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언제까지 죽어야만 원한을 풀 수 있는가 <여성, 귀신이 되다>
- 리싸이월드: 시오랑의 아카이브(연재 종료)
- 2021. 7. 8. 10:53
책 읽는 것만큼이나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하는 편인데요, 특히나 한 번 꽂힌 영화는 옆에서 누가 싫은 소리를 해도 보고 또 보며 되새김질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얼마 전 2편 제작에 돌입했다는 <콘스탄틴>이 그렇고, <어벤져스> 시리즈도 그렇습니다. 특히 <어벤저스> 1편은 대사나 효과음, BGM을 듣는 것만으로도 어떤 장면인지, 전체 러닝타임 중 어느 부분인지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영화 구석구석을 꿰고 있는데요.
<어벤져스>가 거의 끝날 즈음 쉴드 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행방불명되었던 베너 박사가 맨해튼으로 돌아와 헐크로 변신하면서 읊었던 대사가 이상하게 자꾸 되뇌어지는 요즈음입니다. 저도 언젠가부터 헐크와 다를 바 없이, 항상 화가 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러한 상태가 더러는 한국인의 ‘종특’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무한 경쟁적 환경인 데다 일자리도 복지체계도 부실한 현실에서 나타나는 당연한 모습이라는 분석이지요. 그 가운데 분노의 먹이사슬은 자연스럽게 상대적 약자를 노리기 마련입니다. 최근 들어서 집 밖에서는 화를 낼 준비를 하고 대기전력 상태에 있다가 누군가 무례하게 구는 등의 외부 자극이 감지되면 자기방어기제에 의해 화를 뿜어내야 나의 안전을 지킬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네요. 타인에게 친절하면 최근 벌어진 일가족 살인사건처럼 스토킹을 당하다가 살해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니까요. 이러나저러나 언제라도 갖가지 여성혐오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선명한 불안감은 온갖 경험치에서 비롯된 합리적 판단임이 분명합니다.
하루도 조용히 지나가는 일이 없는 격동의 다이내믹 코리아에서는 특히나 여성에게 더욱 잔혹한 일들이 발생하곤 합니다. 지난 6월 21일, 공군 소속의 한 여성이 부대 내 성폭력과 2차가해로 고통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사법체계가 제대로 구동되지 않는 나머지 상식과 정의가 자신을 외면하는 현실을 견딜 수 없었던 피해자는, 그 한을 풀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까마득한 과거의 일도 아니고 몇 세기 전도 아닌 2021년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요. 우리가 지금 근대화된 법치국가에 살고 있는 것이 맞는지 혼란스럽기만 해요. 최근에 읽은 책 <여성, 귀신이 되다> 속 이야기가 마치 오래된 미래처럼 느껴져 몹시 괴롭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여성이 기댈 곳이 이승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시대를 초월한 공통점이라는 현실에 한없이 무력감과 모멸감이 몰려올 따름입니다.
책 속의 여성 원귀들은 저마다의 억울함을 풀 방법이 없어 자결로 생을 마무리하여 결백을 증명합니다. 일단 좋지 않은 소문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면 그 진위여부와 상관없이 낙인이 찍히고 소속 공동체에서, 심지어 가족에게마저 버림받는 등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 소문이라는 것은 대개 섹스와 연관된 것들이고, 여성의 ‘존재 가치’는 성경험 여부와 생식능력에 좌우되었지요. 새 상품의 포장을 뜯게 되면 중고가 되는 원리를 사람에게, 여성의 성경험에 적용하는 유구한 빻은 논리의 근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장화홍련전이나 아랑전설 등에 의하면 이러한 ‘사회적 악의’에 희생당한 여성들은 원혼이 되어 생전의 억울함을 풀어줄 만한 권한을 가진 대상에게 호소하고, 그중에서도 귀신과 마주할 수 있는 담대함과 권력을 지닌 ‘남자’는 사건의 전모를 밝혀준 공을 치하 받아 승승장구의 길에 오르는 전형적 서사구조가 존재합니다.
“이야기 속에서 여성 원귀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상은 남성 사대부이다. 그 남성 사대부는 대부분 고을의 원님이나 어사나 무변과 같은 사법권을 쥔 관리였다. 때로는 과거 길에 오른 선비로 나오기도 하는데, 이 경우 선비는 합격하여 높은 자리에 오른다. 한편 피해자는 젊은 여성, 특히 어머니가 없는 젊은 처녀나 기생, 비구니, 여종처럼 약자의 입장에 놓인 이들, 억울함을 직접 말하기 어려운 이들이었다. 특히 아랑처럼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면 피해 사실을 직접 말하지 못하고 단서만을 주기도 한다. 이런 경우 여성의 이야기는 범행 내용 외에는 흐릿해진다. 이야기는 여성의 억울한 죽음이 아닌, 사대부들의 유능함을 과시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셈이다.“
결국 설화 속 여성들의 기구한 사연은 단지 사대부의 능력을 빛내주는 재료이자 장치로서 기능할 뿐입니다. 무슨 원귀라는 존재들이 다들 그리 예의가 바른지, 그리고 산 자에게 해코지하던 죽은 자가 그리도 쉽게 물러날 수가 있는지 도무지 납득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있듯이, 구전설화나 민담 또한 사회적 발언권과 영향력을 독점하는 식자층의 구미에 맞는 내용들이 선별되어 전해 내려온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여성 원귀들의 이야기는, 귀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원님의 이야기다. 원님들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귀신들을 정상성 안에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그들을 평화롭게 내쫓은 뒤 현실을 복원하고 가부장적 세계의 평화를 되찾는다. 현실에서 약자들이 받는 억압은 바뀐 게 없고, 아버지는 처벌받지 않으며, 권력자인 원님은 명관이 된다. 이 얼마나 체제 수호적이면서도 당대의 사대부들에게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을까.”
재혼 가정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고의 책임은 아버지나 남자 형제를 피해 여성을 향하는 것 또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비뚤어진 전통입니다. 초야를 치르기 직전 새색시의 부정을 의심하고 도주해서 잘 살던 남편이 오랜 세월이 지나 자기 처자식이 원인 모를 이유로 고통받게 되자 그제야 옛 집을 찾아가고, 생전 모습 그대로 남아있던 그 여성이 자신의 결백을 인정받고는 한줌의 재로 사라지면서 전남편(?)의 앞길을 열어준다는 신부형 설화도 빼놓을 수 없지요. 귀신이 되어서도 가부장제가 정해준 금기를 어기지 않는, 남성에게 무해한 그들은 조상들의 기록 속에서 마치 오락처럼 소비된 것이나 다름없어 보입니다. <여성 귀신이 되다> 속에서 체제 수호를 위해 원귀와 수호령 사이를 오가는 죽은 여성들의 이야기와, 그리고 웹하드 카르텔이나 N번방으로 고통과 위협 속에 놓인 오늘날의 여성의 모습은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성은 이 땅을 돌리는 땔감이라는 생각을 도무지 지울 수가 없는 것은 저만의 망상일까요? 여성의 자립이 힘든 사회적 구조를 유지하여 그 빌미로 이들을 영원히 착취하는 시스템은 인류 역사상 가장 공고히 내려오고 있으니, 변화가 없다면 이런 끔찍한 일은 계속 일어날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합니다.
2등 시민에 불과하던 여성이, 그간 소외되었던 여성인권이 논의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가시화됨에 따라 구습 내지는 현상유지에의 격렬한 욕구 또한 발산되어 충돌이 불가피해지는 요즈음입니다. 모든 혜택의 수혜자는 명백히 특정 집단에게로 한정되어야 한다는 강렬한 아집이 표출되는 터무니없는 사건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음에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일부 수구 세력의 발악 때문인데요. 자신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던 과거가 너무나 그리운 그들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는 방법으로 더 이상 누군가의 죽음이 고려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는, 문명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2021년, 21세기가 시작되고도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은 여전히 가정에서 차별받고, 사회의 유리천장에 짓눌려 있으며, 수많은 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 전통적인 개념의 범죄뿐 아니라 기술의 발전에 따라 생겨난 새로운 범죄들까지 여성들의 안전과 목숨을 노리고 있다. 젠더사이드라 할 만한 성감별 낙태로 태어나기도 전에 죽을 뻔했는데, 자라서는 나라와 사회를 위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는다. 여성들은 앞으로 나아가는데 세상은 여전히 여성들에게 남성 가장과 두 아이가 있는 4인용 식탁에 앉으라고 강요한다. 그렇기 때문에 괴담 속 여성들은 여전히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세상을 떠난 옛 여성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게 다가온다. 과거 가부장제와 성리학적 세계관 안에서, 정조를 의심받고 자결한 여성들이,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농락당하거나 범죄의 피해자가 된 여성들이,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보호받지 못하고 죽어간 여성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세상과 우리를 향해 계속 말하고 있다. 죽어 돌아와 마침내 목소리를 얻은 여성들이 산 자들을 향해 무엇을 말했는지를,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원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싸 안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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