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예술가에겐 허락되지 않은 성장서사: 나혜석(1896~1948)

작업실에서 나혜석의 모습, 1932년 추정, 개인 소장.


(사진 제공=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내가 처음 접한 그림 그리는 여자는 나혜석이었다. 풍문 속의 모던 걸 나혜석은 변호사이자 외교관인 남성과 결혼했고 남편친구와 연애를 했으며 그리고 이혼했다. 그의 그림보다 세상이 수군거린 그의 사생활을 먼저 알았다. 불륜의 대명사, 정조 잃은 여자 나혜석을 좋아하지 않았다. 기왕지사 남편 몰래 연애할 거, 입 무겁고 괜찮은 남자랑 연애할 것이지, 찌질하게 소문이나 내고 다니는 남자랑 연애하다니, 안목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혜석의 그림 역시 별 감흥이 없었다. 일제 강점기 부유한 집안에서 아버지와 오빠의 사랑 속에 성장하고 오빠의 권유로 미술을 선택했을 뿐, 그 선택이 자신의 의지라는 언설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이혼 후 가부장의 지원을 잃고 세상의 혹독한 비난과 냉대 속에 살다가 무연고 행려병자로 죽은 그가 가여웠으나 그 이상은 없었다. 


    김우영의 길고 질긴 청혼을 승낙하며 내건 조건을 보면서도 철없고 순진한 여자의 응석이라 생각했다. ‘일생을 두고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의 딸과는 함께 살지 않도록 해줄 것’, 그리고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시어머니와 전처의 딸이야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싶지 않더라도 첫사랑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 달라니, 그리고 일생을 두고 사랑해 달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것이 결혼 조건이라니 어리석어라, 젊은 나혜석이여. 중산층의 총명한 딸들이 외치는 자기 해방에 늘 의심을 품는 나는 나혜석 역시 그렇고 그런 부르주아 여성 화가라고 여겼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라는 타이틀만 있을 뿐, 공허하고 쓸쓸했다. 자기 세계를 작업에 투과하고 덤덤하고 어른스럽게 자기 삶을 산 여자 화가를 만나는 것은 유니콘을 보기보다 힘든 것 같았다.


나혜석 <자화상>, 1928년 추정작, 캔버스에 유채, 88×75cm.


(사진 제공=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나혜석과 다시 만나다


    그러던 어느 날, 자료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한 장의 사진과 만났다. 익히 보던 하얀 치마저고리의 청초한 나혜석이 아닌, 남자 양복을 걸친 무표정하고 피로해 보이는 나혜석과 만난 것이다. 일자로 다문 입은 단호하고 머리카락은 짧았다. 더 이상 어여쁘게 차려입고 인형처럼 서 있지 않았다. 이제 막 가부장의 휘광을 벗고 비로소 자기 목소리를 내려는 듯 보였다. 자신의 그림을 갑옷처럼, 혹은 성벽처럼 두르고 있는 나혜석은 비로소 한 사람의 예술가, 독립된 한 여성으로 보였다. 그래서 뒤늦게 그의 자화상이라 알려진 그림을 다시 찾아보았다. 


    긴 얼굴 긴 코, 큰 눈의 여성은 나혜석과 닮지 않아 자화상이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내 눈엔 나혜석의 자아와 닮아 보였다. 대담한 터치로 이루어진 두터운 질감은 언뜻 폴 세잔의 인물화와 닮아 보였다. 유럽 여행 이후 야수파, 표현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연구자들은 말하는데 1928년에 그려진 자화상과 미완이긴 하나 전남편 김우영을 그린 초상화를 보면 그 말이 맞는 듯도 했다. 


    나는 일제 강점기에 그려진 화가들의 유화를 개인적으로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유화라는 새로운 재료를 다루기에도 버거워 그림에서 어떤 정서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허나 나혜석의 자화상은 우울한, 그러나 강한 무드가 있다. 유화를 다루는 기술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분위기를 만들어낸 이 자화상은 비슷한 시기 다른 작가의 유화와는 다른 품격이 있다. 그러나 그저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 물정 모르고 활달했던, 거침없었던 이 화가의 성장과 그 결과를 우리는 더 이상 볼 수 없다. 남겨진 그림들도 대부분 유실되었다. 여성 예술가의 작업물을 다루는 방식과 여성을 대하는 이 사회의 모습은 몹시 닮았다.


    나는 종종 상상한다. 나혜석이 천수를 누리고 잘 살았더라면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라는 이중섭보다 나았으리라고. 나혜석보다 딱 이십 년 뒤에 태어난 이중섭의 유명한 <소> 그림과 가족을 그린 그림보다 나혜석의 그림이 나았으리라고 상상하고 확신한다. 늘 애상에 빠져 징징거린 이중섭보다 세계와 불화하며 성장했을 나혜석의 그림들이 더 기대되기 때문이다. 


    남성이라면 젊은 시절의 성장서사로 치환되었을 별것 아닌 흔한 연애사로 나혜석은 예술계에서도 사회에서도 추방되었다. 자기 욕망을 드러내고 자기 목소리로 말하는 여자는 가부장 사회에선 불온한 위협이었다. 가부장이 귀애하는 사랑스러움까지만 여성에게 허락된 세상이었다. 유학을 다녀와도 여자일 뿐이고, 유럽 여행을 하고 새로운 문화의 수혜자가 되어 실험하는 것도 여자라서 허락되지 않았다. 여자는 그저 여자,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 가부장제 안의 역할로만 존재해야 했다. 여성은, 여성 예술가는 실험도, 실패도 그래서 성장도 허락되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찾던 여성 예술가를 유니콘보다 만나기 어려웠던 이유다. 하지만,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렸다. 만들고 만들고 또 만들었다. 쓰고 쓰고 또 썼다. 후대의 여성 작업자인 나는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린, 그림 그리는 여자를 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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