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여행기: 사랑의도시_아그라편

    혼자 인도로 여행 간다 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둘로 나뉜다. ‘여자 혼자서는 위험할텐데’와 같은 우려 또는 ‘여자 혼자 대단하다’와 같은 감탄. 혼자 떠나서 혹은 그곳이 인도라서 더 위험하다 생각해본 적은 없다. 전 세계 어디든 여자가 여행하기에 혹은 살기에 안전한 곳은 별로 없다. 그리하여 나는 인도로 떠났다.

    타지마할의 도시로 알려진 아그라. 아그라 기차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칸의 레이더망에 걸려 들었다. 그는 아그라의 툭툭 드라이버다. 10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 타지마할로 가는 길에 그는 내게 일일 투어를 좋은 가격에 제시했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게 귀찮기도 했지만 꽤나 좋은 조건이라 생각해 딜을 체결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의 밥이 되었다.

    타지마할에서 두 시간여를 보내고 다시 칸을 만났다. 계획대로라면 그 주변의 두세 개 관광지를 돌아봐야 했지만 칸은 아그라의 건축 양식은 거기서 거기니 괜한 입장료 낼 필요 없이 입구에서 사진만 찍을 것을 조언했다. 시키는 대로 했다. 그렇게 내가 알뜰하게 시간을 벌어 그가 데려간 곳은 쥬어리 숍이었다. 머리에 터번을 두른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고 아주 여유 있고 느리지만 권위 있는 태도로 자신의 보석들을 선보였다. 순식간에 숍에 있는 거의 모든 보석들이 층층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를 미안하게 만들 심산이었다. 속으로 당했다 싶어 책망하면서도 절대 사지 않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보석들에 혼이 나가지 않은 척하느라 또다시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고 그 숍에 있는 그 어느 누구도 기쁘게 하지 않고 잘 빠져나왔다.

    칸은 내 눈치를 살짝 봤다. 나도 그의 눈치를 살짝 봤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는데 칸이 자기 사무실에 가서 차나 한잔을 하고 가잔다. 다음 행선지로 갈 열차시간이 세 시간이나 남은 시각이었다. 그는 환전소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간다고 한 적 없는데 이미 그의 사무실 앞이다. 행여나 이상한 데로 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를 굴리는데 진짜 환전소다. 환전소 안은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성인 남자 대여섯 명은 뭐가 좋은지 시시덕 거렸고 칸은 의기양양 나를 인사시키고 사무실 안쪽 방으로 안내했다. 소파도 뭣도 없는 쪽방이었고 칸은 들어가자마자 벌러덩 바닥에 누웠다. 나는 의연한 척 양반 다리를 하고 어깨를 부풀려 양다리에 팔을 얹었다. 차를 마시겠냐고 물었고 안마실 요량 짜이 한잔을 부탁했다. 짜이는 에스프레소 잔에 나왔는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혀끝만 대고 생강 맛이 맵다고 마시지 않았다. 그는 한 이십여분 자신이 얼마나 많은 관광객들, 특히 동양 여자들과 어울렸는지 사진으로 증명하며 불안해하는 나의 신뢰를 획득하려는 듯했고 동시에 자신이 얼마나 부자인지 진지하게 설명했다. 나는 최근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스스로 부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네가 처음이라고 응수했다. 그는 내 말을 귓등으로 듣고 계속 자기 할 말만 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잘 아는 레스토랑이 있는데 가서 맥주 한잔 하자 했다. 나는 거절의 답으로 맥주 마시면 머리 아프다고 했더니 그는 우습다는 듯 피식 웃는다. 결국 갔다. 모든 결정권은 칸이 쥐고 있었다. 나는 화를 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결정 못해 어리바리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게 분명하다.

   칸은 맥주를 하나 시키더니 8년 전 남편과 이혼하고 잃어버린 자신을 찾겠다고 인도 여행을 온 당시 42살 한국 여성과의 한 달간의 비밀 연애 이야기를 해주었다. 칸은 26살의 나이에 그 여성과 첫 성경험을 했단다. 34살이 되었지만 단 한 번도 진지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자신은 섹스를 그리 즐기지 않고 다만 바나나 같은 걸 먹고 성욕이 일 때는 스스로 해결하는데 손으로 하는 시늉을 해서 손사래를 치며 하지 말라고 하니 그는 거꾸로 나를 꾸짖으며 자신은 솔직한 사람이라 모든 것을 거침없이 말한다고 무안을 줬다. 그는 내가 뭔 말만 했다 하면 자신은 솔직한 사람이라고 응수했고 되려 나를 내숭 떠는 솔직하지 못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앞으로 5년 뒤에 결혼해서 충실한 가장이 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지금처럼 삶을 즐길 거라고 했다.

    그리고 내게 제안했다. 다음 행선지 기차와 숙소를 취소하고 자기와 이삼일 지내면 좋은 곳에도 데려가고 취소 비용은 자신이 다 지불해주겠단다. 그런 제안이 종종 통한 건지 8년 전 비밀 연애가 그리웠던 건지 내 애인에게는 비밀로 해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솔직한 게 좋다더니 연애는 비밀스럽게 하냐고 하니 피차 알아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이야기는 널뛰기를 하더니 나와 결혼해 살 수도 있다고 했다. 자기는 한국에서든 인도에서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살 수 있다고 했고 자신이 침대에서 얼마나 파워풀하였는지 디테일하고 내밀한 경험들을 털어놨다. 그리고 나에게 한번 할 때마다 네 번을 보장(guarantee)하겠노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보장이라니. 값비싼 ‘상품’이라도 되는걸까. 어떤 여지도 없이 폭소가 터졌다. 웃을 일인지 화를 일인지 구분이 안 갔다. 아니 구분이 갔지만 나는 웃었다.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어서 신상에 좋을게 없다는 직관이었다.

    내 처지가 하도 어이가 없어 가기로 한 장터에 가는 걸 포기했다. 도망에 가까운 포기였다. 칸은 맥주 계산서를 내 앞으로 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모든 게 순식간이다. 그는 떠나는 내 등 뒤로 자신이 싱글인 시간 딱 5년 남았다고 다시 알려주었다.

    인도 어떤 왕이 죽은 왕후를 그리워하며 온갖 착취와 희생 위에 지었다는 그 타지마할. 칸은 아그라를 사랑의 도시라 불렀다. 과연 칸은 혼자 여행 온 남자 손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이쯤 되니 나는 이역만리에서 칸의 허튼소리를 들으러 아그라를 찾았나 싶은 착각이 든다. 아...사랑의 도시, 아그라여. 내 기억 속에 칸으로 기억될 사랑의 도시, 아그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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