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페미니스트 되다: 여대 입학

고양이


   ‘페미니즘을 배워야 아는 것인가, 아니면 여자로 태어나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오래 고민했다. 이 질문에 나름의 답을 쓰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자. 우리 모두는 자신의 위치에 따른 당파성을 가지고 있고, 가져야만 하고, 다만 자신이 인지하는 세계가 얼마나 편협한지를 잘 인지하고 있는지가 문제라는 것. 그래서 중립 지대에서 답을 내릴 수 있는 판관 같은 건 세상에 없다는 것. 이것들이 내가 지금껏 페미니즘 정치학에서 배워 온 바다. 그러니 내 위치부터 밝히자.


    나는 지난 몇 해 동안 이 세대의 어떤 페미니즘이 너무 쉽게 ‘더 가진’ 사람들의 것이 되어 온 현상에 늘 불만을 가져 온 쪽이다. 내 입장에서 볼 때 성별이 여자인 것 빼고는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사람들의 페미니즘과 나의 페미니즘은 언제나 불화했다. 넷페미니스트로 지내면서 5년째 이런저런 흐름들을 지켜 보면서 내가 가장 위화감을 느꼈던 순간은 ‘모태 페미니스트’ 간증들이 쏟아져 나왔던 때다. 그러니까 자기가 페미니즘이란 말을 몰랐어서 그렇지, 사실 자신은 어릴 때부터 페미니스트였다는 식의 정체성 고백들이다.


    어느 순간부터 일곱 살에 할아버지 제사상을 뒤엎었댔나, 하여간 어느 순간부터 자신은 모자란 게 없는데 ‘여자라서’ 차별 받은 게 억울하고 그걸 어릴 때부터 알았고, 저항하고 살았기 때문에 본인은 원래부터 페미니스트였다는 식의 서사들이 넘쳐났다. 한편 얼마 지나지 않아 익명의 어떤 남자 교수가 여대 졸업생들에게 해 주었다는 말, “니들이 아무리 잘났어도, 여자라는 사실 그 하나 때문에 너희들보다 못 배운 사회 하층의 남자보다 더 아래란다. 그러니까 착하게 살지 말아라” 같은 식의 언설도 함께 떠돌았다.


    그리고 바깥 어두운 데서 그걸 지켜 보는 내 심사는… 몹시 뒤틀렸다. 그때의 나를 떠올려 보면 대략 이런 이미지다. 8세기 영문학 대서사시 《베오울프》에 보면 화려한 왕궁의 파티를 보며 괴로워하는 어두운 늪지의 괴물 그렌델이 등장한다. 아마 딱 그런 모양새였던 것 같은데, 왜냐하면 여성인 것 말고도 모자란 데가 많아서 ‘모태 페미’와 거리가 너무너무 먼 삶을 살았던 나는 그 무렵 벌써 어떤 넷페미니즘 진영의 바깥으로 내쫓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여성이란 이유로, 소수자라는 이유로 언제까지나 피라미드 최하층의 무력한 피해자이고 싶지도 않았다. 가능한 그 피라미드 질서를 뒤흔들고, 게임의 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 식의 얘기들은 먼저 세상에 내보낸 글들에서 이미 썼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너무 억울해서 지면 같은 게 생기는 대로 하소연을 할 작정을 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메갈리아 웨이브를 타고서 신났던 것도 잠시,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맞지 않는 옷 같고 마음에 안 드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왜 넷페미니즘 주류의 시각은 그렇게 서울 사는 중산층 이상 괜찮은 대학 다니는 멀끔한 애들의 것으로 쉽게 치환되어버린 건지, 그게 불만이라고. 스타벅스와 샤넬을 가지고 희화화된 밈을 만드는 것까지는 나도 웃겼는데, 그 다음에 왜 가난하고 못생기고 못 배운 사람을 깎아내리는 게 메갈리아의 무기가 되었어야 했는지 의문이라고.


    나는 흠잡을 데라고는 거의 성별밖에 없는 사회 주류인 그런 여성 말고 다른 여성, 예를 들면 나의 엄마 같은 여성들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페미니즘을 더 많이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페미니즘을 찾아 보려고 온갖 책을 뒤지고, 수십 수백 군데 강연을 들으러 다녔다. 그리고 반짝이는 이론가들의 글을 많이 만났다. 그렇게 지금의 결론에 이르게 됐다. 페미니즘은 배운 여자의 것이어 왔고, 그게 맞다는 것. 오히려 페미니즘이 마냥 쉬우면, 거기서부터 뭔가 이상해진다.


    어느 순간, 내가 지금 여기까지 힘을 내서 올 수 있던 자양분을 어디서 얻었던가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건 학교 강의실에서, 수업에서 과제로 내 준 텍스트에서, 그리고 (예를 들면 정희진과 같은) ‘배운 페미니스트’들의 텍스트에서였다. 물론 넷페미니즘의 물결은 정면으로 대중을 향해 있었고, 나는 아카데미아의 일원이 아닌 대중의 일부였기 때문에 그 물결을 타고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쉽고 대중적인 것에만 기댔으면 아마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 사회 일반의 규칙을 따른 것일 수밖에 없고, 그건 쉽게 차별적인 시각으로 약자를 혐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별에 찬성하는 건 (일각의 설명처럼 ‘워마드’가 아닌) 이 사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배워야만 하고, 잘 배우기 위해서는 잘 배울 곳이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페미니즘을 잘 배운 곳이 어딘지를 생각해 보면, 그건 여자대학교였다.


    〈자기, 소개〉에서는 자기소개의 어려움에 대해 구구절절 썼다. 최근에는 “내년에 뭐 하세요?”라는 질문이 가장 대답하기 어렵다. 내년에 뭘 할지 나도 정말 모르겠기 때문이다. MBTI란 심심풀이 성격 테스트에는 계획형(Judging)과 인식형(Perceiving)이란 분류 항목이 있다. 지난 십 년의 테스트 결과를 보면 내향성/외향성 같은 부분은 양쪽이 절반에서 왔다갔다 하지만(이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어떤 자리에서는 여기서 받아들여지는 기준이 뭔지 파악하려고 우선 눈치부터 보고 앉아 있기 때문에 조용하고, 내가 말을 해야 하거나 해도 되는 자리에서는 주도적으로 말이 많기도 하고, 이 두 성향은 한 사람 안에서 공존할 수 있으니까), 생각형과 기분형 중에서는 극단적 생각형이고, 또 계획과 인식을 나누는 부분에서는 극단적인 인식형이다. 좀 이상한데, 생각하는 무계획형 인간이란 뜻이다.


    살아오며 많은 계획을 세웠다. ‘더 나은 삶’이 무엇일지 항상 고민했다. 과거의 경우, 대개 지금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생각하기는 쉬웠다. 그때의 삶은 사회에 통용되는 정상의 기준에서 대부분 성에 안 찼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기, 500원이라도 더 많은 시급 받기, 조금 더 조건이 좋은 남자친구를 만나기, 4인실 기숙사에서 2인실 기숙사로 옮기기, 이런 것들이 내게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지였다. 그리고 그 선택지 중에서 ‘더 좋은 학교에서 더 나은 전공 공부 하기’가 있었다. 한국은 학벌주의 사회란 점을 감안할 때, 물론 적지 않게 속물적인 발상에서 나온 옵션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안정적인 지위를 얻어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마음 말이다. (지금도 늘 두 가지 헷갈리는 마음이 있다. 있는 조건 그대로에서 차별 받지 않고 사는 삶을 만들어야 하는 당위와, 지금 이 조건으로는 도저히 변화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고 여겨지는 한계가 맞부딪힐 때. 둘 중 어떤 길을 골라야 맞는지 잘 모르겠는 갈림길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나는 대학을 하나 졸업하고, 그 다음에 더 낫다고 여겨지는 대학으로 편입을 해 적을 옮겼다. 그리고 내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예상치 못했던 측면에서. 이런 부분을 되돌아볼때면 생각한다. 선택의 기로에 놓인 사람들은 그 선택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꿀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삶을 통제하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많이 해서 계획을 세우고도 자꾸만 알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가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내가 두 번째로 졸업한 대학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모 여대다. (나는 이 사회에 학벌주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또 학벌주의에 반대하고 싶다. 그래서 학교 이름을 제대로 써도, 적당히 얼버무려도 걸리는 부분은 있다. 예를 들면 출신 학교를 ‘서울대’, ‘고려대’라고 말해도, ‘관악/안암에 있는 모 대학’이라고 말해도 양쪽 다 어딘가 못마땅한 건 매한가지인 것처럼. 이게 언제나 고민이라는 점을 일단 밝혀 둔다.) 우선 내가 그 학교에 들어간 다음 처음으로 놀란 건, 정문에서부터 건물 안까지 학교에 온통 여자뿐이라는 점이었다. 두 번째로 놀란 점은, 건물에 남자화장실이 한 층 건너 하나씩 있다는 부분이었다. 세 번째로는, 처음으로 강의실에 들어갔더니, (너무 당연하게도) 강의실에 앉아 있는 수강생 50명도 다 여자였다. 교수님 하나만 빼 놓고. 마지막으로 놀란 점은, 그 남자 교수조차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의 역사와 의의를 줄줄 얘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직전의 학교에서, 나는 3.8에 대한 설명을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었다. 총/부총을 남녀로 나누는 일이나, 총여학생회에 대한 논란은 필요조차 없었다. 일단 감각적인 측면에서 대학 캠퍼스 공간이 모두 여성의 것이라는 점은 어디서나 2등 시민 취급을 당하고도 그게 그런 취급인지 잘 알 수 없던 내게 무척 신선한 경험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이 학교를 나오면 ‘꼴페미’가 된다는 항담은 쭉 있어 왔는데, 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는 정말 이곳에서의 공부와 경험들로 페미니스트가 ‘잘’ 되었다. 문학을 공부하려 하면 ‘여성과 문학’을, 미술사를 공부하려고 하면 ‘여성과 예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었다. 남성 중심의 문학을 배우면서 동시에 제인 오스틴을, 버지니아 울프를, 브론테 자매를 접할 수 있었다. 서구 중심의 여성 문학을 배우면서도 진 리스를, 토니 모리슨을, 글로리아 안잘두아를 배울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안잘두아가 쓴 어머니의 서툰 영어에 대한 기억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쓴다는 것, 유색인종이지만 수학이나 의학이 아닌 영문학을 전공하고 소설을 쓰게 된 탈식민주의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신의 위치와 고민, 이런 것에 대해 쓴 아티클 “How To Tame A Wild Tongue”을 읽은 경험은 반평생 이질적인 방언 화자로 남편의 고향에서 지내 온 내 엄마의 정치적 위치를, 그의 삶을, 나와 그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무척 도움이 됐다.


    15년의 메갈리아 웨이브와 함께 이런 경험이 없었으면, 나는 페미니스트로 계속 잘 살아가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나의 페미니즘은 학교 안팎에서의 경험 양쪽 모두에 빚진 셈이다. 그리고 여대란 공간으로부터 얻은 고유한 감각적 경험들은, 양성평등과 성평등 사이에서, 여성의 페미니즘과 모두의 페미니즘 사이에서 흔들리는 어떤 고민들에 힌트를 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이 차별적인 세상에서 한 명의 반차별주의자를 길러내는 데는 일시적 분리주의도 필요하단 사실을 존재로서 잘 증명하는 케이스가 나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물론 페미니스트가 되어 가는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겠고, 우리의 상상력이 손쉬운 분리주의에서 멈춰버리지 않도록 더 많은 차이의 드러냄과 논쟁과 토론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모로 가도 서울’이란 말이 있다. 어쨌든 결과만 달성하면 끝이라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 반대한다. 서울로 가는 과정이 한 사람을 그 서울에 가서 어떤 사람으로 지내며 살아가게 될지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같은 데에 가게 되더라도, 거기까지 가는 과정의 다름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나는 과거의 내가 무언가를 추구한 결과로서 여대 영문과의 졸업장을 얻게 됐지만, 여기까지 오는 일련의 과정 덕에 과거의 내가 추구하던 ‘더 나은 삶’에서는 좀더 멀어져가고 있다. 나는 결국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고, “후회는 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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