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붉은 꽃을 주면 좋겠어.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설핏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봤을 때 보인 건 차곡차곡 쌓인 새하얀 국화였다. 붉은색이라곤 없는 이곳에서 엄마는 뭐가 그리 좋은지 환히 웃고 있었다. 엄마는 꽃을 좋아했다. 들여다 놓으면 죄다 시들게 만들어 문제였지, 이건 꽃이 예쁘고, 저건 잎이 독특하다며 틈이 나면 하나씩 가져왔다. 햇볕 좋고 경치 좋은 자리는 사막의 식물들이 차지했다. 선인장과 같은 식물은 강렬한 태양 빛을 받아야 한다며 한겨울에도 볕 좋은 베란다에 내다 둔 탓에 선인장은 얼어붙었다 녹기를 반복했다. 엄마는 그런 식이었다. 나도 식물이었다. 내가 가져본 식물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게 너야, 하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그저 아끼는 자리를, 아..
아이보다 못한 어른 우리 대부분은, 같은 또래에 같은 성별을 가진 사람을 친구라 부르지 않나요? 친구가 별로 없는 나 말이 약간 느린 나는 모임 자리에 가면 별로 말을 하지 않는다 듣는 곳은 두 곳이요, 말하는 곳은 한 곳이라고 많이 듣고 말은 적게 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말도 없이 잘 어울리지 못해서 다른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제주도의 9살짜리 동화작가 전이수라는 아이는 나이와 상관없이 같은 주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모두가 친구라 하네 난 아이보다 못한 어른이라고 느꼈다 속이 좁은 나 생각이 짧은 나 친구를 많이 가지고 싶은 나 나이만 많이 먹어 욕심이 많은 나 부끄럽다 내일이 있다는 건 아픔의 어제 고통의 오늘 내일이 있다는 건 분명 희망의 빛이 있다는 것 어제의 ..
추운 새벽 2시 반쯤, 친구에게 메일을 쓰다가 문득 기억의 시작과 끝에 대한 생각을 했다. 주고받는 대화가 오랜만에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던, 그러나 지금은 연락을 하지 않는 이와의 첫 만남, 20군데 넘게 지원을 했으나 면접에서 계속 떨어져 온갖 스트레스에 허덕이다 취직한 회사에 처음 출근한 날의 긴장감, 매일 가는 슈퍼마켓에서 진열된 걸 구경만 했을 뿐 머릿속으로 맛을 상상만 하다 처음으로 구입해서 먹어본 감자과자를 입에 넣었을 때의 맛, 아마 이걸 기억하는 사람이 지구상에 존재할까 싶은, 내가 태어났을 때의 기억. 기억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을 하게 된 밤이 있었다. 어떤 것은 정말 선명해서 그날의 날씨와 내 앞에 서있는 사람의 얼굴과 복장까지도 기억이 나다가도 그 외의 다른 기억, 취업 활동을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