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페미니스트 되다: 선언 이후

고양이



    또 100시간을 보냈다. 자격증 두 개를 따려고 식구들에게 돈과 돌봄노동을 빚졌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딘가로 이동하고 앉아서 꼬박 200시간을 보냈다니 놀랍다. 모 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성폭력전문상담원교육코스를 수료하고, 이어 한국여성의전화에서 가정폭력전문상담원교육코스를 수료했다. 간단히 요약된 소감을 말하면, 여성가족부 홈페이지에 공시한 기관이라고 이 자격 코스의 수준과 내용이 다 똑같지 않아서 앞의 100시간은 정말 힘들었다. 뒤의 100시간은 그에 비해서는 즐거웠다. 하지만 온갖 스케줄의 틈바구니에서, 주 2회나, 저기 저 세상의 끝(처럼 내게는 느껴지는) 불광에 아침 10시부터 가서 앉아 있으려니 좀 죽을 맛이긴 했다. 여의치 않은 상황에도 나는 왜 이 자격증들을 따자고 마음먹었을까?


    우선 내가 아는 어떤 자격증 수집가에 대해 쓰고 싶다. 엄마는 정말 별의별 자격증이 다 있다. 우선은 국가공인자격인 운전면허. 그것도 1종이다. 그 다음에는 나이 40이 넘어서 대입검정고시를 치더니, 지역의 한 전문대학에 들어가 꽤 쓸만한 자격증인 사회복지사를 땄다. 그 외에는 요양보호사 같은 신빙성과 실용성 있는 것부터 웃음치료사, 미술치료사 같은 (한때 스켑틱이었던 딸의 눈에는 한없이 수상한) 민간 자격증까지, 자격증만 몇 개인지 모르겠다. (엄마가 웃음치료사 자격 수업을 들을 때쯤 “따라해 보세요!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합니다 하! 하! 하!” 이 멘트를 몇 번이나 들어야 했다.) 아, 목사 자격도 있다. 목사 아내, 사모로 살 때는 엄마 남편하고 인생관부터 목회관까지 사사건건 부딪히더니, 엄마는 아예 건물 월세를 얻어서 교회를 차렸다. 공인중개사는 하다가 그만 뒀지만. 지금은 엄마와 생활 영역이 겹치지 않게 살다 보니, 요즘은 엄마가 무슨 자격을 따는 데 시간을 투자하며 사는지 잘 모르겠지만, 가끔 전해 오는 안부로 그가 여전히 용기있게 도전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잘 안다.


    엄마와 내가 아주 다른 사람이라고 믿었던 전과는 달리, 요즘은 엄마와 나의 공통점을 찾을 때마다 흠칫 놀라게 되는데, 엄마가 그렇게 자격증 습득에 집착한 이유를 이제 알 것 같다. 어떻게든 남들에게 도움도 되고 싶고, 주변의 인정도 필요했던 그 마음을 알겠다. 어쨌든 엄마가 그렇게 자격증 헌터인 것과는 달리, 나는 자격증이 별로 없다. 그 흔한 운전면허도 없어서, 이력서 자격증란에는 어학 점수밖에는 쓸 만한 게 마땅히 없다. 일부러 이렇게 산 건 아닌데, 타지생활을 하면서 장기간 대학 공부하고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하다 보니까 특별히 다른 자격 코스에 기웃거릴 시간과 돈이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안정된 환경에 들어가려면 한참 먼 내가 이 자격증들을 얻으려고 연거푸 공부하러 다닌 건 이게 지금 내게 정말로 필요한 자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폭력 사건을 처음으로 지원한 건 2015년, 메갈리아가 생긴 이후다. 그때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갑자기 정체화했다. 당시 ‘#나는_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를 통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며 활동을 시작한 사람들은 나 말고도 거의 모두가 수많은 피-가해 사건을 말하는 자리에 불려다녔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 모두는 세계관이 한 번 무너지고 재구성되는 시간을 겪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정체화’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해 본 건 나중이다. ‘정체성’을 찾는다는 의미는 이전의 삶을 재의미화하고, 기억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낸다는 뜻이다. 그땐 그걸 몰랐다. 정체화는 필연적으로 기억의 재해석, 경험의 새로운 의미화를 수반하며, 그 후로는 이전과 같은 것이 없다.


    그때까지 나는 이 세상에 단 하나의 과학적 진실만이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게 더 익숙했던 근대인, 과학만능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래서 인식론의 급변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내게 페미니스트 정체화는 곧 어떤 방식의 세계관을 무너뜨리는 일이었는데, 그때는 그걸 몰랐으니까. 하지만 나 말고도 국민공통교육과정과 대학교육을 거치며 근대적 인식론, 과학적 방법론을 열심히 배우고 체화한 많은 이들이 같은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세상에 단 하나의 진실, ‘팩트’가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으로는 페미니즘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쨌든 메갈리아는 세상을 바꿨다. 나는 어떤 통계 수치들을 볼 때마다 메갈리아와 강남역 살인사건 전후, 그러니까 15-16년 이전과 이후를 유심히 본다. 성폭력 관련 신고/발생 건수, 사회적 불안감에 대한 수치 같은 것이 변화하는 것을 목격했다. 예를 들면, 2013-14년에 14만여 건이었던 성폭력 피해 상담 건수는 2015-16년에 16만 건에 가까워지고 2017년에 이르러 약 18만 건이 된다(여성가족부, 〈여성폭력관련시설 운영실적〉 참조). 나는 이 수치들이 표상하는 실제 사건, 실재하는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졌을 일과 그 사람들의 감정과 그 후의 관계와 삶을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달라진 사회 분위기 같은 것도 생각한다. (우리는 성적대상화와 성희롱에 익숙하게 살아 가던 아이돌이 “다른 여성에게 같은 일이 일어나게 하지 않겠다”며 선처 없는 단호한 고소를 하고, 모든 서사 창작물의 평론과 감상에서 페미니즘이 한 꼭지 정도로는 논의되는 세계에 살고 있다. 그 결과 나도, 캡틴 마블도 ‘메갈’이다.)


    선언 그 후에, 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을 좀더 잘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 금세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 말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알았다. 나의 엄마가, 내가 어째서 그런 식의 위협과 위험에 노출된 삶을 살았는지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엄마는 자신의 고향에서 떨어진 곳으로 결혼 이주를 했는데 (‘시집왔다’거나 ‘이사했다’보다는 ‘이주했다’가 맞는 표현 같다.) 이 지역에는 엄마 편이 되고 엄마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나의 경우, 서울에서 지내는 이십 대 내내 꽤 단절된 사람이었다. 이런 우리 곁에 우리를 도와 주고 어려운 것을 같이 풀어 나가 줄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내가 삶의 지혜와 지식을 구해 온 통로는 대개 직접 아는 사람과의 면대면 대화가 아니었다. 나는 온·오프라인에서 접할 수 있는 글을 통해 주로 세상과 소통했다. 그래서 책과 더불어 온라인 공간, 즉 ‘사이버 스페이스’는 내게 너무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활동범위를 넓힌 후부터, 이전이라면 피-가해 사건으로 호출되지 않을 것이었던 사건들이 피-가해 사건으로 호명되는 당시의 수많은 순간, 나는 어떠한 다른 자격 없이 페미니스트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그 사건들을 논의하고 해결하는 자리에 있어야 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여러 번 실패했다. 그 결과 ‘안정적인 가족’으로 대표되는 안전망이 부재하고 자원이 모자란 상황에서 용기내어 어떤 활동에 뛰어 든 내 삶은 피폐해졌다. 학점도 추락하고, 졸업과 취업은 미뤄지고, 사랑도 우정도 연애도 계속해서 망하고, 건강도 나빠졌다.


    나는 한때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면서,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고 누군가에게 따지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은 지나가고, 그 실패들을 돌아보고 재의미화하며, 나는 제대로 된 공부와 자격의 중요성을 더욱 알아갔다. 그래서 나는 누구보다 ‘모태 페미니스트’의 존재 가능성에 회의적이다. 나의 기억과 경험으로부터 모태 페미니스트 ‘정체성’을 탐구하기가 너무 어려웠을 뿐더러, 이 판국에 어떻게 그런 게 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런 회의감의 바닥을 톺아 본 경험들이 ‘나’와 ‘너’의 다름을 인정한 이후의 연대를 고민하는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 나쁘지 않다. 아직도 알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고, 미래는 불투명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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