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여자의 세계: 윤석남(1939 - )(2)

빛의 파종 999 ( Seeding of light 999) 나무에 아크릴, 각각 3×23㎝ 999개 1997년


    조용히 생각을 고르고 글을 쓰려고 해도 마음은 시끄럽다. 웹진에 쓰는 원고도 두 번 연속 마감을 미뤘다. 원고를 미루는 동안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던 몇몇 작가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자신의 작업을 페미니즘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실망스러웠고 씁쓸했다. 남성중심 사회에 대한 내 분노가 혹시 내가 가진 피해의식은 아닌지 검열했고, 여성에게 더 실망하는 내가 페미니스트답지 못하다고 책망했다. 나는 더 이상 페미니즘을 모르던 시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데 매일매일 전쟁 같은 젠더 이슈는 숨이 가빴다. 올해 더위는 유난히 흉폭하고 습기 품은 여름은 더욱 느리게 흐른다.

    나는 늘 여성들 속에 있었다.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왔고 일하는 공간에도 늘 여성들이 압도적이었다. 난 여성들과 잘 어울렸고 더러 상처를 받았으며 아마 상처도 주었을 것이다.

    여성들 사이에도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입장이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때론 균열하고 반목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안다는 것은 머리일 뿐 마음은 유연하지 못했다. 대문자 여성은 사랑하기 쉽지만 내 곁의 동료를 품기는 어려웠다.

    페미니스트 동료들에게 마음을 다쳤을 때, 몇 년 동안 기획자로 참여하는 지역문화활동 모임에 간다. 다양한 세대의 여성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뜨개질을 하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소박한 점심까지 함께 먹은 후에 헤어지는 이 모임은 모임 장소인 도서관 이름을 따서 넝쿨뜨개모임이라고 부른다.

    여든과 예순, 쉰과 마흔, 그리고 서른의 여성들이 모인 이 구성원들은 솔직하고 때론 직설적이지만 서로를 판단하지 않는다. 모임에 올 때마다 누구는 감자를, 다른 누구는 방울토마토를, 혹은 복숭아를 가져와 나눠 먹는다. 기획자로 참여하는 두 사람의 작가를 제외하곤 모두 기혼 여성들인데, 다른 모임에 갈 때마다 듣는, 몇 살이냐? 결혼은 안하냐? 애인은 있냐? 벌이는 어떠냐?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이 분들은 현재의 시간, 당신들 앞에 있는 나를 안아준다.

    이곳에서 나는 ‘제소라 작가님’이라고 불리고 ‘사자머리’라고도 불린다. ‘사자머리’는 여든의 할머니가 내 이름 대신 부르는 사랑스런 별명이다. 이 분들이 페미니즘 서적을 읽는 것을 본 적은 없지만 나에게는 멋진 페미니스트들이다. 세대를 아우르는 이 여성들을 만나고 오는 길엔 위로와 함께 질문들 몇 개를 품고 올 때가 많다.

빛의 파종 999 ( Seeding of light 999)


빛의 파종 999, 이름 없는 여성들을 호명하다

    윤석남 선생이 마흔에 그림을 시작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늦은 만큼 어마어마한 생산력으로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거쳐 지금 이 순간에도 진화하고 있다. 마흔 이후 팔십에 이르기까지 윤석남 선생은 ‘여성’ 이라는 주제를 단 한 번도 놓은 적이 없다.

    1997년 선보인 <빛의 파종-999>는 나무조각 설치작업이다. 999개의 25센티가 채 되지 않는 나무기둥에 선명한 채색으로, 혹은 흑백의 모노톤으로 여성들을 그렸다. 그 여성들은 한결 같이 한복을 입고 비슷비슷한 형상으로 그려져 있거나 얼굴의 절반만 크게 그려져 있다. 이 여성들의 얼굴은 무표정하거나 우울하고 혹은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평화롭다. 더러 두 팔을 활짝 열어 춤을 추는 듯 보이기도 한다.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를 소환하고 딸에 딸에 딸들을 불러내어 세워 놓은 듯하다.

    999라는 숫자는 천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숫자다. 천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량대수, 더 이상 채울 수 없는 가득 찬 숫자를 말한다. 버려지는 나무를 그러모아 작업한 <빛의 파종-999>는 완전함의 과정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천이라는 완전수는 세상이 쓸모를 찾지 못해 버린 나무 조각들로 만들어지며 여기에 바로 ‘나’를 더하여 완성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세상의 모든 이름을 얻지 못한 여성들을 호명하고 자리를 내어 준 이 작업은 여성과 여성을 잇고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여 결국은 시공간을 넘어 초월한다.

 

서로의 질문과 답으로 구축하는 여성들의 세계

    페미니즘과의 만남은 작가 입문 이후 ‘또 하나의 문화’ 연구자들을 만나고 나서라고 윤석남 선생은 자주 말한다.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한 연구자들이 던지는 정교한 질문들로 여성의 경험과 삶은 언어를 얻었다. ‘서로의 질문과 대답’이 되는 그 경험들은 창작자의 삶 속에 재 전유되어 직관과 성찰로 쏟아져 화수분처럼 멈추지 않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정교한 질문은 삶을 관통하며 살아 낸 여성의 경험을 발견할 때 태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이론은 결코 삶을 앞지를 수 없다. 또한 삶은 일상의 감각을 잃은 자리에서 생동하지 못한다. 여성의 질문이 힘이 센 건 바로 그 이유에서다.

    늘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여든의 생기 넘치는 작업자, 윤석남 선생은 우리 전통화 중 여성의 초상화가 없다는 것을 최근에야 깨달았다고 한다. 그래서 전통채색화로 자신과 친구들의 초상 작업을 구상 중이다. 새로 배우는 채색화를 잘 그리고 싶어 오래 살고 싶다는 이 여성 예술가를 사랑하지 않기란 힘들다. 윤석남 선생의 자화상과 친구들의 초상화를 설레며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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