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전의 삶에서 이후의 삶으로: 나의 페미니스트 모먼트

고양이


   곧 부양의무제가 전면 폐지된다고 하는 소식을 전해 듣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마음속으로 안 들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부양의무제가 있는 나라에 산다는 건, 한 사람이 기초생활수급 등을 탈 정도로 충분히 가난해도, 그 사람의 부모·자녀· 배우자, 그러니까 가족(!)들이 충분히 가난하지 않으면 가난을 인정받을 수가 없단 얘기다. 다들 원가족은 자기가 고른 게 아니라서, ‘가족’ 사이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다. 그런 수많은 일들 때문에 가족이 연락을 안 하고 사는 사이가 된다면? 국가가 정보망을 동원해 한 사람의 가족을 찾아 내 ‘부양의 의무’를 고지한다. 월급과 재산을 차압해서라도 책임을 떠넘긴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부양의무제는 원래는 국가가 했어야 할 일을 ‘비용절감’을 위해 가족에게 떠넘기는 데 이용해 온 대표적인 제도다.
지금 각자가 서로를 선택해서 같이 사는 우리 세 남매의 지난해 최대 고민은, 어떻게 하면 우리한테 이 시한폭탄 같은 ‘부양 의무’가 떠넘겨지기 전에 원가족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고 정리하느냐는 것이었다. (엄마 남편은 내 어린 시절부터 ‘가정폭력행위자’였고, 작년엔 엄마가 우리 모르는 새에 아주 복잡한 금융 관계를 만들어 놓았단 걸 알게 된 참이었다.) 전화는 언제까지 받아도 돼? 통장 간에 (사소한 금액이라도) 돈을 주고 받아도 돼? 나는 원가족에 묶인 통신 결합 할인 풀려고 해. 너는 미리 안 풀어도 돼? 우리는 남들에게는 고민거리가 아닐 자잘하고 커다란 일들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이제 이런 고민에서 해방이다. 앞선 원고에서 썼듯, 나는 생계 부양을 전혀 못하는 엄마 남편 대신 우리를 복지 제도에 어렵게 밀어 넣은 엄마 덕에 그래도 대학 공부를 했고, 여기까지 왔다. 그렇지만 이후의 ‘부양의무제’라는 게 어떤 식으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내 삶을 침범하게 될지에 대해선 자세히 모르고 사는 중이었다. 내가 나의 미래도 제대로 몰랐다고 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이유를 찾자면 이 제도에 묶여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하나의 커다란 낙인 같았고, 또 상처였기 때문이다.

언론이 ‘휴먼시아(국민임대주택 이름) 거지’ 같은 용어를 발굴해 앞장서서 퍼뜨리고, 기초생활수급을 받는 아이가 ‘메이커’ 돈까스를 먹는다고 비난 받은 이야기를 써서 조회수를 올리는 세상이었다. 나는 그런 기사를 보고 “차별 나쁘다”고 화내는 사람들 사이에 끼고 싶었지, “저 불쌍한 애가 커서 된 게 나”라고 말하고 싶진 않았다. 이십 대 내내 나는 말짱하고 평범한 얼굴을 하고, 복지 제도에서 떨어져나가게 되지는 않을 만한 온갖 일을 하는, 평범한 익명의 도시인으로 살아 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 삶에 솔직한 게 쉬울 리가 없었다. 그래서 제도가 내 삶에 미칠 제약을 구체적으로 알아 보는 일에도 차일피일, 미적미적이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이만큼이나 흘렀다. 우리 중 일부는 직업이 생기거나 추정 소득이 생기면서 수급제도에서 떨어져나가게 됐다. 엄마와 엄마 남편은 나이를 먹어 제도가 정해 놓은 기초연금수령 나이인 ‘만 65세’에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원가족으로 태어났지만 서로와 같이 사는 삶을 다시 ‘선택’한 우리 남매들은 현실에 똑바로 직면해야 했다. 자기연민에 빠지지도 않고, ‘복수심’ 같은 별 쓸모없는 마음에도 휘둘리지도 않고 최대한 잘 결정을 해야만 했다. 우리의 결론은 대강 이랬다. 엄마와의 관계는 때에 따라 멀리 하기도 하고 가까이 당기기도 하며 가능한 한 건강하게 유지하기. 엄마 남편과의 관계는 잘 정리하되, 제도의 헛점이 있다면 잘 이용하고,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제도들이 있다면 잘 고지해 주기. 사적으로는 여기까지 생각 정리를 해 왔는데, 한편 부양의무제 폐지 다음에 이어질 제도와의 싸움 역시 놓을 수는 없다. 지금이야 나와 엄마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고, 엄마와 잘 지내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는 중이지만, 불과 이삼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관계는 매우 어려웠다. 나는 2013년 추석 때부터 개인적으로 가족에게 너무 지쳤단 이유로 ‘귀성길 대행렬’에 동참하지 않기 시작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게 부모와 나의 삶을 분리시키고 개인의 삶을 살아내기 위한 노력의 시작이었다. 이틀 이상을 마주 보고 앉아 있으면 견딜 수가 없는 사이. 우리집만 이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평화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인 버지니아 울프를 아주 좋아한다. 그건 명절에 더이상 집에 가지 않기로 결심한 후의 어느 날, 그의 에세이 《자기만의 방》을 읽게 되어서다. (그간 내가 왜 이 글을 좋아하는지를 여러 번 설명했는데, 다시 한 번 설명해 보고 싶다.) ‘나만의 방’은 어릴 때부터 나에게 달성될 수 없는 꿈이었다. 식구가 너무 많고 돈은 없고 당연히 충분한 공간도 없었다. 어서 자라서 집에서 독립해 나가는 건 어린 시절부터의 오랜 꿈이었지만, 고작 스무 살이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한다고 해서 나의 방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스무 살부터 거의 혼자 생계를 유지했다’고 말하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 하는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데, 당연히 최저시급 대학생 아르바이트로는 어떻게 해도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 나는 한국 복지제도의 성장과 부침에 따라 삶의 퀄리티가 좌우되는 삶을 오래 살았다. ‘기초생활수급자’ 딱지는 많은 복지 제도에서 우선순위에 올라갈 수 있는 카드였다. 예를 들면 성적과 집안 환경을 조건부로 해 사생을 선발하고 싼 값의 월세에 밥을 제공하는 기숙사에서도, 주변 시세에 비해 파격적으로 적은 월세에 공급하는 대학생임대주택 사업에서도 수급자를 먼저 뽑아 줬다. 하지만 그게 곧 나에게 자율적으로 생각하고 내 삶을 주체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내게 지난 십여 년은 한국의 복지가 자선과 시혜의 다른 이름이란 걸 몸으로 알아 간 나날이었다. 18년 여름에 발간된 책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 페미니스트 크리틱》에서, 김은실은 울프의 이 에세이를 언급하며 “여성이 자신의 생각을 개념화하고 논쟁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1년간 글을 쓸 수 있도록 500파운드의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여성의 독립에 필요한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사유 능력과 자기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갖는 것”이라고 썼다. 매끄러운 요약이다. 15년 봄학기에 여대 영문과에 들어가 이 에세이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내가 살아 온 삶을 기반으로 이 텍스트를 이해했다. 15년 이후 페미니스트가 된 수많은 사람들은 어떤 텍스트를 읽고 자신만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만났을까? 나는 종종 궁금하다. 나에게는 연필로 줄을 그으며 울프의 에세이를 읽어 내려갔던 그 순간이 나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다. 그 후로도 필요할 때마다 나는 울프를 꺼내 들었다. 15년 봄, 16년 봄, 그리고 17년 겨울, 18년 여름에 버지니아 울프를 또 읽었다. 이제 내게 이 에세이를 한 문장으로 요약시키면, ‘문학적인 돈 타령’이라 하겠다. ‘내가 지겹게 하면서 살아 온 ‘돈 타령’을 이렇게 구질구질하지 않게 해 내다니!’ 이것이 내 소감이다. 15년 봄의 울프는 또 내게 이런 의미였다. 그때까지 나를 아등바등 살게 했던, 어쩌면 고맙기도 한 복지 제도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 내가 그토록 달성하고 싶었던 ‘정상’의 기준이 사실은 여성이란 이름의 소수자를 포함한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 ‘생각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집세랑 생활비를 대 줄 부모 만난 사람들만의 것이어서야 되겠는가? 여기서부터 ‘활동’을 시작하고 싶은 나의 마음이 시작됐다. 너무 많은 햄스터가 사는 우리 같은 집을 벗어나서 4인실 기숙사의 한 켠 책상과 침대를 차지하게 됐을 때, 그리고 조금 더 넓은 2인실의 학사의 절반을 차지하게 됐을 때, 학교를 옮기고 임대주택사업의 원룸을 갖게 됐을 때, 그때마다 나는 주거 공간이 단순히 밖에서 모기 뜯기지 않고 얼어죽지 않게 하는 곳에서, 세 끼 밥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곳에서, 내가 조금씩 더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공간을 돌보고, 남을 초대할 수도 있는 곳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겪었다. 동시에 2,500원의 최저시급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몸값’을 높여 가면서, 일 년에 하루도 못 쉬고 일해야 하던 때를 벗어나서, 전공 공부와 관계 없는 텍스트를 읽고 남들과 대화를 나눌 만한, 딴 짓을 할 만한 휴일이 있는 삶으로 옮겨 가면서 그게 내 사고 방식과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을 주어 왔는지도 되돌아볼 수 있게 됐다. 그 끝엔 이런 의문이 있었다. ‘우리가 언제까지 집세 내고 일만 하며 살아야 하는가?’ 또 지금 넷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의 어떤 흐름에 붙여 울프를 읽자면, 나는 이렇게도 생각한다. 개개인이 개인의 노력으로서 경제적 능력을 갖고 사유 능력을 확보하는 일, 즉 ‘여성이 야망을 갖고 성공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개인이 온전히 개인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제도가 뒷받침하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고. 그래서 서로간에 틈이 없이 꼭 붙은 가족제도 안에서 여성과 소수자가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라고 말이다. 원가족은 고를 수 없고, 그냥 태어나 보면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그때마다 자신이 고른 사람들과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한다.

    나의 동생이자 선택해서 같이 사는 가족, 정치적 동료이자 친구인 쥬니와는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한다. 사람들은 별 일이 없다면 ‘가족의 무게’가 뭔지 모르고 그냥 살아가지만, 제도가 정해 놓은 가느다란 정상의 선을 벗어나면 갑자기 가족이 나타나 덜컥 발목을 잡게 된단 얘기. 제도가 정한 ‘정상선’은 이런 것이다. 부모의 경제력으로 십 대를 보내고, 스무 살에 괜찮은 대학을 가서 취업을 하고, 연애 적령기에 이성(異性)과 연애를 하고, 결혼 적령기에 결혼에 골인해서 아이를 둘쯤 낳고, 그 아이들을 자신들처럼 길러내고, 부모를 적당히 돌보고, 일이 년에 한 번쯤 효도관광을 보내 줄 수도 있는 삶.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삶 위에 잘 안착한 사람들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 이젠 그런 사람들과 나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더 많이 나누고 싶다.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