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페미니스트 되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
- 페미니스트 정치 탐구 일지: 홍혜은
- 2019. 4. 30. 08:44
고양이
나는 페미니스트 선언을 계기로 내가 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의 나를 생각해 보면, ‘돌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달에 통장에 들어 올 돈, 내년에 살게 될 집, 삼 년 후 내가 가 있을 곳, 이런 불확실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쉽게 죽고 싶은 기분이 드는 보면 지금을 딱히 멀쩡한 상태라고 하긴 어렵지만, 선언 이후의 내가 그 이전의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벌이고 있었던 건 분명하다. 뭔가 이상 상태였다. 하지만 이게 단지 나 하나만의 서사가 아니었기에, 어떤 식의 의미화가 가능하다.
당시 인터넷에는 기존의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는 글들이 넘쳐났다. 과거에 남들에게 밝힐 수 없었던, 또는 애매하고 불쾌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던, 또는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지냈지만 이제는 별 것이 된 그런 경험담, 그리고 지금의 삶에서 겪는 고통에 대한 이야기들이, 특히 메갈리아를 중심으로 아주 많이 떠돌아다녔다. 열심히 읽고, 나도 썼다. 그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과 분노가 내 것 같았다. 하지만 인터넷 커뮤니티가 모두 그렇듯 메갈리아 역시 철저한 익명성 기반, ‘친목 금지’ 규칙에 따라 돌아갔다. 이런 상황적 배경에서 나는 좀 다른 걸 하고 싶었다. 그런 ‘사적인’ 경험들을 진지하게 들어 주고, ‘나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이야기해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 현실에서도 연결될 수 있다면, 우리는 서로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익명성과 친목 금지가 규칙이 아닌 페이스북 그룹을 따로 만들었고, 온라인 공간 밖으로 사람들을 불러내는 용기를 냈다.
당시는 ‘○○하는 사람 유니온’이라고 이름을 붙인 페이스북 그룹을 만들어서 노는 게 유행이었다. 내 생각에 페미니즘은 사람을 자신이 가진 소수자성을 재해석할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것이고, 이 사회 기준으로 불만족스러웠던 자신의 결점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 만족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반쯤 장난스럽게, 큰 고민 없이 그룹의 이름은 ‘만족하는 사람 유니온’이라고 붙였다. (여성학에 이 비슷한 걸 설명하는 ‘임파워먼트(impowerment)’라는 개념이 있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임파워링된 사람 유니온’이라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럼 백 명도 안 모였겠지만. ‘만족’이나 ‘임파워먼트’의 너무 대책없이 긍정적인 어감이 좀 걸리는 요즘은 ‘주체-당하기’라는 말도 즐겨 쓴다. 어떤 의미와 맥락에서 주체(the definer, subject)는 ‘되는’ 것이 아니라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요즘 같은 마음으론 ‘주체-당한 사람 유니온’을 만들고 싶고,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을 열 명 정도는 안다.)
이 커뮤니티는 특별한 홍보도 없이 금세 덩치가 불어났고, 순탄히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소셜미디어에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을 밝혀 놓은 사람들을 알음알음 모아 이백 명 정도 규모로 시작한 그룹은 구성원이 주변 사람을 다시 여기저기서 끌어들이면서 다섯 달만에 천 명이 넘는 규모가 되었다. 연말의 오프라인 모임에는 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실제로 모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하나된 우리’란 감각이 이뤄 낸 성취(?)였다. 세상은 여전히 ‘빻았고’,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선언 이후’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는 ‘같은’ 시간대, ‘같은’ 감각을 겪으며 살아 가는 페미니스트 동료를 만나 연결되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들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여길 만들고 운영하면서 주로 겪고 배운 건,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는 말의 증명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우리가 ‘어떻게’ 연결 되어야 강한가?’란 의문에 대한 나름의 해답들을 찾아가게 되었다. 즐겁게 분장을 하고 술을 마신 할로윈의 기억, 서로가 여기까지 어떻게 오게 됐는지, 무수한 ‘공감’의 이야기를 나누던 크리스마스 파티 시간들 역시 지금은 기억의 한 편에 잘 갈무리해 두었다. 하지만 내가 정식으로 의문들에 마주하고 부딪히기 시작한 건 커뮤니티가 실질적으로 다 와해되고 난 다음이다. 서로 잘 지내고 싶고, 상처 주고 싶지도 않고, 좋은 사람이자 옳은 사람이고 싶은 마음만 가득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가 되어야 하는지를, 실은 친구가 되기 위해선 착한 마음도, ‘하나’가 될 필요도 없단 사실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감독 장혜영은 발달 장애인인 동생 장혜정과 시설 밖에서 함께 사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 〈어른이 되면〉을 제작하며 “친구가 되기 위해 착한 마음은 필요 없어”라는 문구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다.)
온 도시에서 크리스마스 조명은 금세 걷혔다. 재밌고 신나고 시끌벅적한 잔치는 금방 끝났다. 어려운 봄부터 유독 더운 여름까지 남은 사람들끼리는 ‘성폭력 및 조직 내 갈등 관리 세미나/워크샵’을 했다. 정말 재미라곤 하나도 없고 고생스러운 시간들이었다. 우리는 차마 이력서에 한 줄 쓸 수도 없는 것을 돈과 시간을 들여 해냈다. 나 개인의 삶을 돌아보면, 이미 그때부터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삶으로부터는 한 발 한 발 착실하게 멀어지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이때 이후로 남아 고민을 이어 온 사람들이 지금 대부분 내 주변 친구들이기도 하다. 물론 그땐 이렇게 될 줄 몰랐고.)
애초에 내가 궁금했던 건 ‘(성)폭력’의 확실한 범위와 정의였다. 나는 어딘가에 확실하게 일상과 폭력의 경계가 있을 줄 알았다. 근대 계몽주의자답게, 집에서조차 부모의 갈등을 나서서 중재하려고 했던 큰딸답게, 어떤 사건은 피/가해로 다루고 어떤 사건은 동등한 주체들의 갈등으로 다뤄야 하는지, 피해호소인과 가해지목인은 어떻게 적절히 대하며, 사건을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가장 궁금했고, 고민이었다. 물론 이런 궁금증을 공부로 해소하는 건 어느 정도 가능했다. 피해자 지원 가이드북을 만들고 갈등 관리 프로세스를 짜고 가해자 상담과 교육까지를 오래 고민해 온 페미니스트 활동가들이 남긴 자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다음엔 나의 어떤 경험을 피해와 폭력으로 ‘정체화’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피해자를 지지하고 연대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더 많이 고민하게 됐다. 결국 나는 페미니스트로서 피해와 가해를 다룬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세상에는 ‘완전한 회복과 배상’이 있을 수 없는지를 고민해야 했다. 사람들이 흔히들 하는 “제대로 사과할 사람이면 애초에 그러지도 않았다”는 말의 함정이 뭔지, “진심어린 사과면 해결된다”는 말 뒤에는 어떤 것들이 숨어 있고, 간과되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예를 들면, 완전한 사건의 종결 방식의 하나로는 ‘인정·사과·사죄·배상하지 않는 가해자를 죽이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아버지의 원수!”를 외치며 가해자에게 칼을 꽂는 방식이다. 그러나 〈로미오와 줄리엣〉을 포함한 많은 서사 창작물을 참조하고 나와 내 주변의 많은 경험들을 들여다 보면, 그것조차 온전한 답이 될 수 없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모든 불가능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이후, 피해 경험 그 후를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야만 했다.
컴퓨터 파일을 지우듯 어떤 경험을 깔끔하게 삭제할 수 없는 이상 우리는 ‘경험 이전’의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심지어 컴퓨터 파일 기록 역시 물리적으로 하드에 남고, 노력을 들이면 복구할 수 있다. 세상에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동일한 무언가가 있을까?) 하지만 삶은 그 자체로 계속 되는 것이기도 하고, 계속 되어야만 하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나름의 답을 찾는 과정은 피해당사자의 주체성과 선택의 문제, 동시에 동료 시민으로서의 주변인이, 정치값을 공유하고 지금과 다른 식의 세계를 함께 만들어나가고 싶어 하는 동료 페미니스트가 고심해야 할 윤리의 문제에 직결돼 있다.
가령 나는 이런 문장들에서 힌트를 얻었다. “(이는 법치국가의 상식이므로) 페미니즘은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하자는 사상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그 이상이다. 페미니즘의 관심사는 피해와 가해라는 위치가 주어지는 방식 자체에 있다.” (권김현영 엮음,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교양인, 2018), 10쪽).
과거의 나를 미워하고, 단절하고, 언제나 지금의 내가 완전하고 정당한 ‘최종 버전’인 것처럼 가장하는 식의 정체성 정치가 왜 페미니즘에서 거리가 먼지, 이런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고민해야 했다. 공부한 바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차이’에 대한 것이다. 다양한 우리를 ‘인간’ 또는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뭉개려는, 그래서 각자의 당파성을 지우고 강자의 이익에 강제로 복무하게 하려는 폭력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보편성의 반대는 특수성이 아니라 차이다. 이 차이를 ‘또 하나의 보편’으로 드러낼 때, 기존의 보편성이 실제로는 편파적이고 당파적임을 인식할 수 있다. 특수성은 보편의 하위 개념인 반면, 차이는 보편성의 전체주의를 문제 제기할 수 있는 보편과 동등한 개념이다.” (정희진 엮음, 《양성평등에 반대한다》(교양인, 2016), 46쪽.)
그런데 이 차이는 이 순간 존재하는 현재 우리들 사이에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나‘들’ 간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은 끊임없이 변한다. 매순간 가장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을 고민하는 건 가능해도, 가장 올바른 자리를 매번 차지할 수 있는 존재는 현실에 없고 환상 속에만 있다. 살아있는 것은 변하는 것이다. 성찰하는 존재는 필연적으로 경험을 재의미화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이동한다.
끝없는 질문에 나름의 답을 만들며 의미를 추구하려다보니, 계속 접속할 사람을 찾아야만 했고, 공부를 해야만 됐다. 이렇다 할 출구가 없는 것 같아서 ‘이제쯤은 그만 두고 딱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페미니스트 ‘선배’들이 남긴 고민의 흔적들, 빛나는 말과 글들을 만났기에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까, 나의 현재는 그냥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당시 만난 메갈리안들을 포함해 지금껏 만난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받은 결과점에 서 있다. 이제 와선 그때 그 커뮤니티에 모인 천 명 넘는 사람들 대부분이 무엇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없지만, 각자의 삶이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안다.
한 번은 “앞으로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고 살겠다”고 말하는 친구에게 “그건 죽어야 되는 것”이라는 말을 해 준 적이 있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가능하지 않은 것을 다짐하고 선언하는 일은 자신을 벼랑끝으로 몰아가는 일이란 사실은 나 역시 희미함 속에 뭔가를 더듬어 가며 겨우 알아낸 것이고, 자꾸 까먹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나는 유동하는 존재로서, 그때그때의 의미를 추구하며, 많은 타인들과의 접점 속에 살아갈 것이다. 과거를 통해 배운 것들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침범하고, 침범 당하면서. 나 자신을 상처 입기 쉬운 존재로만 내버려두지 않고, 어느 순간 찾아오는 변화와 성장의 순간들을 두렵게, 기쁘게 마주하며. 길게 돌아와서, 나는 여전히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는 그 말을 믿는다.
정희진이 즐겨 쓰는 사인 문구로 “상상력과 용기를”이란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을 오래 곱씹었다. 분명 우리에게는 더 나은 관계와 사회와 세상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많은 실패와 시행착오와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뒤로 하고, 완전하지 않은/않을 ‘우리’들이 잘 연결되는, 연대하는 방법을 배우기까지 드는 수고와 시간을 쓰기로 기꺼이 마음 먹고 용기를 낼 수도 있다.
'페미니스트 정치 탐구 일지: 홍혜은' 카테고리의 다른 글
#7 페미니스트 되다: 선언 이후 (0) | 2019.04.29 |
---|---|
#6 페미니스트 되다: 여대 입학 (1) | 2019.04.21 |
#5 이전의 삶에서 이후의 삶으로: 나의 페미니스트 모먼트 (0) | 2019.04.18 |
#4 이전의 삶: 연애, 실패 (0) | 2019.04.13 |
#3 이전의 삶: 엄마와 나⑵ (0) | 2019.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