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01 구분되지 않는 삶
- 암삵의 삶: 위단비(연재 종료)
- 2019. 2. 15. 09:25
지구시 동물구 포유동물동, 고양이아파트에 사는 어느 삵은
고양이처럼 꼬리에 늘 힘을 주고 다니는 대신에
오늘부터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살기로 결심했다.
몇 년 전 인공지능이 막 이슈화되기 시작했을 때 인공지능의 한계에 대해 기술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결정적 차이는 사물을 구별해내는 체계적 사고에 있다는 요지의 글이었는데, 예를 들어 ‘치와와와 닮은 초코머핀’과 ‘치와와’를 인간은 음식과 동물로 구분해낼 수 있지만 인공지능은 그 둘을 구분해낼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려면 머핀과 치와와, 치킨과 푸들을 구분해낼 줄 알아야 한다. 이에 따라 인간의 사고방식의 특징 중 하나는 인지적, 직감적으로 대상을 비슷한 카테고리로 구분해내는 것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인간은 구분을 참 좋아한다. 과학을 뜻하는 science는 라틴어 접두사 scio-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구분하다’는 뜻을 가진다. 인간이 문명을 이룩하는 데에 과학이 지대한 영향을 준만큼 구분이 인류의 현재 생태를 만들었다고 해도 아주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구분은 부분적 특징만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것에 있다. 구분에는 기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준은 통합적이지 않은, 부분적인 특징으로 세워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색깔, 크기, 용도 등등. 이는 인간의 사회적 활동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를 부분적인 특징으로 구분해내는 버릇이 있다. 성별, 재산수준, 결혼여부 등등.
인간을 서로를 각각 여러 기준으로 구분해내며 구분의 총합을 통해 서로를 점점 더 잘 알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의 특징을 부각시킨 구분은 어떤 경우에는 그 구분 이외의 것들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각각의 기준과 특징들 또한 인간이 만들어내고 구분해낸 수많은 기준과 특징들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것이 그렇다.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은 여성을 구분하는 수많은 특징들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그 특징들로부터 벗어나 있으면서 여성이라는 성별을 지닌 이들은 여성으로 구분되지 않거나 혹은 여성답지 못한 여성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여성을 구분하는 셀 수 없이 많은 특징들에 전부 부합되는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특징은 계속 만들어지고 변화하기 때문에도 더더욱 그렇다.
구분이 개개인의 고유함보다 우선되는 사회에서 적응을 위해 고유함보다는 구분되어짐을 선택하고 스테레오 타입을 연기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그 구분이 생존과 직결될 때에 더 크게 작용한다. 나의 첫 사회생활은 운송업체의 관리부 말단 직원이었다. 관리부 특성상 우리 부서에는 여성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역할과 관련된 업무가 많았다. 손님 접대와 회계 업무, 기타 비품 관리와 같은 일들이었다. 같은 팀 선배들도 대부분 여성이었다. 같은 부서 내에 있었으나 주변인이었던 나와는 달리 이미 내부인이 된 선배들은 업무 외에 겉으로는 강요되지 않는 의무들도 가지고 있었다. 옷차림에 대한 부분이나 식사자리에서의 모습 등등. 선배들에게 자행되는 간부의 성희롱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내 입장에서 업무에 대한 혼란보다 더 혼란스러웠던 건 이미 수년간 그와 같은 일들을 수행해내고 견뎌내면서 여성의 지위 및 역할이 완벽하게 내면화된 선배들과 나 사이의 차이였다. 업무시간 중 발생한 성희롱은 점심시간에 간부의 별명을 이용한 한 마디의 욕으로 없던 일이 되었다. 그들의 평균적인 식사량은 매우 적었다. 다들 날씬한 몸을 가졌지만 늘 다이어트 이야기를 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 여성의 롤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던 내게 그 직장에서의 경험은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모습을 진하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타고난 모습이 아닌 여성에게 주어진 모습을 학습한 결과라는 것은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처음에는 내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선배들의 관심사에 나도 모르게 관심을 갖기도 하고 선배들의 옷차림을 따라가기도 했다. 적응하기 위해 나도 모르게 본능적인 발버둥을 쳤다. 회사 내에서 여성스러운 모습과 거리가 먼 이들이 식사자리의 반찬거리로 소비되는 모습을 보며 더더욱 그랬다. 파도에 쓸려가듯 변해가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면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언젠가 선배의 표정에서 체념을 읽었을 때, 그때서야 그들의 모습이 체념과 타협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살아남기 위한 체념, 살아가기 위한 타협. 사내 십여 명의 간부 중 여성 간부는 두세 명에 불과했다. 그들은 대부분 여성성 보다는 공격성과 냉정한 모습으로 무장한, 일반적으로 남성성으로 구분되는 특징을 가진 이들이었다. 대부분이 미혼이었고, 유일하게 기혼이었던 상무는 사내 어머니와 같은 역할이었다. 사내 갈등을 완화하고 회사 대표를 케어해내는 역할. 사회생활을 오래 한 여성들에게서는 남성에게 보이지 않는 일종의 전략들이 보였다. 여성성을 지워 내거나, 혹은 여성성을 극대화시키거나. 남성 간부들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그냥 ‘나’로서 살아갈 순 없는 걸까. 나는 그냥 ‘나’로 살아가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에 처음으로 의문을 품었던 순간이었다. 나의 일부인 성별로서의 삶이 나다운 삶보다 우선일 수도 있다는 생각. 나를 구분하는 기준 중 하나인 성별이 그 성별을 구분하는 수많은 기준들 안에 나를 가둘 수도 있다는 생각. 이는 성별뿐 아니라 이 사회에서 주류와 비주류로 구분되는, 수없이 많은 기준들도 마찬가지였다. 학력, 성적지향, 살아가는 방식, 사고방식 등등의 것들.
생존과 직결된 부분은 선택이 불가능한 부분이니 선택의 여지는 공평하지 않다. 그렇지만 타협의 여지는 있었다. 내가 느끼는 사회와 나 사이의 괴리를 인지하니 내가 가질 수 있는 방향성이 조금은 더 선명하게 보였다. 적어도 이것만은 분명했다. 어떤 부분을 타협하고 어떤 부분은 나를 지켜나갈지,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좋을지 죽을 때까지 고민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나의 부분들은 조각조각 구분되어 살아가겠지만 나의 존재는 어느 것에도 구분당하지 않고 살아남겠다는 것. 나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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