 무한히 단단한 구석이 있어 나는 무한히 그녀를 챙겨주고 싶기도 무한히 어리광을 피우고 싶기도 했다. 그날은 다찌에 앉아 유난히 그녀의 얼굴을 가까이 대고 술 한잔을 한 날이었는데,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입술이 자꾸만 눈에 들어오더니 급기야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어졌다. 간신히 눈을 부릅뜨고 시선을 그녀의 입술에서 그녀의 동공으로 옮겼다. 흥분감은 잦아들 기미가 없었다. 속수무책이었다. 당혹감을 감추느라 급하게 시선을 회피했지만, 나른하고 허스키한 그녀의 목소리는 심박수를 거들 뿐이었다. 행여 내 당혹감이 들킬새라 끝도 없이 쉰소리를 해대며 신경을 분산시켰다. 아. 여자와도 사귈 수 있겠구나. 아니 이 여자와도 섹스를 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매력적인 그녀들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즈음도 그때부터 였다. 그제야 섹슈얼리티도 구성된다는 말을 몸소 이해하기 시작했지만 한편 좀처럼 남성 성기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성애 규범이 몸에 밴 삼십 년 산이었다. 


    대학 때 친구 하나는 지 언니 일기장을 들쳐보다, 언니가 여자를 좋아하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내게 울면서 그 사실을 털어놨다. 나는 그녀를 위로했다. 친구는 절박하게 ‘우리 언니가 예전처럼 정상으로 돌아오겠지?’라고 묻자, 나는 힘주어 언니가 예전처럼 돌아올 거라며 친구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친구의 간절한 바람과 나의 진정 어린 위로 덕분인지 친구의 언니는 결혼해 애 낳고 산다. 잘 사는지는 모르겠다. 여하간 그때나 지금이나 그 언니가 비정상이 아닌 건 분명하다. 


    '정상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는 과거 추앙해마지 않았던 ‘마른 장작’의 물건보다 더 강력해, 나의 성적 욕망은 감히 이성애 규범을 뛰어넘어볼 엄두를 내 보지 못했다. 한편 세상의 규범은 때로는 그 옛날 만난 ‘피넛’ 만큼이나 시시한 것이라, 민망하기 짝이 없다. 사회 주류의 가치나 지배 질서를 불편해하고 의심하며 살아왔는데, 왜 단 한번도 내가 이성애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해보지 않았을까. 그렇게 보낸 세월이 통탄스러웠다. 위안이라면 세상에 흔치 않은 괜찮은 남자 고르니라 시간을 축내는 법은 없었다는 점 하나. (마구잡이로 만났다는 말이다;;) 


    권김현영의 공저<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에서 '섹스는 성적 욕망은 해소하는 게 아니라, 성적 욕망을 추구하는 일'이라고 말해 무릎을 탁 쳤는데, 그간의 내 연애는 성적 욕망을 추구하기보다는 해소하려 하였고 해소하려 하였으되 해소되지 않았으니 어쩌면 나는 오로지 '피넛'이 성욕을 해소하는데 소비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문득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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