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계가 여성을 간과해온 역사는 한도 끝도 없음을.. 아니 근데 의학계뿐일까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

<출처: Google>

 

    사회생활 시작하고 몇 번째 이직했는지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 회사에서 친해지게 된 프리랜서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슬하에 아들 둘이 있었는데, 딸 하나 있는 친구분이 아이들 동반 모임에서 선생님의 아이를 보고 너희 애 ADHD 아니니?”라는 말을 해서 기분이 몹시 나빴다고 하더라고요. 매우 활동적인 아이이긴 하지만 병적일 만큼은 아닌데 친구가 말을 심하게 했다면서요. 세월이 흘러 그 친구분이 둘째 자녀로 남자아이를 낳았고 몇 년 뒤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그렇게 말해서 미안했다고 뒤늦게 사과를 했다면서, 여자아이는 얌전하고 남자아이는 부산스러운 일반적성향을 키우면서야 알게 되었다더라는 말을 전해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세간의 ADHD(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와 성별의 상관관계라는 개념을 그때 처음 접했던 것 같아요.

 

이같이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ADHD의 주요 증상은 진득하지 못하고 정신 사납게 부산을 떠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주로 남자아이들에게서 많이 발견된다고 생각하기 쉽고요. 하지만 특정성별에게서만 발견되는 질환이라니, 고환암이나 자궁암처럼 신체기관의 특성에 의한 것도 아닌데 과연? 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남자는 수학을, 여자는 언어를 타고난다는 근거 없는 주장이 과학기술이 발전하기 전까지 정설처럼 통용되었던 것처럼, 지금까지 ADHD를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으로 인해 극히 제한된 시각으로만 관찰해왔다는 것을 알려주는 책이 바로 오늘 소개할 <나는 오늘 나에게 ADHD라는 이름을 주었다>입니다.

 

  똑같은 행동을 해도 XX염색체가 하면 경솔함으로, XY염색체가 하면 대범함으로 간주하는 등 XY염색체에게만 아량이 넘치는 세상이지만(일일이 그 예를 들자면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많지만 시간이 아까워서 생략합니다), 집중력이나 주의력이 그 눈물 나는 너그러움마저 위협할 정도로 부족할 경우 의심되는 것이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입니다. 특정 문제행동이 사실은 치료 가능한 질환이었다는 발견은 사실 그로 인해 고통받던 소수자에게 있어 반가운 사고의 확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단사례가 존재한다는 것은 개선방법도 있다는 것과도 같으니까요. 하지만 게으르기 짝이 없는 전문가들에 의해 ADHD천방지축인 남자아이의 얼굴이라는 한정적 개념으로 일반화되어 버렸습니다. 신약개발을 비롯해서 현존하는 의술은 사실상 임상시험 과정이 경제성과 편의성을 이유로 XY염색체 한정으로 진행되어온 진절머리 나는 역사를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시작부터 이상하다. 도대체 여성 ADHD라는 게 뭘까? ADHDADHD이지, 남성 ADHD와 여성 ADHD가 따로 존재한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미 주변에서 이런 경우를 수도 없이 보아왔다. ‘학교가 있는데 여학교가 새로 설립된 이유, ‘인간주의가 아니라 여성주의가 생겨난 이유는 ‘ADHD’가 아니라 여성 ADHD’에 집중하도록 만든 이유와 같다. 오래 이어져온 여자'ADHD'에 대한, 또는 여자이면서 'ADHD'가 있는 사람에 대한 오해와 편견 때문이다. 그동안 ADHD는 과잉행동/충동 우세형의 증상이 주로 알려져 왔다. 환자군 또한 남자아이와 남성으로 인식되었고 관련 연구마저 그들을 주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부주의 우세형 증상을 보이는 여성은 ADHD 진단에서 배제되거나 다른 질병으로 오진을 받아왔다. 심지어 과잉행동/충동 우세형의 증상을 보이더라도 남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여성은 ADHD와 관계없는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ADHD는 단일한 증상만을 보이는 질환이 아니라 과잉행동/충동 우세형, 부주의 우세형 그리고 이 두 유형의 증상을 모두 충족하는 복합형 등 세 가지 하위 유형으로 나뉩니다. 하지만 임상현장에서 사용하는 판단기준인 DSM(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자체가 젠더 편향적인 탓에 여성의 ADHD 증상을 세밀하게 감별할 수 있는 문장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은 데다, 이를 활용하는 정신건강 전문가 또한 성차에 따른 다양한 징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상 여성 ADHD를 기분장애에 한정해 치료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여성 환자와 면담할 때 ADHD를 염두에 두기만 해도 장애 간 증상 차이에 더 주목하고 경과를 관찰한다면 ADHD 치료로 간단히 바로잡을 수 있는 이상 증상을 우울장애나 양극성장애, 불안장애 등으로 오진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라는 본문의 설명은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를 읽으며 받았던 충격과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뿌리 깊은 성 편견과 게으른 과학으로 인해 여성이 무시당하고, 오진으로 병들기 십상인 것은 ADHD도 다를 바 없는 것이지요.

 

동일한 ADHD이라도 남성에게서는 과잉행동으로 나타나는 것과 달리 여성에게서는 부주의하고 구조화를 어려워하는 등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지배적입니다. 이처럼 성차에 기초해 증상 발현에 차이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성성에서 벗어나는 특징을 가진 여성은 사회로부터 다양한 방법으로 차별당하게 되잖아요? 세상은 여성으로 하여금 부정적인 피드백을 그저 수용하도록, 자기 잘못이 아님에도 사과하도록, 체제와 규범에 순응하도록, 자신을 위한 주장 같은 건 하지 않기를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요구에 순응하고 사회가 정해놓은 여성성에 안주하는 것을 무시하고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습니다(하다못해 숏컷만 해도 상식적으로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니 거의없다고 봐야 하겠지요). 평범한 삶을 위해서는 개인의 욕망을 거세당하게 되고, 분노하고 싶어도 정당하게 발산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결국 여성은 사회가 허용하는 여성다운 행동의 범위 내에서 안전한 저항을 시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듯 정서와 욕구를 성역할에 맞춰 사회화하다 보면 여성의 저항은 수동적이고 간접적이며 자기 내부로 향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날 여성에게서 지배적이고 더 높은 유병률을 보이는 정신장애는 대부분 자신의 내부로 향하는 장애들이다.(특히 우울증, 불안증의 증상들은 수동적이고 의존적이며 타인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여성의 사회적 성역할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각종 불안과 공포 반응, 신체 반응도 마찬가지다. 이런 장애는 아주 오래전부터 여성에게서 지배적으로 진단되어왔고, 흔히 내벌적(intropunitive)' 증상이라고 불린다. ,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그 원인과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고 스스로를 공격한다는 뜻이다. 반면 남성에게서 더 잘 관찰되는 정신장애는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 품행장애, 반사회성 성격장애가 있다. 이 역시 남성의 성역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증상이 스스로에게 향하기보다는 밖으로 표출된다. 게다가 남성의 음주와 흡연문제는 여성에 비해 훨씬 더 용인해주는 사회문화적 시각이 작용했을 수 있다.”

 

  결국 반복되는 문제입니다. 이 세상의 기준은 남자로 획일화되어 있기에 남자의 특성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비정상으로 판별되는 악순환. 여성의 의존성은 병리적으로 해석하면서(아니 근데 의존하지 않으면 여성스럽지 않다고 불만이고.. 대체 어쩌라는 건지?) 나랏돈으로 독거남성의 반찬을 수발들어 주자거나 번식도태된 이들을 위한 매매혼을 장려하는 등 지극히 병리적인 남성의 의존성은 정신건강 영역에서는커녕 일상에서조차 논의되지 않을 뿐더러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있고요. 이런 마당에 여성이 불안정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미성숙하다며 탓하거나 성격장애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은 어불성설일 뿐더러 여성은 그저 조용히 말라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습니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일부 사회부적응자의 피해의식으로 축소하고 호도하기에, 여성에게 가해지는 거대한 사회적 가스라이팅은 그 실체가 너무나도 분명하다는 것을 오직 그들만 애써 부인하고 있습니다.

 

성별에 따른 생물학적 차이가 아닌 그릇된 사회적 강화는 정신건강문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가 개인에게 기대하는 성역할을 내면화하는 과정을 통해 여자아이들은 뛰어난 사회성과 배려심, 의존적 성격 등을 강화하며 성장합니다. 남자아이의 경우 자기 물건을 빼앗기고 돌아오게 되면 다시 빼앗아 오라는 다그침을 받고, 다양하게 감정을 표출하면 주위의 걱정을 듣게 되고요. 여자아이들이 자신의 증상을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표현하게 만든 데에는 순응하라는 사회적 압박이 깔려있다는 의심은 너무나도 합리적입니다. 성평등이 이뤄진다면 ADHD를 진단받은 이들이 성별에 따라 다른 증상이 발현되어 잘못된 진단으로 긴 세월 고통받는 일 또한 사라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2030 여성의 자살율도 현저히 낮아지고 출생률 또한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아지지 않을까요? 현재로서는 그 바람들이 그저 공허하고 양심 없는 탐욕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말입니다.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